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아리 클레벵 Harry Cleven

주연
엘리나 뢰벤존....줄리에트
Elina Löwensohn....Juliette
장-앙리 콩파르....가스파르
Jean-Henri Compère....Gaspard
파스칼 그레고리....귀도
Pascal Greggory....Guido

1.

[최후의 연인들]의 원제를 번역하면 대충 이런 것이 나옵니다. [세상이 끝나는 날에 왜 결혼을 할까?]

영화 제목의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마시길. 이 영화는 세상 종말과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질문을 살짝 넓게 확장하면 영화의 분위기를 잡아낼 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헛된 것이라는 걸 알면서 미친 듯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걸까요?

이 영화의 주인공 가스파르도 아마 나중엔 그런 질문을 하고 싶을 겁니다. 그라고 보름달이 뜨던 그 폭력적인 밤 이후 그가 저질렀던 모든 일들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으니까요.

평범한 구급 요원에 불과한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그는 교통사고 현장으로 구급차를 몰고 갔다가 사고 피해자인 줄리에트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줄리에트 옆에서는 근친상간적인 사랑으로 역시 반쯤 미쳐 버린 배다른 오빠 귀도가 있죠. 가스파르는 귀도에게서 벗어나려는 줄리에트를 도와주는 동안 귀도만큼이나 정신나간 사랑의 광기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스크린은 납치, 폭행, 살인 미수, 자해와 같은 다양한 폭력 행위들로 범벅이가 되지요.

2.

[최후의 연인들]의 스토리는 무척이나 고전적입니다. 위기에 빠진 미녀인 줄리에트가 가운데 있고, 양쪽에는 미녀를 감금한 괴물인 귀도와 그녀를 구출하려는 기사인 가스파르가 버티고 서 있습니다. 미녀가 자유를 갈구하는 동안, 괴물과 기사는 한손으로는 미녀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상대편을 두들겨 패고 있죠. 참으로 친숙한 장면 아닌가요?

아마 가스파르가 정신이 나갔던 것도 그 친숙한 설정 때문이었을 겁니다. 줄리에트의 등장은 그가 지금까지 영화나 소설을 통해 접했던 '로맨틱한 사랑'을 위한 모든 조건들을 갖추고 있었으니까요. 그가 줄리에트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도대체 뭐예요? 미인이라는 것, 처음 만났을 때 꺾인 꽃처럼 아스팔트 위에 아름답게 쓰러져 있었다는 것, 흉포한 남자 한 명이 그녀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 모두 줄리에트라는 개인과 큰 상관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가스파르는 줄리에트라는 사람보다는 하나의 틀에 빠진 거죠. 평범한 직장인인 그에게 로맨틱한 사랑의 기회가 찾아오자, 그는 두 번 생각도 하지 않고 미끼를 덜컥 물어 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줄리에트가 가스파르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뭔가요? 교통사고 현장에서 자기를 구해주었다는 것이 전부죠. 나머지는 모두 기능적입니다. 줄리에트는 귀도한테서 벗어나기 위해 뭐든지 해야 하는데, 가스파르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바로 그 도구인 거죠. 줄리에트와 귀도의 마지막 대결 장면을 보면 가스파르의 기능성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로맨티시즘으로 미화되지 않고 기능적인 목적으로 끌어오지 않은 사랑은 미치광이 귀도의 것 뿐입니다. 그는 비틀린 남자지만 줄리에트를 줄리에트로 사랑합니다. 그 사랑행위라는 것이 동생을 기절시킨 뒤 재갈을 채우고 묶어서 옷장에 가두는 것이니 문제지만요.

재미있는 것은 줄리에트와 가스파르 모두 귀도를 영감의 원천으로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사실 줄리에트에 대한 가스파르의 사랑은 귀도의 정신나간 애정 표현을 본 뒤에야 터져나옵니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점점 귀도의 정신나간 미친 짓들을 거의 그대로 따라하고 있어요. 줄리에트는 보다 이성적이지만 그녀가 가스파르를 대상으로 벌이는 비정상적인 애정 행각 역시 귀도의 영향이 큽니다. 하긴 본 게 그것밖에 없으니 다른 길도 없었겠지요?

서로에 대한 환상이 광기를 만나 부풀자, 그들은 뒤섞여 하나가 됩니다. 재미있는 법칙이 숨어 있어요. 이 영화를 보면 세 사람의 에너지 총합은 언제나 비슷합니다. 줄리에트가 생기를 띄면 귀도나 가스파르가 기가 죽고, 귀도가 미쳐 날뛰면 줄리에트와 가스파르가 맥이 풀립니다. 두 사람이 비슷한 에너지로 날뛰는 동안엔 남은 한 사람은 정신을 잃고 있거나 감금되어 있지요. 이 영화는 시작부터 굉장히 정신분열증적인 로맨스입니다. [파이트 클럽]의 로맨스 버전처럼 보일 정도예요.

결코 건전한 감정은 아니지요. 클레벵도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스파르의 부모를 통해 이런 사랑의 후일담까지 보여주는 거겠죠. 아마 가스파르도(그가 만약 살아남았다면) 아버지처럼 전기톱을 휘둘러대며 아내를 쫓아다니는 미치광이로 인생을 끝마칠 겁니다. 아마 [최후의 연인들]이 하려고 하는 이야기도 그런 것일지 모릅니다. 우리의 영혼을 뒤흔드는 이 폭력적인 열정은 결국 자기 파괴적인 것이라고요. 생물학적으로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사랑과 죽음이라는 두 주제가 그처럼 가까이 붙어 다니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니겠어요?

3.

[최후의 연인들]은 거칠고 빠르며 폭력적인 영화입니다. 영화는 진짜 동화들이 그런 것처럼 사도매저키즘으로 넘쳐 흐릅니다. 가끔 클레벵의 취향이 의심스러워지기까지 해요. 그는 정말로 자신의 사도매저스틱한 환상을 귀도와 줄리에트를 이용해 충족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렇게 느껴질만큼 상황이 전형적이거든요.

그러면서도 그는 '정치적 공정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 합니다. 예를 들어 줄리에트는 결코 그냥 앉아서 구조만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녀는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탈출하려고 하죠. 그러나 아무리 그런 걸 염두에 둔다고 해도 이 영화의 구조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줄리에트는 감금당한 공주처럼 보이거든요.

공정성이야 어쨌건, 클레벵은 거친 흑백화면으로 이 영화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그럴싸하게 표현해냅니다. 영화의 정신질환적인 느낌을 생각하면 흑백 화면이 창출해내는 악몽같은 분위기는 완벽합니다.

흑백 화면은 엘리나 뢰벤존이라는 아름다운 피사체를 잡아내는 데도 완벽한 역할을 합니다. [최후의 연인들]은 뢰벤존이 지금까지 출연했던 그 어떤 영어 영화보다도 뢰벤존이라는 배우를 아름답게 잡아낸 작품입니다. 뢰벤존의 비현실적인 외모와 특유의 동부 유럽 악센트로 터뜨리는 불어 대사들은 줄리에트를 정말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신비스러운 존재처럼 보이게 합니다.

파스칼 그레고리는 완벽한 미치광이입니다. 장 앙리 콩파르는 그레고리와 그럴듯한 대조를 이루면서 캐릭터의 정신 나간 변화를 잘 잡아내고 있고요. 아마 이 영화의 힘 대부분은 잘 캐스팅된 배우들한테서 오는 것일 겁니다. (00/07/20)

DJUNA

기타등등

감독과의 대화를 본 유일한 영화였습니다. 내일은 아무래도 영화제에 갈 것 같지 않으니 이 영화가 올해 부천에서 본 마지막 영화가 될 것 같군요. 올해는 영화제가 좀 맥이 빠진 듯한 느낌입니다. 다들 분발해야 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