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루이 말 Louis Malle

주연
카트린느 드몽조....쟈지
Catherine Demongeot....Zazie
필립 느와레....가브리엘
Philippe Noiret....Gabriel
비토리오 카프리올리....트루스카이용
Vittorio Caprioli....Trouscaillon
이본느 클레쉬....마담 무아크
Yvonne Clech....Madame Mouaque
위베르 드샹....튀랑도
Hubert Deschamps....Turandot
자크 뒤필로....그리두
Jacques Dufilho....Gridoux
아니 프라텔리니....마도
Annie Fratellini....Mado
칼라 마를리에....알베르틴느
Carla Marlier....Albertine
앙트완 로블레....샤를르
Antoine Roblot....Charles
오데트 피케....쟈지의 엄마
Odette Piquet....Zazie's mother
니콜라 바타이유....페도르
Nicolas Bataille....Fedor

1.

도끼 살인범(믿거나 말거나 :-P)인 엄마를 따라 파리로 온 맹랑한 11살 소녀 쟈지의 유일한 소망은 파리의 지하철을 한 번 타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날 따라 지하철이 파업이네요. 지하철을 타러 혼자 몰래 가브리엘 삼촌네 집에서 빠져나온 쟈지는 파리 시내를 얼쩡거리다가 신비스러운 인물인 트루스카이용을 만나게 되는데...

2.

마치 구체적이고 의미가 있는 스토리의 도입부처럼 보이지만 레이몽 크노의 소설을 각색한 루이 말의 영화 [지하철의 소녀]는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영화는 논리나 일관성 따위는 무시하고 미친 말처럼 뛰어다닙니다.

관객들의 눈을 가장 먼저 잡아 끄는 것은 영화의 정신없는 스타일입니다. 이 영화는 대부분이 후시 녹음인데 (더빙이 건성이라 입술 움직임과 대사가 제대로 안 맞는게 태반입니다) 그건 영화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점프 컷과 고속/저속 촬영, 트릭 숏 때문입니다.

그 결과 만들어진 영화는 부조리하기 짝이 없습니다. 영화는 시간 길이를 멋대로 왜곡하고 공간을 비틀며 일관적 논리를 망가뜨립니다. 분명히 가브리엘 삼촌 왼쪽에 앉아 있던 쟈지는 순식간에 오른쪽으로 옮겨가고 분명히 도로에서 쟈지를 둘러싸고 있었던 군중들은 어느 사이엔가 가브리엘 삼촌네 복도에 와 있습니다. 쟈지가 구두를 하늘에 던지자 구두는 어느 사이엔가 쟈지의 발에 신겨져 있습니다. 정장을 하고 있던 트루스카이용은 갑자기 속옷 차림이 되고 하나씩 옷을 차려 입은 트루스카이용의 무리들이 프레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행진해갑니다. 뻔히 눈 앞에 버티고 앉아 있는 쟈지를 계속 알베르틴느 숙모로 여기면서요.

이런 장난기가 원천이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 부분은 쟈지와 트루스카이용의 추격전입니다. 이 추격 장면은 지독하게 부조리하지만 놀랄만큼 친숙합니다. 왜? 우린 이런 걸 로드러너와 코이요테 쇼에서 죽도록 보아왔습니다! 다이나마이트, 프레임 건너 뛰기, 폭파되는 전화... 모두 위대한 워너 브라더즈의 단편 만화들이 몇 십 년 전에 개발한 것들입니다. 루이 말이 한 것은 이 만화적 상상력을 실사로 옮기고 부조리를 과장한 것이죠. 심지어 그는 워너 브라더즈 유머의 선조까지 찾아갑니다. 경찰 제복을 입은 트루스카이용과 무아크 부인이 프레임만 남은 차를 타고 여자들에게 납치된 가브리엘 삼촌을 쫓아가는 장면은 분명히 맥 세네트 영화들을 표절한 것입니다.

이런 순진한 장난기는 여주인공 쟈지의 매력에 의해 강화됩니다. 아마 영화사상 가장 정신없이 못돼먹은 악동일 이 거짓말쟁이 험담꾼(카트린느 드몽조가 놀랄만큼 근사하게 연기해내고 있습니다)은 주변 어른들을 몽땅 소아음란증 환자와 치한으로 몰고가면서 용감하게 파리 시내를 행진하는데, 그 태평스러움은 정말 시원스럽습니다. 특히 저희가 좋아하는 장면은 쟈지가 트루스카이용에게, 엄마가 술주정뱅이 아빠를 도끼로 때려잡던 이야기를 하는 장면입니다. 살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게 웃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아요.

3.

유감스럽게도 이런 활달함은 영화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시들해집니다. 초반에 폭탄을 너무 많이 터뜨려서 관객들이나 영화가 모두 지쳐버렸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뒤로 갈수록 쟈지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도 큰 단점입니다(아니, 트루스카이용이 알베르틴느 숙모에 반하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한 이야기라고 그렇게 잡아 늘입니까?)

그러나 보다 심각한 이유가 숨어 있습니다. 루이 말이 유머를 다루는 방법에 결정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이지요.

이 영화의 유머가 등뼈로 삼고 있는 것은 부조리함과 비논리입니다. 그리고 부조리는 일상적으로 다루어졌을 때 가장 효과적인 법입니다. 그러나 말은 이걸 너무 심각하게 다룹니다. 이것들이 순전히 영화적 트릭의 조크로 이어졌을 때는 흥겹지만 가브리엘 삼촌의 에펠탑 연설이나 트루스카이용의 사랑 고백 따위는 지겹습니다. 영화가 그 어처구니없음을 지나치게 심각하게 여기고 또 그걸 과대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말의 잘못일까요? 아니면 원작자인 레이몽 크노의 잘못일까요? 말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확신은 못하겠습니다. 크노의 책은 고전이지만 저희는 프랑스 문학사 교과서에 실린 간단한 설명 이외엔 그 책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의 책임이건 그게 프랑스식 유머의 한계라는 점은 꽤 강하게 주장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좀더 매정하게 말하자면 프랑스식 유머는 없습니다. 유머는 프랑스 문화의 소산이 아니며 이 수입품을 제대로 활용한 프랑스 문화 상품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지하철의 소녀]가 자기 역할을 하는 부분은 영화가 영미식 유머를 차용했을 때이며 그들이 프랑스식으로 놀 때는 한없이 늘어집니다.

4.

그러나 영화는 여전히 재미있습니다. 되풀이해서 볼 때마다 질질 끄는 후반부에도 덜 비판적이 되고요. 아마 초반부의 꽝하는 효과가 처음같지 않아서 후반부의 늘어짐이 눈에 덜 뜨이기 때문일 거예요.

세상에 [지하철의 소녀]만큼 못돼먹은 방식으로 파리를 보여주는 영화도 없습니다. 지하철 파업으로 꽉꽉 미어지는 러시 아워 장면, 해골처럼 앙상한 에펠탑 장면은 그 중 압권입니다. 파리에 대한 로맨틱한 환상을 품고 있는 관객들은 중간에 울어버릴지도 모릅니다.

드몽조의 귀여운 매력이야 말로 진짜 압권이지만 아직 젊디 젊은 필립 느와레가 연기하는 능글맞은 가브리엘 삼촌도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트루스카이용 역의 비토리오 카프리올리는 너무 오버하고 있고 알베르틴느 숙모를 연기한 칼라 마를리에의 지극히 60년대 프랑스식인 이미지는 왠지 모르게 불편하군요. (99/06/08)

D&P

기타등등

1. 이 영화/책의 제목은 늘 번역자들을 불편하게 하지요. Zazie는 나름대로 귀여운 이름이겠지만 우리나라 말에 들어오면 좀 문제가 있잖아요? :->

2. 엄연한 EBS 방영작인데 필름스에는 자료가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