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샤오강 감독의 2008년 작품인 [쉬즈 더 원](2008)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중국인 남성이 공개구혼을 통해 만난 대만출신여자와 데이트 중이다. 대만여자가 “할아버지 때 대륙이 ‘점령’되던 시절”이라고 하자 중국남자는 “‘점령’이 아니라 ‘해방’”이라고 정정한다. “보는 시각에 따라 달리 쓰이게 된 말” 때문에 어색해진 두 사람은 “보편적인 가치관”을 이야기 하자며 “사천대지진 때 대만에서 들어온 어마어마한 의연금”으로 화제를 전환해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흥미로운 건 바로 이 장면이 [쉬즈더원]을 중심으로 앞뒤에 붙어있는 그의 영화 [집결호](2007)와 [대지진](2009) 사이의 간극을 직접적으로 설명해준다는 점이다. [집결호]는 중국 밖에서 혹은 텍스트 밖에서 보기엔 지나치게 중국공산당과 해방군을 신화화시키는 면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영화가 만듦새에 비해 비교적 평가절하 된 중요한 이유였다면, [대지진]은 국적에 관계없이 누구나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가치에 집중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는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그런 영화다.


제목만 보고 이 영화를 재난영화로 오해했다간 낭패를 볼 수 도 있다. 사실 이 영화의 좀 더 정확한 제목은 영어 제목인 ‘After Shock'이다. 1976년 7월 28일 중국 탕산에서 23초간 대지진이 일어나 27만명이 목숨을 잃는다. 실제 사건에서 출발한 영화는 탕산 대지진 자체보다는 그 지진이 한 가족에게 남긴 여진을 끈질기게 추적한다. 


탕산 대지진의 물리적 여진은 단란한 한 가족의 가장이었던 왕더칭((천따오밍)의 목숨을 앗아간다. 남편의 죽음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리위엔니(쉬판)는 하늘에 대고 육두문자를 날리지만, 다시 한 번 기회가 찾아온다. 쌍둥이 남매 팡떵(장징추)과 팡다(리천)가 아직 살아있었던 것.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둘 중 한명밖에 살릴 수 없었고 결국 아들을 살리기로 한다. 그날의 선택 후, 기적적으로 살아난 팡떵과 한 팔을 잃은 팡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은 리위엔니는 그렇게 32년을 심리적 여진 속에서 살아간다.


우선 눈에 띄는 건 촬영과 조명, 미술, 특수효과 등 기술적인 면이 굉장히 잘 정리 되어있다는 점이다. 작품은 각 시대에 따라 화면의 질감뿐만 아니라 디테일한 소품들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변화하며, 서사에 시간감각을 느끼게 해준다. 또 주연, 조연 할 것 없이 훌륭한 액션과 리액션은 이야기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며 관객을 온전히 몰입시키고, 편집은 뒤에서 조용히 이를 돕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이 영화가 이야기 하는 방식 그 자체다. 


중국 최대 문호인 “짱링‘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대지진]은 서사의 완결성 측면에서 클래식한 수작이다. 자칫 신파로 흐르기 쉬운 소재와 이야기임에도, 감독의 정공법같은 연출 덕에 좀 더 깊은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다. 관객은 인물들과 함께 32년을 산다. 신과 신 사이에 몇 년이 훌쩍 지나가는 가하면 10년 단위로 내러티브를 쪼개면서도 대지진이 남긴 감정의 맥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팡떵이 ”난 탕산사람“이라며 낙태를 거부할 때는 그저 깊은 공감을 보낼 수 밖에 없다. 


특히 이 영화는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 맺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모범 사례로 기억될 만하다. 1976년 탕산 대지진과 함께 시작된 작품의 서사는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개혁개방을 거쳐 2008년 사천 대지진까지 이어진다. 대륙의 시대상이 변함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은 그 날의  딜레마가 남긴 고통을 계속해서 묵묵히 견뎌내야만 한다. 감독은 긴 시간에 걸쳐 충분히 괴로웠을 인물들에게, 결국 공감할 수밖에 없는 약간의 우연을 선사하며 조심스럽게 용서와 화해를 구한다. 물론 그 뒤에 따르는 건, 산자가 살아 갈 수 있게 하는 치유와 죽은 자가 편히 잠들 수 있게 하는 깊은 애도다. 


펑샤오강 감독은 2008년 사천 대지진 후 탕산 정부로부터 대재앙에 희생된 영혼들을 기리기 위한 영화를 의뢰받아 제작에 돌입했다고 한다. 탕산시에서 약 200억원을 투자해 만든 이 영화는 1130억을 벌어들이며 종전의 ‘아바타’를 제치고 중국내 흥행신기록을 갈아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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