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이성한

주연
정우....짱구
황정음....주희
양가원....허씨
손호준....영주
권재현....석찬

짱구

[바람]은 90년대에 부산에서 상고를 다닌 젊은 남자의 회상입니다. 그는 그 험악한 분위기의 학교를 다니는 동안 불법 서클에도 가입하고 사고도 조금 치고 한 번은 유치장에도 들어갔던 모양이에요. 미리 말하지만 영화의 내용은 이게 전부입니다.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당연히 이 영화가 감독의 자서전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마지막에 뜨는 가족 사진 역시 감독의 것이라 생각할 것이고요. 하지만 아닙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짱구의 진짜 모델은 주연배우 정우입니다. 짱구의 본명 김정국도 정우의 본명이고요.

갑자기 흥미가 당깁니다. 이런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아무리 배우가 내레이션을 읊는다고 해도 그 목소리가 배우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지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정말로 그 내레이션이 진짜 배우의 것이고 감독/작가인 이성한은 그런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 준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이 영화에서 최종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감독일 수밖에 없지요. 굉장히 매력적일 수도 있는 이 구조가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 슬픈 일입니다.

영화의 내용은 위에서 거의 언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우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사실 특별할 게 없어요. 3년 간 학교와 학원과 독서실을 오가는 생활을 한 모범생들이나, 불법 서클에 가입해 건들거리며 돌아다니는 애들이나, 인생은 다들 비슷합니다. 단지 그 이야기들이 끼리끼리 모이는 거죠. 모든 모범생들의 이야기가 비슷한 것처럼 모든 불량학생들의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단지 정우는 비슷비슷한 전작 불량학생 화자들과는 달리 과장이 없습니다. 그는 당시 자신이나 카리스마 넘치는 선배들이나 모두 철없는 어린아이였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그가 꿈꾸었던 멋진 조직의 삶이라는 것 역시 할 일 없는 애들의 심심한 완장놀이였다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야기의 기본 틀로 잡고 있지요. [바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용두사미의 연속입니다. 남자애들은 폼을 잡고 뭔가 엄청난 일을 벌일 것처럼 돌아다니지만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지요. 그런 짓을 저지를만큼 어리석지도 않고 부지런하지도 않으며 폭력적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삶의 묘사는 꽤 정확해요. 대부분 건달들이 다 저러고 다닙니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맨날 주먹질이나 하고 다닌다면 건달들 인생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영화의 분위기도 그런 이야기에 맞게 조율되어 있습니다. 어리버리한 허무 개그의 연속이지요. [롤러코스터]의 [남녀탐구생활] 남자편을 상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영화의 클립을 그대로 따서 서혜정 성우의 목소리를 입혀도 아무런 이질감이 없을 겁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실제로 '남자들이 이러는 거 다 구라예요'라고 냉랭하게 읊조리는 성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투박하지만 그래도 꽤 발랄한 전반부의 학교 생활 이야기가 끝나면 굉장히 노골적인 신파가 찾아옵니다. 이 부분은 주인공 짱구와 평생을 모범시민으로 살아온 아버지와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데 딱 70년대 청소년 영화에서 그릴 법한 멜로드라마를 상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 부분은 너무 신파라서 중반까지 그럭저럭 쌓아온 질과 재미를 많이 까먹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전히 자서전적인 영화입니다. 정말 정우가 학창시절 때 이런 일을 겪었다면 이 이야기를 뺄 수가 없었겠죠(유감스럽게도 정우는 기자간담회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진짜로 일어난 일인지 대답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덜 신파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법이 있었을 겁니다. 이 이중적인 서사구조를 이용해 감독이 중간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도 있었겠지요. 그랬다면 전반부 불법 서클 이야기에도 여분의 깊이가 추가되었을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저예산으로 허겁지겁 찍은 영화이고 그렇게 찍은 티가 군데군데 보이지만 연기의 질은 좋은 편입니다. 주인공을 제외한 조연배우들의 얼굴과 캐릭터들을 구별하기 조금 어렵긴 하지만 그래도 배우들은 잘 하고 주인공 정우는 은근히 재미있습니다. 단지 이들이 고등학생을 연기하기엔 너무 노숙해보이는 건 사실이에요. 거의 [그리스]에 맞먹습니다. 하지만 이 캐릭터를 꼭 사실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죠. 적어도 정우는 이 역을 일종의 회상의 제의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09/11/17)

DJUNA

기타등등

황정음이 조금 나옵니다. 정말 단역 수준인데, 그래도 이 영화 최고의 스타라서 간담회에서 질문을 가장 많이 받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