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전주국제영화제 이른 후기

2015.05.03 22:56

CsOAEA 조회 수:1153

자기반성적인 글을 별로 안 좋아하시는 분들은 뒤로 가기 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올해로 네 번째 찾은 전주영화제다. 2009년에 전주에 왔을 때는 나도 드디어 영화제에 와보는구나라는 생각과, 난생 처음 와본 전주라는 도시에 대한 막연한 설렘 같은 게 있었다. 두 번째, 세 번째 방문했을 때는 지인들과 연인을 챙기기에 바빴었다. 마음을 차분히 하고 전주에 온건 이번이 처음인 셈이다. 간만에 얻은 긴 연휴에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곤 전주에 오는 것뿐이었다. 스며드는 외로움과 내 세계의 좁음을 느끼며 기찻길에 올랐다.


           전주에는 다른 도시들에서는 느끼기 힘든 따스함이 있다. 그것이 도로의 폭, 유동 인구와 차량, 적당히 조성된 녹지, 건물 높이가 주는 착시인지도 모르겠지만, 비슷한 규모의 지방 중소도시나 수도권 위성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담함과 소박함이 있다. 80~90년대에 지어졌을 법한 개성 없는 건물들, 컨셉 없는 도시구조 등 소위 말하는 영혼 없는 단조로움이 전주에도 짙게 베어 있지만, 그 위에 내려앉은 햇살과 불어오는 바람은 신기하게도 자연의 축복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나는 전주에 오면 이유 없이 편안함을 느낀다. 이는 내가 전주를 한국의 도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평온함은 밤이 되면 사라져버린다. 처음 전주의 밤거리를 거닐다 우연히 발견한 시청 뒤의 사창가는 젊은 시절의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규모는 예전에 비해 많이 작아졌지만 여전히 엄청난 규모로 운영되고 있었고, 그 앞에는 삼삼오오 모인 남성들이 후기를 공유하고 있었다. “오빠. 맛있어. 먹고가.” 비빔밥과 콩나물국밤의 도시인 전주는 밤이 되면 그 욕망의 대상이 바뀐다. 내게 작은 행복의 도시였던 전주는 밤이 되면 뒤틀린 욕망의 찌꺼기들이 침전하는 공간으로 변질된다.


사실 이와 비슷한 징후는 곳곳에 있었다. 한옥마을에 걸려 있던 전주의 변화를 위하여라는 슬로건과 그 옆에 즐비한 개량 한옥들. 기존의 곡선의 아름다움을 버리고 제조하기 쉬운 직선 디자인으로 생산해낸 기와들과 너무 선명해서 어색해 보이는 프린팅 문양들. 그리고 그 밑에 자리잡고 있는 모텔의 한옥 버전. ‘우리도 잘 살아보자라는 성급한 욕망이 만들어낸 키메라처럼 보였다. 한옥마을 근방의 자만동 벽화마을에는 판자촌 주위로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들이 가득하다. 그곳에 어렵게 살고 있는 분들을 농락하는 쓰레기 투척. 단순히 전주를 소비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여행객들이 남기고 간 욕망의 결과물들이 휴지조각처럼 널려 있었다. 내게 기쁨을 주는 동시에 슬픔을 주는 이 도시, 마치 지킬 앤 하이드처럼 모양을 바꾸는 이 도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스포일러 있음)


묘하게도 이번 영화제의 개막작 <소년, 파르티잔>이 이런 전주의 모습과 닮았다. 물론 프로그래머들이 이런 의도로 개막작을 선정했을 리는 만무하겠지만 말이다. 감독은 일반 사회와 분리되어 살아가는 한 공동체의 이야기를 통해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 공동체는 겉으로는 아무 걱정 없이 평화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경제적 기반은 소년들에 의해 수행되는 청부살인에 있다. 공동체의 지도자 그레고리(뱅상 카셀)는 믿음직한 아버지이자 정신적 지주인 동시에, 암살단을 조종하는 배후이며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는 그 어떤 짓이라도 벌일 인물이다. 감독은 색체와 빛, 음향을 이러한 주제 의식과 관련하여 굉장히 섬세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관객은 미학적 아름다움과 폭력성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영화 전반의 따뜻한 갈색톤은 어느새 음울한 분위기로 뒤바뀌며, 생고기의 붉은 색감은 폭력의 희생양을 연상시키는 듯하고, 밭을 경작하는 소리는 마치 구타의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감정적인 측면에서도 이 공동체의 가족적인 끈끈함은 범위 밖의 아웃사이더들을 배척하고 몰아내는 수단이 된다. 좀 특이한 사고방식이긴 하나 나는 <소년, 파르티잔>의 이러한 양면성이 마치 조용한 경관과 국내 최대의 집창촌을, 선량한 시민들과 욕망의 숙주가 된 사람들을 동시에 품고 있는 전주의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잠시 개막작 상연 전으로 돌아가야겠다. 고석만 전주영화제 집행위원장이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때까지과연 영화가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 무엇일까. 독특한 감수성을 가지고 영화와 도시를 유비적으로 연관 지으면서, 영화 속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전주 역시 그러면 안 된다고 주장하며 비판하는 것이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길인 것일까. 젊은 시절 사람들이 예술/독립영화를 더욱 자주 접하고, 그것을 대하는 태도처럼 세상의 소외 받는 것들을 대한다면 세상은 언젠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영화의 한 장면이라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분석, 비평, 홍보하면서 살았을 때 나는 더 비장했었고 정신적으로 고되게 살았었다. 그때의 태도도 우습지만, 지금 영화만으로는 세상을 바꾸기 힘들다고 생각하게 된 소시민적인 지금의 나도 우습다. <다이빙 벨>, <남영동>, <의뢰인>, <한공주> 같은 정치사회적인 작품들이 영화관에서 상영되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스토리가 공중파 뉴스에서 연일 보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한다. 어떻게 뭘 더 해볼 수 있을까.


           나는 이번 영화제에서 <소년, 파르티잔> 외에 두 편의 영화를 더 봤다. 야쿠자 출신의 남성과 밴드를 운영하는 한 소녀가 서로의 빈 곳을 채워주는 <미소노 유니버스>와 증오와 폭력의 시선 뒤에는 사랑이 올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은 <자상>이라는 영화다. 이런 영화들은 직접적으론 정치사회적인 이슈들과는 관련이 없을 것이다. 그 외에도 기존에 내가 봐왔던 수많은 상업영화들과 심심풀이용 영화들을 회상하면서, 내가 변화시켜야 하는 세상은 일차적으로는 밖에 있는 세상이 아닌 내 안에 있는 세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영화라는 매체에 담긴 근본적인 미학적 태도, 즉 상영되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과, 그렇게 찍힌 장면들과 비슷한 모습이 나와 타인의 삶에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비판자적 시선에서 벗어나서 즐거운 것을 보고 즐거워할 줄 알고 분노해야 하는 것에 분노할 줄 알고 행복해야 할 때 행복할 줄 알아야 건강한 인간이다. 이러한 태도가 부끄럽게도 내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한 증오심을 떨쳐내고, 인성의 변화와 올바른 사회적 실천을 병행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주위 사람들도 이러한 가치를 받아들인다면 세상은 좀 더 살만해지지 않을까.


           세상을 바꾼다는 건 결국 사람을 바꾼다는 것 같다. 이번에 전주에서 만났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먼 곳까지 조그마한 도움을 드렸던 아주머니와 나를 편하게 대해주셨던 한옥집 주인님, 말 한 번 잘못 걸었다가 경멸 어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지나간 아저씨, 앞서서 자리잡는 사람들 때문에 계속 택시를 못 잡아서 도움을 드리고자 했지만 거절했던 아주머니, 뭐라도 물어보면 일본/대만인들처럼 정말 열심히 알려주었던 영화제 스탭들, 그런 호의를 받고서도 정작 내게 길을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친절하게 알려주지 못했던 나의 불찰, 영화제의 발전을 위해 고심하던 그리고 왠지 모르게 외로워 보였던 임권택 감독님과 광주에 머물던 시절 나를 이끌어 주셨던 독립영화협회 조대영 선생님. 이들이 나에게 보여주었던 호의를 나도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싶고, 실수와 마찰 때문에 마음에 거슬렸던 경험들은 빨리 잊고 다음엔 안 그러고 싶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제대로 대우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도 배울 게 많다.


           이런 맥락에서 왕빙의 작품들은 내겐 뜻 깊은 발견이었다. 영화 매체에서 거의 사장되어버린 극사실주의 양식을 다시 끄집어내어 중국 현실에 적용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중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밀려나고 희생된 사람들을 소재로 한다. 그들을 어줍잖은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영웅화하는 것도 아닌, 있는 그대로 카메라에 담아낸다. 과연 진실이 가진 힘은 예술적 주관보다 강하다. 그의 작품 속에서 나는 존재의 현실감뿐만 아니라 극적인 감동 또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소재를 바라보는 방식,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바라봐주었을 때 나 역시 큰 위안을 느꼈음을 상기하며, 언젠간 나도 그렇게 사람과 세상을 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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