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루치오 풀치 Lucio Fulci

주연
티사 패로우....앤 보울즈
Tisa Farrow....Anne Bowles
이언 맥컬럭....피터 웨스트
Ian McCulloch....Peter West
리처드 존슨....데이빗 메나드 박사
Richard Johnson....Dr. David Menard
알 클라이버....브라이언 헐
Al Cliver....Brian Hull
오레타 게이....수잔 바렛
Auretta Gay....Susan Barrett
스테파니아 다마리오....미시
Stefania D'Amario....Missey
올가 칼라토스....폴라 메나드
Olga Karlatos....Paola Menard

좀비 대 죠스!

이탈리아 호러 영화들을 보다보면, "도대체 얘들 머리 속엔 뭐가 들어있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영화가 자기 논리에 맞추어 움직이긴 하는데 저로서는 도대체 따라갈 수가 없는 거예요. 세상엔 형편없는 영화들도 많으니 이들도 단순한 저질로 치부하면 되겠지만, 그것도 쉽지 않군요. 전 만든 사람의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게 더 편합니다.

모든 이탈리아 호러 영화들이 다 이런 건 아닙니다. 마리오 바바나 다리오 아르젠토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들은 불쾌하고 변태스러워도 보편적인 심미안에 호소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미켈레 소아비 정도만 되어도 이해가 되는 작품들을 만들고요. 하지만 루치오 풀치로 내려가면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외계인이나 몰래 진화한 침팬지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아요. 그 때문에 전 종종 판단을 망설이게 됩니다. 특히 조금 잘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비욘드] 같은 영화를 보면 말이에요.

처음부터 [시체들의 새벽]의 가짜 속편으로 만들어진 [좀비]는 비교적 제가 쉽게 내칠 수 있는 영화입니다. 전 피투성이 신체 손상에 그렇게 열광하는 편이 아니거든요. 물론 루치오 풀치에 대해 대단한 애정을 품고 있지도 않으니 그의 악명 높은 호러 경력이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게 그렇게까지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고요.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고... 무의미합니다. 뉴욕시에 텅빈 보트가 표류해오는데, 그 안에서 좀비 하나가 튀어나와 경찰관을 습격합니다. 보트 주인의 딸인 앤 보울즈는 신문기자 피터 웨스트와 함께 실종된 아빠를 찾으러 카리비안의 외딴 섬으로 가죠. 물론 그 섬은 좀비들이 우글거리고 있고요.

각본 자체엔 특별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시작은 [드라큘라] 이야기에서 훔쳐왔고 나머지 이야기는 '원본'인 조지 로메로 영화들이나 나머지 좀비 영화들한테서 빌려왔지요. 대사들도 엄청나게 바보스러워요. 엉터리로 더빙된 영어 대사들을 듣고 있으면 정신이 멍해질 지경이지요. 마치 싸구려 저질 소설들에서 대사들을 오려내 전후 맥락을 무시하고 이어 붙인 듯 합니다. 결정적으로 이야기가 지루해요. 가끔 좀비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습격하기는 하지만 후반 30분 전까지는 특별한 폭력적 폭발없이 밋밋하게 전개되거든요.

노골적이고 자명하며 치명적인 단점들이지만, 여러분은 이걸 가지고 풀치 팬들과 맞설 수는 없습니다. 다들 알고 있고 인정도 하고 있거든요. 하긴 누가 치밀하고 재미있는 각본을 기대하며 풀치 영화를 보겠습니까.

결국 우리는 다양한 신체 손상 장면들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풀치의 영화가 아니랄까봐 이 영화에도 기분나쁜 '눈알 조지기' 장면이 하나 나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좀비들에게 살점을 잃고, 벌레들이 부글거리는 좀비들은 목이 잘리거나 불에 타거나 쇠꼬챙이에 찔리거나... 상어에게 팔이 뜯깁니다. 네, 유명한 '좀비 대 죠스'라는 어처구니없는 설정이 바로 이 영화에 나온답니다.

이 영화의 폭력 강도는 70년대 말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온갖 스플레터 영화들에 익숙해진 현대 관객들에겐 비교적 얌전하게 느껴지지요. 영화는 무섭지도 않습니다. 이 영화엔 로메로의 작품들에서 느낄 수 있는 처절한 공포나 절망감은 없습니다. 서스펜스도 부족하고요. 영화는 느리고 지루하고 종종 징그럽기만 합니다.

남은 건 풀치 영화 고유의 질감입니다. 그 질감의 반은 풀치가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탈리아 호러 특유의 분위기에서 나오고, 나머지 반은 일종의 무데뽀 정신에서 나옵니다. 솔직히 말해 풀치는 결코 재능이 뛰어난 감독은 아니었잖아요. 편집은 엉성해서 툭하면 타이밍을 놓치고 카메라 워크는 어색하고... 그래도 그는 성공률이나 질을 떠나 꽤 재미있고 자극적인 아이디어 몇 개와 그것들을 저예산과 조잡한 특수 효과로 구체화시킬만큼 두꺼운 낯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했습니다. 하면 되니까요. 그리고 풀치가 열심히 '하는' 동안, 그의 서툰 테크닉과 어설픈 미의식은 서서히 고유의 개성으로 자리를 잡았던 거겠지요.

아까도 말했지만 전 [좀비]를 좋아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끔 상어와 이종 격투기를 벌이는 좀비 아저씨를 떠올리며 키들거리는 것으로 족해요. 풀치의 불쾌한 진가가 진짜로 발휘된 작품을 보고 싶다면 [비욘드]를 다시 틀면 되고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가 풀치 팬들의 파티 분위기까지 망칠 필요는 없겠지요. (04/03/18)

DJUNA

기타등등

국내 출시판 [좀비] DVD는 제가 본 것 중 가장 형편없는 한국어 자막을 달고 있더군요. 하긴 그게 어울리기도 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