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배우 마리아 엔더스는 얼마 전에 작고한 극작가 빌헬름 멜키오르의 연극 [말로야 스네이크]의 주연 제안을 받습니다. 마리아는 18살에 이 연극과 연극의 영화판에서 시그리드 역을 맡아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죠. 하지만 이번에 제안받은 역은 시그리드가 유혹하는 연상의 중년 여성 헬레나 역. 시그리드 역은 수퍼 히어로 영화와 스캔들로 뜨고 있는 미국인 십대 소녀 배우 조-앤 엘리스에게 넘어갑니다. 한참 주저하다가 결국 받아들인 마리아는 스위스의 외딴 집에 틀어박혀 비서 발렌틴을 상대로 연습을 시작합니다.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기성품 재료들로 이루어진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인용할 수많은 이름과 제목을 총알처럼 품고 있습니다. 마리아 엔더스의 설정은 [이브의 모든 것]의 마고 채닝을 연상시킵니다. 빌헬름 멜키오르는 아사야스 버전 잉마르 베리만일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와 발렌틴의 관계는 베리만의 [페르소나]를 연상시키며, 멜키오르의 연극은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을 닮았습니다.

여기엔 보다 개인적인 재료들도 있습니다. 풋내기 연극배우이던 시절을 회상하는 중견배우를 연기하는 쥘리엣 비노쉬의 모습에서 앙드레 테쉬네의 [랑데부]를 떠올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데, [랑데부]는 아사야스가 각본가로 참여한 첫 번째 장편영화였죠. 그리고 시치미 뚝 떼고 조-앤 엘리스의 화려한 스캔들을 언급하는 발렌틴 역의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그냥 넘길 수는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이 재료들을 복잡하게 얽어 쌓은 작은 저택입니다. 인생과 배우와 연기를 소재로 삼은 영화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거의 모두 하는 거 같아요. 연극은 삶을 모방하고 삶은 연기를 모방하고 같은 배우의 역할이 세월과 함께 정반대로 바뀌고 리허설은 현실과 충돌하고... 그러는 동안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부터 타블로이드 가십에 이르는 온갖 이슈들이 총동되어 논쟁의 대상이 됩니다. 심지어 여성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남성 감독인 아사야스 자신에 대한 비판도 미리 예측해서 먼저 자기가 알아서 후려치고 있죠.

그렇게 대단한 깊이나 의미가 있다는 영화란 생각은 안 듭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무게있는 영화를 의도한 작품도 아닌 거 같아요. 어느 장면을 보더라도 영화는 그 순간을 즐기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발렌틴의 관계를 연극 속 헬레나와 시그리드의 관계와 섞으면서 관객들을 헛갈리게 하는 동안에도, 발렌틴에게 슈퍼히어로의 존재론적 고민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게 하는 동안에도, 잠든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뒷모습을 훔쳐보며 즐기는 동안에도 영화는 그 순간의 재미에 집중합니다. 그 각각의 재미가 상당하고 그들을 엮는 흐름이 유려해서 전 큰 그림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더군요. 각각의 재미와 의미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캐스팅이 재미있는 영화죠. 쥘리엣 비노쉬, 크리스틴 스튜어트, 클로에 모레츠를 한 영화에서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이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특히 비노쉬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화학반응은 상당해요. 놀라운 건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이 안에서 비노쉬와 맞먹는, 인상적인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죠. 암만봐도 [트와일라잇]은 이 배우의 경력에 독이었습니다. 아무리 인기가 좋아도 배우가 하고 싶어하고, 잘 하는 연기를 해야죠. (14/12/18)

★★★☆

기타등등
말로야 스네이크 현상을 담은 영화 속 무성영화를 다 보고 싶으시다면 여기로 가세요.
http://youtu.be/6q7ajUD099I


감독: Olivier Assayas, 배우: Juliette Binoche, Kristen Stewart, Chloë Grace Moretz, Lars Eidinger, Johnny Flynn, Angela Winkler, Hanns Zischler

IMDb http://www.imdb.com/title/tt2452254/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9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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