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에릭 로메르 Eric Rohmer

주연
카테리나 디다스칼루....아르시노에
Katerina Didaskalu....Arsinoé
세르쥬 렌코....표도르
Serge Renko....Fiodor
시릴 클레르....마기
Cyrielle Clair....Maguy
그리고리 마누코프....보리스
Grigori Manukov....Boris
디미트리 라팔스키....도브린스키 장군
Dimitri Rafalsky....Général Dobrinsky
아만다 랑글레....자닌
Amanda Langlet....Janine

표도르와 아르시노에

[삼중 스파이]는 에릭 로메르의 스파이 영화입니다. 스파이 영화라고 했지만 제임스 본드식 액션은 당연히 기대하지 마시길. 영화의 이야기는 이언 플레밍풍이라기보다는 조셉 콘라드풍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작은 방에서 대화를 나누는 예절 바른 사람들을 담은 장면들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단지 이전 로메르 영화들과는 달리 대화의 소재는 모두 정치에 국한되어 있죠.

영화의 시대 배경은 1930년대 후반. 이야기는 망명한 러시아 백군 장군인 표도르 보로딘과 그의 그리스인 아내 아르시노에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표도르는 망명한 러시아인들을 위한 단체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의 위치는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으르렁거리는 30년대의 유럽에서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더 짜증나는 건 그의 행동이 모호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죠. 그는 정말 백군에 충실한 전직 군인일 수도 있고 나찌나 소비에트 러시아에게 포섭된 스파이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모호한 태도와 수상쩍은 행동을 유지하는 동안 그와 아르시노에의 관계는 서서히 붕괴되어 갑니다. 영화 시작 전에 나오는 자막에 따르면 이들은 실존 인물이고 이야기의 설정 역시 사실이라는군요.

거대한 정치적 격동기를 무대로 삼고 있는 스파이물이지만 [삼중 스파이]의 기본 주제는 여전히 개인의 도덕입니다. 이런 면에서 이 영화는 기존의 로메르 영화에서 거의 벗어나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지요. 영화는 표도르의 정치적 선택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건 표도르의 도덕적 선택이죠. 영화의 비극은 그가 소련이나 나찌를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불성실하고 불충실했기 때문에 초래됩니다.

구체적인 언급은 들어본 적 없지만, 로메르의 이전 방식을 고려해보면 그는 지금 또 하나의 시리즈를 만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반동들의 눈으로 본 유럽 역사물 말이죠. :-) [영국 여인과 공작]이 프랑스 혁명을 혐오와 공포의 눈으로 바라보는 영국 귀족 여성의 시선으로 그렸다면 [삼중 스파이]는 러시아 망명객의 눈으로 20세기 세계사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슬슬 이 양반도 남들 시선에 신경쓰지 않고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나 봅니다. 하긴 엄청난 정치적 사명감도 없으면서 다른 사람들 맘에 안드는 소재를 다루었다는 이유만으로 끝도 없이 자기 주장에 대한 변명을 해대야 하는 위치에 서는 건 귀찮은 일일 거예요. 죽을 날이 머지 않은 노인네니까 해볼만한 일이죠. (04/11/10)

DJUNA

기타등등

표도르 보로닌의 아내는 원래 그리스인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로메르는 두 사람이 영화에서 프랑스어를 구사할 수 있게 캐릭터의 국적을 바꾸었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