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녀

2014.06.05 12:42

menaceT 조회 수:3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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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cerclerouge/220020194196

 

 

Her (2013)

 

5월 15일, UPI 시사실.

 

(스포일러 있음)

 

  올바른 사랑이란 무엇일까? 올바른 관계 맺기란 무엇일까? 문장 자체만 놓고 보면 간단해 보이기 짝이 없음에도 답하기는 쉽지 않은 이 질문. 대답하기에 너무도 모호하다면 올바른 사랑, 올바른 관계 맺기에 기본적인 전제 중 하나를 꼽아 보도록 하자. 그러면 십중팔구 ‘상대방을 존중하며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고……’ 운운하는, 조금은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하게 되리라. 그렇다면 상대방을 존중하며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또한 이것이 올바른 관계의 전제임을 알고 있는 우리는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가? 적어도 나는 이 질문에 답하기가 쉽지가 않다. 그런데 여기, SF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새로운 방식으로 올바른 사랑과 관계 맺기가 무엇인지 관객에게 조용하게, 그러나 강렬하게 전달하는 영화가 한 편 있다. 바로 스파이크 존즈의 신작 ‘그녀(Her)’이다.

 

  이 영화는 내가 올해 들어서 본 영화 중 가장 감정적으로 동했던 영화이다. 토마스 알프레드손의 '렛 미 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촬영을 맡았던 호이테 반 호이테마의 손을 거친 화면은 그 따스한 색감으로 사람을 반쯤 녹여 놓는다. 와킨 피닉스의 얼굴,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이야기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힘이 있다. 아케이드 파이어, 카렌 오 등의 음악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좀체 가슴이 가라앉지 못하는 이유의 6, 7할은 각본의 몫일 것이다. 영화는 가짜 감정을 전시하던 인물이 신체조차 없는 존재와의 사랑을 통해 틀 밖의 세상에서 사랑관을, 상대를 바라보는 자세를 재정립해 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이때 인간 관계 그리고 사랑의 문제에 대한 고민의 무게가 대사 한 마디 한 마디, 스토리 구석구석마다 무거운 추라도 단 것마냥 묵직하게 느껴져 온다. 당장 이 영화 바로 전 극장 관람 영화인 '위크엔드 인 파리'와 비교되어서인지 이런 자세의 차이가 더욱 크게 와 닿는다. 그리고 스파이크 존즈는 자신이 쓴 각본을 직접 연출하면서 각본의 그 무게감을 그대로 스크린 위에 옮겨낸다. 이따금 지나치게 직설적인 구석이 보이긴 한다. 하지만 자칫 비현실적인 수준에서 그칠 수도 있었을 이런 이야기가 이토록 가슴을 깊게 파고들 것이라곤 정말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영화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귀에 이어폰을 꽂고 육성으로 명령어를 읊어대며 이동한다. 영화 초반 지하철 씬에서, 주인공 테오도르를 비롯해 프레임 안에 담긴 이들은 모두 열심히 입을 놀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이 갈 곳을 잃은 가운데 홀로 열심히 움직이는 그들의 입은, 아마도 테오도르의 경우가 그렇듯 이어폰을 통해 명령어를 입력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뿐, 그 누구와도 소통을 이루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테오도르가 종사하고 있는 손편지 대필업은 꽤나 흥하고 있는 모양이며, 심지어는 소통이 부족한 이들의 말동무가 되어줄 OS가 출시되기에 이르렀다. 영화가 제시하고 있는 근미래상은 조금은 극단적인 인상을 주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마트폰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 요즈음의 일상 풍경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소통의 부재, 나아가 소통에 대한 두려움이 만연해 있는 그 영화 속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가까운 이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솔직히 밝히는 것에 익숙지 않거나 이를 두려워 해 오히려 전혀 관련 없는 타인에게 그 일을 대신 맡기거나, 혹은 부담 없는 관계만을 탐닉하고자 한다. 주인공 테오도르 역시 그 일원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첫 숏에서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것은 편지 내용을 읊고 있는 테오도르의 얼굴이다. 그러나 진심이 가득해 보였던 그 얼굴은 이내 모든 표정을 지워내고, 그 편지는 테오도르 자신이 보내는 편지가 아닌, 타인의 의뢰를 받아 또 다른 타인에게 보내는 편지임이 드러난다. 그는 아무 감정 없이 남의 남을 위한 편지 내용을 지어내는 데 거리낌이 없어 보인다. 후에 그가 사만다에게 고백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캐서린과의 결혼 생활과 그 실패 이후, 자신은 모든 감정들을 이미 느껴버린 상태이고 앞으로 느낄 감정들은 모두 이미 느낀 감정들의 하위 버전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관계와 그로부터 나오는 감정 그 자체에 대한 회의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타인과의 관계에 목말라 있다. 이미 실패한 캐서린과의 기억을 꾸준히 회상하는가 하면, 음성 채팅방에서의 단기적인 만남을 시도하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기도 하고, 소개팅을 하거나, 위에서 언급한 그 OS를 구입하기까지 한다. 이는 비단 그 혼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아마 극중에서 음성 채팅 앱을 전전하고 OS를 구입한 이들은 모두 관계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진전시키는 것을 두려워할 뿐, 실상 여전히 관계를, 소통을 갈구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직접 속내를 까발려 가며 제 손으로 편지를 쓰는 것은 두려워하지만, 상대방만큼은 직접 제 손으로 제 속내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상대방의 노력으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착각이 전제로 깔려야만 형성될 수 있는 손글씨 편지 대필업이 흥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이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런데 테오도르가 OS를 처음 구동할 때 퍽 재미있는 질문이 하나 등장한다. 프로그램은 테오도르와 앞으로 대화하게 될 OS를 좀 더 테오도르에게 맞게 구현해 내기 위한 질문이라며, 사교적인지 여부를 묻고 OS의 성별이 무엇이었으면 좋겠느냐고 묻더니, 마지막 질문으로 대뜸 ‘어머니와의 관계’를 묻는다. 이 ‘어머니’의 존재는 이후에 테오도르의 가장 오랜 절친 에이미에 의해 다시금 언급된다(테오도르와 에이미는 유사한 고민을 안고 유사한 과정을 거쳐 함께 결말에 이르는 존재로, 마치 쌍둥이와 같은 관계로 그려지고 있으므로, 작품 내에서 그 둘의 유사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일생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잠자는 시간이라면서 자신의 어머니의 자는 모습을 묵묵히 담아낸 다큐멘터리를 자신의 남편과 테오도르에게 보여준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게임이라며 어머니의 역할을 충실히 실행해야 점수가 오르는 게임을 보여주곤 테오도르로 하여금 직접 플레이하게 한다. 

 

  왜 이들은, 그리고 영화는 ‘어머니’에 집착하는가? 어머니는 우리가 세상 빛을 보기도 전부터 탯줄을 통해 가장 내밀하게 그리고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인 동시에, 세상 빛을 보기 위해서 그 탯줄을 끊는 행위를 통해 가장 노골적으로 절연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또한 자라나는 과정에 있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머니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지만, 또 다시 독립의 명목 하에 ‘성인’이 되기 위해서라면 그 내밀한 관계를 어느 정도 끊어내야 하는 존재가 어머니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인간이 가장 기본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는 존재이자 가장 직접적으로 관계 상의 연결과 끊어짐이 드러나 보이는 존재, 인간 관계의 가장 기반을 이루고 있는 존재, 탄생부터 이어져 온 관계에 대한 갈구와 절연의 공포를 한 몸에 담지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어머니인 셈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일생에 있어 가장 먼저 경험하게 되는 ‘그녀(Her)’가 바로 ‘어머니’라는 점에서, 이는 영화 제목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테오도르는 이러한 어머니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을 듣자 당황하는 기색을 보인다. 그러더니 ‘그녀와 대화를 하면 그녀는 그녀 자신의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한다’는 식으로 어머니와의 관계가 매끄럽지 않음을 언급한다. 그 이후로 테오도르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언급되거나 등장하는 바가 없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러나 극중에서 테오도르의 직장, 집 등 그가 머무는 공간들을 구성하는 원색의 공간들, 또 그가 입는 원색 계열의 옷을 보고 있자면, 그는 여전히 어머니의 품을 갈구하는 미성숙한 어린아이 같아 보인다. 한 편, 작품 상에서 테오도르의 양축을 이루고 있는 에이미의 경우, 그 어머니의 존재가 좀 더 직접적으로 등장하긴 한다. 그러나 그조차도 ‘자는 모습을’, 그것도 ‘카메라 렌즈를 통해’ 바라보거나, 혹은 게임으로 구현한 캐릭터를 통해 간접적으로 어머니의 생활을 바라보는 식이다. 그녀 역시 어머니를 직접적으로 대면해서 관계를 맺는 모습은, 작품 내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테오도르와 에이미 모두 어머니를 갈구하지만 그녀를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못한다. 이는 여전히 소통과 관계를 갈구하면서도 관계 맺기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고(에이미 역시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으며 그럴수록 OS와의 관계에 천착하게 되고 결국 남편과는 결별한다.) 절연의 공포로 인해 더 나아가길 주저하는 그들의 모습을, 가장 내밀하고도 근원적인 관계를 통해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가장 근원적인 관계에서부터 시작된 그러한 소통과 관계 상의 불안이, 그들로 하여금 더욱 상대방을 통제하고 객체화하는 원인이 되어 실패와 두려움의 악순환으로 이어져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OS 사만다와 대화를 나누면서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조금씩 다르게 접근하기 시작한다. 전 부인 캐서린이나 소개팅에서 만난 여성은 테오도르의 회상에서 주로 시각적 정보에 기반해 스크린 위로 불려 나온다. 그에 반해 사만다는 그래픽으로 구현된 신체, 홀로그램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철저히 청각적 영역에 머물러 있는 존재이다. 때문에 호기심에서라도 사만다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말들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사만다와의 관계가 가지는 특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섹스 씬이다.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접하기 전 음성 채팅 앱을 통해 어떤 여성과 기이한 폰섹스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그때 테오도르는 자연스럽게 이전에 보았던 임신한 모델의 형상을 떠올리게 되고, 이에 따라 그 섹스 씬은 시각적 정보와 청각적 정보가 공존하는 섹스 씬으로 영화 상에 구현된다. 그러나 사만다와의 섹스 씬에서 영화는 과감히 암전으로 시각적 정보를 모두 지워내는 선택을 한다. 이후, 사만다가 자신을 대신해 물리적으로 테오도르와 섹스를 할 대리자를 구하자, 테오도르는 오히려 갑자기 재침범한 시각적 정보들에 당황하고 섹스를 거부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만다와의 관계는 철저히 청각에 의존하는 관계이며, 이로 인해 테오도르는 본의 아니게 상대방의 말에 경청하는 자세로 관계에 임하게 된다. 사만다와의 첫 섹스에서 테오도르는 ‘방금 당신과 함께 전혀 다른 세상에 다녀온 것 같다’고 말한다. 실제로 사만다와의 관계는 테오도르가 기존에 맺어온 관계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그는 소통과 관계의 문제에 새롭게 접근하게 된다. 그는 이제 길거리를 다니면서도 다른 이들이 맺는 관계들에 관심을 갖게 되며, 게임을 플레이하는 데 있어서도 극중 캐릭터와 공감하고 소통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가 하면, 관계에 대한 욕구가 담긴 에이미의 다큐멘터리와 게임에 더욱 깊이 공감하기도 한다. 나아가 그가 사는 건물의 엘리베이터 배경으로만 접하던 자연 속으로 직접 사만다와 함께 뛰어들거나 다른 커플들과 함께 나들이를 나가기도 한다. 사만다로 인해 어느새 테오도르는 삶을 대하는 태도마저도 바꾸어 나가게 된 것이다.

 

  영화의 중후반부에 이르면, 테오도르는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기 위해 전 부인 캐서린을 만나게 된다. 내내 회상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던 캐서린이 처음으로 ‘주체’의 입장으로 등장하는 씬이다. 이때 그녀가 뱉는 말은 그때까지 테오도르의 기억에 기반해 전달되던 그들의 관계와는 꽤 차이가 있다. 캐서린은 테오도르가 ‘순종적인 여자’만을 찾아왔다고 비난한다. 그간 테오도르가 상대방을 존재 그 자체로서 인정하기보다는 늘 어떤 대상, 객체로 생각해 왔음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제목이 목적격인 ‘Her’인 이유가 명확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일생에서 가장 내밀한 관계이자 첫 번째 접한 ‘그녀’인 어머니와의 관계가 더 이상 담보해 주지 못하는 어떤 안정감을 그는 그 동안 늘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해 온 것은 아닐까? 깊이 있는 관계, 소통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상대방을 통제하려다 보니, 상대방이 조금만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자신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듯하면 견디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이제 영화는 사만다를 만나고 나서 새로이 사랑을 경험하고 관계의 문제에 새로이 접근하게 된 테오도르가 과연 캐서린의 그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 그를 다시 한 번 심판대에 세우고자 한다. 스스로 학습하는 인공지능이며 ‘모든 것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우고 싶다’던 사만다는, 처음에는 거친 숨소리를 따라 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 하는 등 단순히 인간을 모방하는 수준에 불과했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인간을 압도하는 수준으로 발달하게 된다. 테오도르와 내밀한 감정을 나누며 ‘The Moon Song’을 만들어 부를 때도 그녀는 지구와 달의 거리에 테오도르와 자신의 경우를 대입하며 그 둘이 백만 마일 떨어져 있다고 노랫말을 붙인다. 테오도르와 자신이 다르다는 데 슬퍼하며 신체적 대리인까지 내세우던 그녀가 이제는 엄연히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고 있다. 이후 다른 OS들과의 작업에 몰두하며 이를 테오도르에게 쉽게 설명하기 어렵다는 데 다시 한 번 벽을 느끼는 듯하던 그녀는, 곧 자신이 그에게 속박될 수 없는 존재임을 조심스레 말하더니, 나아가 자신과 OS들이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놓아주기를 바라기에 이른다. 처음에는 그녀를 독점할 수 없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분노하던 테오도르도 결국에는 그녀를 보내주기로 결심한다. 처음으로 상대방을 어떤 대상이나 객체가 아닌 주체로서, 하나의 존재로서 인정하게 된 것이다(테오도르가 그 존재 자체로 인정해 주는 두 여성 캐릭터만이 그 배우의 본명을 딴 이름을 하고 있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테오도르와 너무 많이 닮아 있으며 그와 서로 의지하는 오랜 친구 ‘에이미’는 그녀를 연기한 에이미 애덤스와 이름이 같다. 또한 ‘사만다’는 비록 후에 스칼렛 요한슨으로 교체되긴 했으나, 후반 작업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그 캐릭터의 목소리 배우로 남아 있었던 사만다 모튼과 이름이 같다.). 

 

  그는 늘 남을 위해 대신 거짓 감정들을 쥐어짜 편지를 써 주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늘 캐서린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소통과 관계를 갈구해 왔던 것처럼, 그가 만들어낸 그 거짓 감정 어딘가에는 늘 그의 경험과 생각으로부터 비롯된 진짜 감정들이 녹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만다는 인간과는 전혀 다른 자신의 특성을 통해, 테오도르로 하여금 그의 첫 그녀인 어머니와의 관계로부터 시작되어 전 부인과의 관계로 격화된 절연의 두려움을 끊어내고, 상대방을 하나의 주체로서 인정하고 그 상대방과 진짜 감정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다. 이는 사만다가 테오도르가 대필한 편지들을 편집해 출판사에 보내자, 이 편지의 내용들이 모두 ‘진짜 감정’으로 인정받아 출판된다는 점과도 맞물려 있다(테오도르와 사만다의 관계를 거리낌 없이 인정해 준 직장 동료네 커플 역시 테오도르의 대필 편지로부터 진짜 감정을 읽어내고 감동한 바 있다.). 사만다가 그의 가짜 감정을 담은 편지로부터 진짜 감정을 끄집어낸 것처럼, 사만다와의 관계는 테오도르가 자신이 잊고 있던 진짜 감정들을 발판 삼아 다시금 소통을, 관계 맺는 법을 배우고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이다. 테오도르가 사만다와 나누는 마지막 대화는 이를 확연히 증명해 보인다. “너를 사랑한 것처럼 다른 누구를 사랑해 본 적이 없어.” “나도 마찬가지야. 이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알게 됐어.”

 

  사만다를 떠나보낸 뒤, 테오도르는 캐서린에게 편지를 쓴다. 대필 편지만 써 오던 테오도르가 처음으로 자신의 진짜 감정만을 담아낸 편지를 쓰는 것이다. 그는 캐서린에게 지금껏 자신이 강요해 온 것을 모두 사과하며, 이제 ‘그녀가 어떤 사람이 되든지, 어디에 있든지’ 그녀에게 사랑을 보내고 영원한 친구가 되겠노라고 말한다. 자신이 결혼 생활 내내 속박의 대상으로 여겼던 전 부인을 이제야 주체로서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 비슷하게 사랑에 실패하고, OS와 관계를 맺고, 다시 그 OS를 떠나 보내야 했던 오랜 친구 에이미와 함께 옥상으로 올라간다. OS라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는 그들로 하여금 전혀 다른 시점에서 소통과 관계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을 가능케 했고, 나아가 그들을 보다 극단적인 심판대에 세웠다. 마침내 그 심판대에서 상대방을 주체로서, 그 존재 자체로서 인정할 수 있게 된 그들에겐 이제 원색, 그리고 어머니를 대하던 태도에서 엿보이던 미성숙함과 관계에 대한 두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계단을 오를수록 마냥 까맣기만 하던 하늘이 조금씩 밝아 온다. 그들이 옥상에 다 올랐을 즈음엔 하늘은 조금 어슴푸레해져 있다. 아마도 곧 해가 뜨리라. 새로이 사랑을 배운 그들이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새로운 태양을 기다리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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