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김용균

주연
김희선....와니
주진모....준하
조승우....영민
최강희....소양
김광림....와니 아버지
이혜숙....와니 어머니
손세광....현수
최광일....정우
박정환....성재
이삼우....도석
서자영....자영
김수진....영숙
민윤재....수미
김승현....수경
양영정....영정

준하와 와니

기획 당시 [와니와 준하]의 원제는 [쿨]이었습니다. 같은 제목의 KBS 미니 시리즈가 나와서 중간에 제목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요. 잘된 일인 것 같아요. 이런 영화가 [쿨]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오는 건 수수께끼의 답을 맨 앞에서 폭로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 영화의 제1목표는 이 대한민국 땅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가장 '쿨한 로맨스'가 되는 것이었을테니 말이에요. 만약 제목까지 [쿨]이었다면 그 노골적인 자기 과시 때문에 결과가 상당히 '언쿨'했을 겁니다.

[와니와 준하]는 1년 정도 사귀다 동거 중인 두 연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와니는 동화부에서 6년 경력을 쌓은 애니메이터이고 준하는 데뷔를 준비하는 영화 각본가죠. 초반의 열정은 반쯤 날아가버렸고, 둘 다 이제 너무 익숙해져 거의 가구 비슷해진 서로의 존재감과 자기네들의 직업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와니의 의붓 동생 영민의 귀국 소식이 들려오고 영민을 짝사랑했던 학교 후배 소양이 와니의 집을 방문합니다. 그와 함께 지금까지 조용히 묻혀져 있던 와니의 과거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죠.

[와니와 준하]는 신선한 이야기와 소재로 승부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와니와 영민의 관계가 조금 터부를 건드리긴 하지만, 둘이 진짜 피가 섞인 친남매인 것도 아니니 둘이 연애 좀 했다고 해서 근친상간이라고 밀어붙일 필요도 없죠. 영화가 집중하는 건 소재의 센세이셔널리즘이 아니라 전체적인 무드와 섬세한 심리 묘사입니다.

이 영화의 역학관계는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와니에게 영민은 이미 과거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남긴 상처는 잠시 잊혀졌을 뿐이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죠. 와니가 옛 상처에 고민하는 동안, 와니의 과거에 대한 불확실한 정보를 필사적으로 꿰어맞추던 준하는 불안해진 자신의 위치 때문에 갈등하게 됩니다. 둘이 열심히 고민을 하는 동안, 영화는 조각그림 맞추기라도 하듯,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와니의 이야기를 완성시키죠.

아까도 말했지만, [와니와 준하]는 '쿨'한 영화입니다. 준하는 여자친구가 의붓 동생과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해서 "아니, 동방예의지국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라고 분노할만큼 촌티나는 남자가 아닙니다. 와니 역시 동성애자나 청각장애인인 직장 동료들에게 쓸데없이 과민반응할만큼 무지하지도 않습니다. 아직도 미혼 커플의 동거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국 중산계층의 분위기를 고려해보면, 와니와 준하의 주변 사람들이 이들의 관계에 대해 보이는 반응 역시 꽤 '쿨'합니다.

이런 설정의 상당 부분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과 우리의 주인공들이 얼마나 쿨한 사람들인지 보여주기 위한 작위적인 도구입니다. 스토리만 따진다면 이 영화에 동성애자와 청각장애인 동료들이 등장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들에 대한 와니의 '정치적으로 공정한' 반응은 와니의 쿨한 수준을 높여줍니다. 그뿐이에요.

그러나 여기에 대해 너무 냉소적일 필요는 없습니다. 동성애자나 장애인 동료들이 꼭 나올 필요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겠어요? 아무리 쿨함의 추구가 제1목적이라도 해도 이들에 대한 동료들의 편견없는 따뜻한 반응은 보기 좋습니다.

결정적으로 이 영화에서 쿨함은 꽤 중요합니다. 쉽게 소재주의로 흐를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함정에 빠져 시간낭비하지 않고 로맨스의 핵심을 짚어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쿨함 때문이니까요. 이 영화의 쿨한 터치는 소재주의 일반론을 제거합니다. 결과적으로 내용이 더 깊어지지요. 쓸데없이 과거를 풀어헤치며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대신 적절한 모호함 속에서 이야기를 전개시킬 수 있기도 하고요.

영화의 쿨한 터치는 배우들의 연기에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김희선이 유일하게 배우처럼 보이는 작품이라고들 합니다. 전 김희선의 텔레비전 시리즈는 거의 보지 못했으니 그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못합니다. 하지만 김희선이 다른 작품들에서와는 달리 상당히 설득력있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배우 자신도 열심히 했겠지만 진짜 이유는 아마 이 영화의 기본 노선 때문일 겁니다. [와니와 준하]의 쿨함은 상당히 세련된 것이어서 이 배우의 가장 큰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 척하는 느낌을 모두 제거해버렸으니 말입니다. 그 결과 이 배우는 쓸데없이 이미지 장난을 치는 대신 캐릭터의 핵심에 접근할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됩니다. 그건 연기 파트너인 주진모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시청각적인 면만 따져도 영화는 쿨합니다. 쓸데없이 장식적이고 과시적인 소도구를 남발하는 대신 춘천의 평범한 주택가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삶을 그림 소재로 잡으면서도 정갈하고 예쁜 이미지들을 창출해내고 있죠. 종종 지나치게 예쁜 효과에만 의존하는 경우도 있지만 [시월애]처럼 과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예쁜 그림들의 무심한 아름다움이 영화가 종종 던지는 자극적인 소재나 사건들에 적절한 대위법의 효과를 내기도 하고요. 수채화 톤으로 그려진 도입부와 후반부의 애니메이션도 어색한 삽입이라는 느낌없이 상당히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좋은 복선이기도 하고요.

[와니와 준하]는 단아하고 예쁩니다. 어떻게 보면 그게 전부인 영화이고 그 때문에 가끔 필요 이상의 결벽증이 느껴지기까지 해요. 하지만 처음부터 '쿨한 순정만화같은 이야기'를 의도한 영화라는 걸 생각해보면 그게 특별히 대단한 잘못은 아닐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묘사하는 감정의 깊이가 특별히 얇아지는 것도 아니고 예술작품이 늘 거칠거칠한 현실성에만 매달려야 한다는 법도 없으니까요. 결정적으로 최근 몇 년 동안 만들어진 한국 영화들 중 [와니와 준하]처럼 '쿨함'을 원래 의도만큼 확실하게 체화시킨 작품들은 많지 않잖아요. 그 정도만 해도 이 영화는 자기 역할을 한 거예요. (04/05/03)

DJUNA

기타등등

자전거 음주 운전을 하는 소양에게 할아버지가 시끄럽다고 고함을 지르는 장면은 촬영 중 실제 일어난 돌발 상황이라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