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아름다운 청년이여

아이처럼 웅크린 채로 암 두 덩이를 가르키는 순수한 청년이라니. 저라도 구원해주고 싶을 것 같네요. 설사 환상일지라도. 어차피 절망이 지배하는 세계잖아요.

크기로 보아 이미 온 몸에 전이된 상태였을 것 같은데,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생존 전쟁의 상황에서 병든 개체는 바로 도태되겠죠. 유일한 예외가 있다면 임모탄 본인과 그 직계 혈족 정도? 퓨리오사의 탈주 직후에 눅스를 말리는 워보이의 행동도 사실 걱정하는 마음이라기보다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개체의 자리를 대체하려는 것 뿐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같은 편과 충돌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자신이 좀 더 위험해지더라도 핸들을 꺾어 상대를 보호하려는 행동으로 보아 워보이들이 서로를 동료로 여긴다는 건 분명해요. (상대에 따라 정도의 차이도 있겠지요. 통상의 인간관계가 그렇듯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 경쟁이 무한정 전개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는 동료 의식이고 뭐고 자신의 목숨을 위해 남의 생명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행동하기 마련인데, 이들의 행동은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이들을 보고 있으면 더 큰 가치를 위해 개개인의 자유를 일정한 수준까지 포기하도록 인내하는 훈련을 받은 병사들 같아요. 심지어 일방적으로 명령을 받아 수행하는 일반 병사와 달리 자신의 신념에 따라 목숨을 기쁘게 내던지는 모습을 보면 종교적이기까지 해요.

눅스가 차에 피주머니를 달면서까지 나가고 싶어했던 것도 이대로라면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현실에서 구원받기 위함이죠. 그리고 그 구원자는 임모탄이에요. 


눅스가 임모탄의 눈길 한 번에 사지를 내달리는 모습이나 다른 워보이들이 체제를 전복하는 대신 자신들의 살고 싶다는 욕망을 억누르며 철저하게 복종하는 모습을 볼 때, 이건 단순히 임모탄이 물과 기름이라는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들에게 있어서 임모탄의 존재 자체가 그들 자신보다 상위의 가치라는 얘기예요. 다시 얘기해서 임모탄은 절망 뿐인 세상에서 그들을 구원해 줄 신이나 다름 없다는 소리죠.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세뇌되었을 거예요.

어쨌든 바로 이 점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눅스를 말리던 동료가 관둔 거예요. 눅스가 구원을 얘기하는 시점에서 그가 원하는 것이 뭔지, 또 그의 열망이 얼마나 큰지 이해하고 인정한 것이죠. 눅스가 단순히 자신의 운전 실력이 건재하다고 주장했더라면 인정받지 못 했을 거예요. 워보이들의 세계에서, 임모탄에게 있어 그는 곧 죽음을 앞둔 쓸모없는 개체일 뿐이니까요. 그야말로 절망 뿐인 세계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기 피주머니가 임모탄의 여자를 죽이면서 모든 가능성이 닫히게 되는 순간 눅스는 그 절망 속에 영원히 갇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좌절하죠. 이 와중에 눈길이 가는 건 그의 순수함이에요. 어떻게든 임모탄의 눈에 들기 위해서 머리를 써보는 대신 그는 그대로 인정해버리는 거예요. 나의 구원에 이르는 길은 모두 닫혔다, 하고. 맹목적이지만 순수한, 일종의 신앙인 거죠.

그가 그 절망 속에 웅크려 있을 때 우연히 만난 건 분명 그에게 어떤 의미에서 구원이었을 거예요. 희망이라는 이름의 구원. 뒤에 대규모의 인원이 쫓고 있고 차 바퀴를 한시라도 빨리 빼야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을 보세요. 엔진을 수리하는 것마저 행복해 보여요.


그 희망이 어디를 향하는가는 이미 중요치 않은 거예요. 중요한 건 희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죠.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작은 씨앗. 퓨리오사가 녹색의 땅에 이십 년만에 다시 돌아왔을 때 남아 있는 게 무엇이었나요. 아무 것도 없었죠. 그러나 결과적으로 녹색의 땅을 향한 희망의 씨앗이 임모탄이 없는 세상이라는 새로운 싹을 틔웠어요. 


눅스는 결국 죽었죠. 하지만 절망 속에 질식하는 것과 희망을 품고 죽는 것, 다르다고 생각해요. 짧았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 진정 행복하지 않았을까요? 임모탄 대신 자신을 기억해 줄 사람을 만났잖아요. 그가 구원받았다고 믿고 싶어요. 안 그래도 충분히 절망적인 세상이니까요.




덧)
아무리 생각해도 그 소금 사막은 바다예요. 핵인지 뭔지는 몰라도 전지구적 폭발로 인해 수분이 다 증발해버려서 소금만 남았겠죠 뭐.

덧2)
돌아오는 길에 임모탄이 괜히 나서서 죽지만 않았어도 퓨리오사 일행은 독 안에 든 쥐예요. 설사 임모탄을 따돌리고 먼저 시타델을 점령했더라도 임모탄이 돌멩이들을 다 치우고 뒤따라 오는 순간 시타델 안에 있는 모든 워보이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었을 거예요. 그들은 임모탄을 절대 배신할 수 없었을 테죠. 그래서 세뇌가 무서운 거예요.

덧3)
임모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씨가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게 이어지는 거예요. 여자는 부족해요. 특히나 건강한 젊은 여자는 더더욱 그렇죠. 하지만 아이를 낳아주는 도구로서만 가치를 가질 뿐이예요. 여자가 살아있을 때는 털끝조차 손 대지 못하다가 나중에 죽게 되니까 뱃속의 아이 말고는 생사가 어떻게 되든 아무 신경도 쓰지 않잖아요. 


그에겐 워보이들도 충실한 도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죠. 눅스가 참 잘 선택한 거예요. 하지만 스스로는 절대 그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테죠. 자신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어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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