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Troy (2004) * * 1/2

감독
볼프강 페터센 Wolfgang Petersen

주연
브라이언 콕스....아가멤논
Brian Cox....Agamemnon
브래드 피트....아킬레우스
Brad Pitt....Achilles
브렌든 글리슨....메넬라오스
Brendan Gleeson....Menelaus
다이안 크루거....헬레네
Diane Kruger....Helen
에릭 바나....헥토르
Eric Bana....Hector
올란도 블룸....파리스
Orlando Bloom....Paris
가렛 헤들룬드....파트로클로스
Garrett Hedlund....Patroclus
숀 빈....오디세우스
Sean Bean....Odysseus
줄리 크리스티....테티스
Julie Christie....Thetis
피터 오툴....프리아모스
Peter O'Toole....Priam
샤프론 버로우즈....안드로마케
Saffron Burrows....Andromache
로즈 번....브리세이스
Rose Byrne....Briseis

('스포일러'가 있답니다.)

헥토르
듀나 단 한 번도 [일리아드]의 이야기를 장엄하다거나 근사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영웅이라는 딱지만 붙었을 뿐 성미 급하고 굉장히 쫀쫀한 남자들의 난투극 이상으로 느껴본 적이 없어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들에 대한 저의 평가는 유명한 모 벨기에 탐정의 의견을 닮아갑니다.

[트로이]를 보면서 제가 괜히 키들거렸던 건, 볼프강 페터센의 새 버전 역시 이 자칭 '영웅들'을 그렇게까지 높이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영화는 트로이 전쟁을 다룬 그리스 고전 문학에 나왔던 거창한 수사들을 모두 지워버립니다. 아가멤논은 야비한 침략자이고 파리스는 비굴한 겁쟁이인 식이죠. 트로이 전쟁 역시 신들이 개입한 장엄한 서사시가 아니라 어설픈 핑계를 앞에 내세운 침략 전쟁입니다.

파프리카 그리스 관객들은 싫어했을 것 같군요.

듀나 뭐, [일리아드]를 숭배하는 고전팬들은 불만이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호메로스가 자기 식으로 이야기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할리우드에게도 트로이 전쟁을 자기 식으로 이야기할 권리가 있습니다. 역사는 문학의 종속물이 아니에요.

파프리카 하지만 이 경우는 종속물일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트로이 전쟁에 대한 유일한 자료는 그리스 고전 문학들 뿐이니까요. 현대 고고학의 자료들은 호메로스가 묘사한 트로이 전쟁의 구체적인 전황을 그려내지는 못합니다. 막연히 이 지층 어딘가에 트로이 전쟁의 흔적이 있을 거야...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지요.

듀나 그렇겠죠. 하지만 당시 상황을 보다 그럴싸하게 그려내는 건 가능합니다. [트로이]에서는 꽤 흥미로운 일을 했죠. 신들을 모두 제거해버린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선택을 싫어합니다만 전 꽤 생산적인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단지 사실성을 높이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에요. [트로이]의 무신론은 상당히 적극적입니다. 이 영화는 트로이 전쟁엔 우주를 지배하는 신들의 장엄한 의지 따위는 개입되지 않았고 있었던 건 오로지 금박칠한 조각상들을 내세운 개미같은 인간들의 허풍뿐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지요. 이 차가운 냉소주의를 근본주의가 판을 치는 지금의 세계 정세에 대입해보는 것도 생산적인 일일 거예요.

파프리카 그러고보니 영화 [트로이]의 설정은 신화 속의 고대전보다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대전에 가깝긴 해요. 원래 의도는 아니겠지만 지금의 이라크 전에 몇몇 인물들을 대입해볼 수도 있지 않겠어요? 아가멤논은 체니쯤 되겠고 메넬라오스는 부시 주니어이고 오디세우스는 토니 블레어이고...

듀나 그런 식으로 끼워맞춘다면 헬레네는 이라크가 어딘가에 꽁꽁 숨겨놨다는 대량살상무기쯤 되겠네요. :-P

파프리카 전쟁이란 대부분 비슷하니까요.

듀나 차라리 트로이를 차갑고 냉정한 사실주의로 그렸다면 영화가 더 그럴싸해지고 메시지도 더 잘 통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그게 힘들죠. 사람들은 폼나는 고대전을 구경하러 왔고, 호메로스나 그밖의 작가들도 일당 백으로 싸우는 영웅들에 집중하고 있으니까요.

덕택에 영화는 자연스럽게 할리우드 액션물의 전형성에 빠지게 됩니다. 캐릭터들은 착한 쪽과 나쁜 쪽으로 구별되고 영화의 결말 역시 거의 공식적인 인과응보로 끝이 나죠. 10년을 넘게 끈 전쟁도 며칠 만에 속전속결로 끝나고요.

파프리카 침략국 그리스가 결국 트로이를 정복하는데도요?

듀나 그거야 어쩔 수 없죠. 그래도 남자들은 대부분 죽고 살아남은 여자들도 몽땅 노예가 된 결말보다는 살아남은 여자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트로이의 검'을 든 아이네이스를 따라 도망가는 쪽이 낫지 않겠어요? 이 영화에서는 작정하고 악당이 된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의 죽음도 그렇고요. 하긴 여자 앞에서 깐쭉거리다 칼에 찔려 죽으나, 집에 돌아가서 마누라 정부한테 찔려 죽으나...

파프리카 하긴 아가멤논은 전쟁터에서 죽는 게 모두를 위해 낫겠네요. 클리타임네스트라도 괜히 남편 죽일 고민 안해도 되고 엘렉트라도 엄마 미워하는 사춘기 소녀에서 벗어나 비교적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거고 오레스테스도 엄마 죽이고 죄의식에 미치는 일 따위는 없었을 거고. 갈수록 대체역사 이야기로 흘러가네요.

듀나 할리우드식 대체역사죠. [트로이]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이 모범적인 공식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에 생기가 느껴지지 않아요. 더 편하게 볼 수는 있지만요.

파프리카 이 영화에서 가장 각색하기 어려웠을 인물은 아킬레우스였을 거예요. 이 영화의 아킬레우스는 그리스 신화의 기본 이미지와 할리우드 영화의 모범적인 주인공 사이를 생각없이 오가는 것 같아요. 어떤 때는 영원히 남을 명성에 사로잡혀 칼질을 해대다가도 어떤 때는 괜히 할리우드식 반항아처럼 폼을 잡다가 또 어떤 때는 멜로드라마 주인공처럼 적진에 뛰어들어 (그것도 트로이의 목마에 숨었다가요!) 연인의 이름을 울부짖으니... 이거야...

듀나 그렇다고 그냥 그리스 신화의 이미지를 밀고 갔다면 아킬레우스는 몰입하기 힘든 인물이 되었을 걸요. 일단 호메로스가 장엄하게 그리고 싶어했던 아킬레우스의 분노라는 것부터가 "아가멤논이 내가 데리고 놀려던 예쁜 여자를 빼앗아갔다. 에이 씨, 나 전쟁 안해!"였잖아요. 이렇게 밀고 나갈 바에는 처음부터 그 '예쁜 여자' 브리세이스와 아킬레우스가 그럴싸한 관계였다고 묘사하는 편이 현대 관객들에게는 더 잘 먹히겠죠.

파프리카 전 아킬레우스와 브리세이스가 응응응하는 것보다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가 응응응하는 걸 더 보고 싶었는데.

듀나 배리 푸비스의 [아킬레우스]에서 그런 건 실컷 보지 않았어요?

파프리카 그건 처음부터 끝까지 성적 암시로만 차 있었잖아요. 물론 실사로도 한 번 보고 싶었고요. 이 영화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때문에 아킬레우스가 분노하는 설정이 비교적 약하더군요.

듀나 영화의 이야기도 전체적으로 트로이 전쟁과 반전물, 할리우드 액션물 사이에서 맥없이 방황하고 있었죠. 종종 등장인물들은 자기가 어느 설정에 속해있는지 몰라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전체적으로 이 영화는 중심이 없어 보여요.

파프리카 배우들은 괜찮았어요. 전 에릭 바나가 연기한 헥토르가 꽤 좋았어요. 유일하게 '영웅' 비슷하게 나온 사람이었죠. 뛰어난 군인이지만 전쟁의 추악함을 알고, 자신의 한계를 알만큼 현명하지만 그렇다고 운명으로부터 달아나지 않는... 꽤 괜찮은 인물이었어요. 바나의 연기도 믿음직했고요. 올란도 블룸이 연기한 얄팍하고 생각없고 비겁한 젊은이인 파리스의 모습도 꽤 신선했어요. 숀 빈도 아주 그럴싸한 오디세우스였고... 브라이언 콕스와 브렌든 글리슨은 스테레오타입화된 악당들이었지만 그 한계 속에서 설득력있었지요.

듀나 다들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지만 전 다이안 크루거의 헬레네에 별 불만이 없어요. 제가 생각하는 헬레네의 이미지는 생기없고 차가운 조각상 같은 모습이거든요. 이 영화에서 진짜 문제는 헬레네에게 어떤 비중의 역할을 주어야 하는지 몰랐다는 데 있죠. 헬레네는 이런 식의 애매한 위치가 맞지 않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으로 내세우거나 완벽한 배경으로 밀어놓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죠. 이 영화에는 후자가 더 어울렸을 것 같지만요.

이 영화에서 가장 어정쩡했던 배우는 아킬레우스 역을 연기한 브래드 피트였어요. 이 배우는 피사체로서는 그럴싸해요. 액션 장면도 나쁘지 않고요. 하지만 그리스 신화의 영웅은 이 배우에게 맞지 않아요. 일단 대사 소화력부터 문제가 있죠. 피트는 혀가 좀 짧잖아요. 조금이라도 인위적이거나 빠른 대사에서는 그 혀짧은 발음이 이 배우를 마구 걸고 넘어지는데, 정말 들으면서 난처하더라고요. 피트는 신화 속 아킬레우스의 그 거창한 원형성도 살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제대로 된 할리우드 액션물의 캐릭터를 보여주지도 못해요. 그냥 어정쩡하죠. 게다가 요샌 왜 이 배우의 하관이 그렇게 넓어보이는 건지...

[트로이]는 그럴싸한 야심을 가지고 시작된 영화였어요. 이 야심이 제대로 된 스타일을 찾았다면 정말 괜찮은 작품이 나올 수 있었지요. 하지만 이 영화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는 데도 실패했고 고전의 맛을 살리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지요. 영화는 한마디로 자기가 무엇을 말하려는지도 확신이 없고 자신이 상대하는 관객들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는 듯 해요.

아직까지 할리우드에서는 지금 슬슬 부활하고 있는 그리스/로마 사극을 위한 적절한 기반을 찾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올리버 스톤이 지금 만들고 있는 [알렉산더]가 그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할지는 두고봐야겠지요. (04/05/26)

D&P


기타등등

브래드 피트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 정말로 아킬레스건을 다쳤다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