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배형준

주연
김하늘....주영주
강동원....최희철
김지영....할머니
송재호....희철 부
남수정....첫째 고모
임하룡....둘째 고모부
김은영....둘째 고모
류태호....셋째 고모부
구혜령....셋째 고모
이영은....최수미
명지연....화숙
김아롱....명자
남상미....재은
이천희....영득

영주

가석방 된 뒤 결혼식을 앞둔 언니에게 직접 만든 나무 기러기를 선물로 주기 위해 부산으로 향하던 전문 사기꾼 영주는 여자친구에게 청혼하려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희철을 만나게 됩니다. 희철이 반지를 소매치기 당하는 걸 목격한 영주는 가석방 상태인 자기에게 문제가 생길까봐 다시 그 반지를 훔쳐냅니다. 하지만 기차는 영주를 남겨놓고 떠나가 버리고 반지를 돌려주러 희철의 고향으로 간 영주는 얼떨결에 희철의 약혼녀 취급을 받게 되지요.

[그녀를 믿지 마세요]의 설정이 익숙하게 들린다면, 그건 선례가 많기 때문입니다. 가장 유명한 건 역시 윌리엄 아이리쉬의 소설 [나는 죽은 자와 결혼했다]겠지요. 이 소설 이야기를 변주시킨 [당신이 잠든 사이에]도 우리에겐 잘 알려진 영화이고요. 조금 덜 급박한 상황을 다룬 [결혼만들기 HouseSitter]와 같은 영화도 있습니다. 모두 어쩌다가 생판 모르는 남자의 약혼녀 행세를 하게 된 여자들의 이야기지요.

선례가 있건, 없건, 이런 식의 설정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조금씩 쌓여가는 거짓말의 함정이 주인공을 옭아매는 과정이나, 반대로 그런 난관들을 자신의 재치로 조금씩 해결해가는 주인공의 대응은 모두 흥미진진한 드라마나 코미디의 소재가 됩니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의 설정은 앞에 예를 든 작품들보다 조금 더 사디스틱한 편입니다. 앞의 작품들과는 달리 이 영화의 진짜 희생자는 노련한 전문 사기꾼인 영주가 아니라 영주가 위기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발판으로 이용하는 희철이기 때문입니다.

덕택에 영화의 전반부는 아주 유쾌한 학대극이 됩니다. 희철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산전수전 다 겪은 전문가인 영주의 상대가 되지 못하니까요. 영주의 전문가다운 노련한 임기응변도 재미있지만, 희철의 단순한 세계가 이해불가능한 초현실적 악몽으로 떨어지는 과정은 진짜 재미있는 구경거리입니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방해가 될 정도로 희철이 불쌍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희철에 대한 학대는 비교적 안전한 선에서 조율되어 있고 영주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능하니까요. 결정적으로 갑자기 김하늘이 나타나 자기의 약혼녀라고 주장하는 설정이 최악의 고난이라고 생각하는 관객들은 거의 없을 거예요.

하지만 영화는 중간에 주저앉습니다. 어쩔 수 없는 '한국식 로맨틱 코미디'의 함정에 빠져 버린 거죠. 초반에 근사한 속도로 진행되던 사디스틱한 코미디는 중반 이후 미적지근한 신파에 감염되어 버립니다. 영주는 희철네 집에 얹혀사는 동안 그 집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동하게 되고 영주와 희철은 서서히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거죠.

도대체 왜 이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전 아직도 이 '한국식 로맨틱 코미디'의 의무감을 이해할 수 없답니다. 왜 영화 하나로 온갖 이야기를 다 하려 한단 말이에요? 소재의 가능성을 활용하는 것만으로도 러닝타임이 부족할 판인데요. 그런 식의 신파로 맥을 빼지 않아도 좋은 로맨틱 코미디 구실을 하는 영화들은 많습니다. 쉬운 예로 [레이디 이브]는 어때요?

하여간 후반부에서 뭔가 '깊은' 이야기를 하고 로맨스의 분위기를 살리려 애쓰는 동안, 영화는 앞에서 쌓아온 독기들을 다 날려버립니다. 비교적 괜찮은 국면 전환이 될 수 있는 설정들은 중간에 그냥 녹아버리고... 결정적으로 영주가 너무 착해져버리지요. 이 영화의 후반부는 관객들보고 영주를 사랑해달라고 구걸하는 사족입니다. 정말 쓸데없지요. 사기꾼 천사처럼 탈색되어 버린 후반부의 영주보다 전반부의 능구렁이같은 영주가 훨씬 귀엽고 재미있거든요. 그렇다고 후반부가 어떤 감동을 주거나 깊이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까운 일입니다. 가끔 감독이 지나치게 '귀여운 과장'을 강요하긴 해도, 김하늘이나 강동원은 모두 효과적으로 캐스팅된 배우들이고 둘의 사도매저키스틱한 궁합도 근사하거든요. 그래야 할만큼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초반부 코미디의 얄미운 맛도 좋았고요. 쓸데없는 장르적 의무감에 빠지는 대신 조금만 더 부지런히 머리를 써서 본류에 충실했다면 [그녀를 믿지마세요]는 정말 재미있는 코미디가 되었을 겁니다. (04/02/12)

DJUNA

기타등등

김하늘에게 사기꾼 역이 그럴싸하게 어울리는 건 배용준의 바람둥이 역이 그럴싸한 것과 같은 이유인 듯 합니다. 배용준의 '깨끗한' 이미지가 전문 바람둥이의 가식이라면 김하늘의 '청순한' 이미지는 전문 사기꾼의 가면인 셈이죠. 양쪽 모두 진실에 더 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