떼레즈와 이자벨 Therese and Isabelle (1968) * * 1/2

감독
래들리 메츠거 Radley Metzger

주연
에시 퍼슨....떼레즈
Essy Persson....Therese
안나 게일....이자벨
Anna Gaël....Isabelle
바바라 라지....떼레즈의 어머니
Barbara Laage....Therese's Mother
안느 베르농....르 블랑 선생
Anne Vernon....Mlle. Le Blanc
시몬느 파리....마담
Simone Paris....The Madame
레미 롱가....피에르
Rémy Longa....Pierre

'예술'이라는 단어처럼 사전적 의미가 완전히 무시되고 엉뚱하게 사용되는 단어도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그 중 으뜸은 에로티시즘에 대한 완곡한 표현으로서의 '예술'이겠지요. 만약 웬만큼 나이를 먹은 중산 계층의 남성이 징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여러분에게 "'예술 사진'이나 '예술 영화'를 본다" 또는 "예술하러 간다" 따위의 말을 꺼낸다면 그 양반이 진짜로 하는 말은 바로 "'누드 사진'이나 '포르노 영화를 본다'" 또는 "카바레로 춤추러 간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그건 실제 의미와 변형된 의미가 적당히 충돌한 결과입니다. 자, 모든 포르노는 예술입니다. '예술'이라는 단어는 표현 수단의 명칭이지 그 질까지 보장하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사람들은 '예술'이라는 단어를 무언가 고상하고 품위있는 것으로 차별화시켜 쓰고 있지요. 그 결과 사람들은 자신이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예술 작품'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예술'이라는 단어를 그 앞에 추가하게 됩니다. 그런다고 그 사람들이 감상하는 사진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 자신은 음란한 영감탱이에서 예술 감상가로 변형되지요. 짜잔! '예술 사진'이 탄생한 것입니다!

이 단어의 근친상간적인 결합은 종종 흥미로운 결과를 탄생시킵니다. 수많은 에로 영화의 감독들은 그 '예술'이라는 단어를 정당화하기 위해 정말로 '예술'을 합니다. 그들이 직접 섹스하는 사람들을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핀트 안 맞는 흐릿한 화면과 프란시스 레이 풍의 감상적인 음악을 뒤섞으며 느릿느릿하게 화면을 끌어가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그들 중 몇 명은 정말로 꽤 괜찮은 예술가입니다.

래들러 메츠거 역시 그런 '예술가들' 중 한 명입니다. 미국인이지만 주로 유럽에서 활동하며 유럽 에로 영화의 선두 주자 역을 해왔던 이 남자의 작품들이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그가 정말로 꽤 진지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예술'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떼레즈와 이자벨]은 그 중에서도 의식적인 '예술작품'입니다. 우선 이 영화는 흑백입니다. 네, 68년에 나온 소프트코어 포르노 영화이면서 흑백이지요. 자신이 '예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선택은 없었을 겁니다.

비올레트 르뒥의 자서전적인 소설에 바탕을 둔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주인공 떼레즈는 어머니가 돈많은 부자와 결혼을 하자 기숙학교에 보내집니다. 거기서 떼레즈는 이자벨이라는 금발 머리 소녀와 사랑에 빠지지만 이자벨이 학교를 떠나면서 둘의 짧은 로맨스는 끝이 납니다. 영화는 십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텅 빈 학교를 다시 찾은 떼레즈의 회상으로 전개됩니다.

원작자 비올레트 르뒥은 메츠거에게 판권을 팔면서 제발 더러운 영화는 만들지 말라고 했답니다. 저한테는 에로 영화 전문 감독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우습게 들리지만, 적어도 메츠거는 이 부탁을 충실하게 따랐습니다. 사실 이 영화의 선정성의 정도는 요새 나오는 웬만한 R 등급 영화보다 훨씬 떨어집니다. 어떻게보면 당시 관객들을 배반했다고도 할 수 있죠. 떼레즈와 이자벨은 이 영화에서 꽤 여러 번 섹스를 하지만 관객들은 그들의 섹스신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성당에서 이들이 첫번째 관계를 가질 때 카메라는 조용히 뒤로 빠지고 옛 일을 회상하는 나이 든 떼레즈의 모습으로 옮겨갑니다. 다른 섹스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메츠거는 이 영화를 통해 다양한 섹스신의 간접화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나레이션이 많이 쓰인 것 같긴 하지만 원작자와의 약속은 분명히 지킨 셈이었죠. 더 영화적으로 흥미있는 작품이 되기도 했고요.

에로 영화에 섹스신이 이처럼 조금 나온다니 어쩔까나? 하지만 메츠거는 빈 틈을 그냥 방치해두지 않습니다. 스토리는 뻔하디 뻔한 기숙학교 러브 스토리지만 괜찮은 캐릭터 발전도 있고 몇몇 심리 묘사는 상당히 섬세하게 구축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60년대 모더니즘 영화 특유의 '예술적 테크닉'도 가세합니다. 롱테이크로 우아하게 회랑을 흘러가는 카메라는 막스 오퓰스의 영화들을 연상시키고, 베리만의 영화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인공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종종 과거의 자기 역할을 하기도 하죠. 첫번째 성당의 섹스 신에서 절정에 다다른 이자벨에 성인 떼레즈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건내는 장면 같은 것들을 보세요. 네, 정말 '예술'을 한 티가 난답니다. 한스 유라의 유려한 카메라와 조르주 오릭의 관능적인 음악도 이 영화의 때깔을 높여주는 데 한몫을 합니다.

그렇다면 여전히 이 영화를 소프트코어 포르노라고 부를 이유는 어디 있을까요? 그건 아무리 섹스신이 '예술적으로' 묘사되었다고 해도, 아무리 드라마가 그럴싸하게 구축되었다고 해도, 메츠거가 이들을 다루는 방식은 여전히 꽤 음탕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전 '음탕'하다는 말을 비교적 중립적인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떼레즈와 이자벨]이 요새 나오는 R등급 영화에 비해 특별히 더 모욕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메츠거 영화 특유의 성적인 느낌은 여전히 영화 전체에 강하게 묻어 있습니다. 결국 아무리 그가 덜 모욕적이고 세련되고 품위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했어도, 그 덜 모욕적이고 세련되고 품위있는 영화는 기질적으로 포르노였던 거죠.

에시 퍼슨과 안나 게일이라는 두 주연 배우의 캐스팅도 그런 느낌을 가중시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둘의 캐스팅은 영화의 가장 큰 약점입니다. 떼레즈와 이자벨은 어리디 어린 틴에이저들이어야 하지만 이들은 모두 20대 후반의 성인이니까요. 이들이 교복을 입고 틴에이저인 척 하는 걸 받아들이는 건 그렇게 쉽지 않답니다. 이 때문에 배우들이 롤 플레잉을 하는 포르노 영화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진짜 틴에이저 배우를 기용하는 것도 어려웠을 것이고, 이런 영화들의 보는 관객들의 취향도 고려했을 거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게다가 두 배우는 너무 나이들어 보인다는 걸 제외하면 꽤 일을 잘해냈거든요.

[떼레즈와 이자벨]은 여전히 메츠거의 대표작으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보다 복잡한 비평과 분석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그의 [음탕한 사중주]와 같은 영화들이 더 흥미로운 텍스트가 되겠지만, 그런 영화들이 [떼레즈와 이자벨]의 인기를 넘어설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떼레즈와 이자벨]은 앞으로도 유로 에로티카와 60년대 모더니즘 영화의 기묘한 혼합으로 남아 관객들을 끌어들일 듯 합니다. (01/01/05)

DJUNA


기타등등

[천상의 피조물]의 '동키 세레나데' 장면은 아무래도 떼레즈와 이자벨의 자전거 경주 장면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온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