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파즈 Topaz (1969)

2015.08.14 18:24

DJUNA 조회 수:3302


[새]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마지막 걸작이었습니다. 그 뒤로 그는 조금씩 내리막을 걸었어요. 그렇다고 그가 그 뒤로 재미없고 의미없는 작품들을 만들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니], [프렌지], [패밀리 플롯]은 모두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재미있는 작품들이었죠.

[토파즈]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그의 전성기 이후 작품들 중 가장 인기 없는 영화이고 아마 가장 인기 없는 그의 미국영화일 거예요. 이해가 되는 것이, 영화가 별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혹하게 들릴지 몰라도 정말 그래요. 시사회 때 관객 반응이 정말로 나빠서 개봉 당시 몇십 분을 잘라내야 했고 결말도 바꾸어야 했지요. 그가 미국에 와서 이처럼 관객과 소통에 실패한 적은 없었습니다.

원작부터 그렇게 그와 잘 맞았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레온 유리스라는 작가가 쓴 스파이 소설이 원작인데요, 이 양반은 [엑소더스]처럼 현대사와 관련된 두꺼운 대중소설, 그러니까 보통 공항소설로 분류되는 장르의 전문가죠. 아마 히치콕이 원작으로 삼은 소설 중 가장 두꺼운 책일 겁니다. 다시 말해 그가 지금까지 만들었던 영화와는 이야기 성격이 다르단 말이죠. 구체적인 정치적 사건을 배경으로 (이 영화에는 쿠바 미사일 위기입니다)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영화를 지배할만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이야기는 툭툭 떨어지고 서스펜스는 약하죠. 히치콕은 이 영화를 그렇게 하고 싶어했던 것 같지 않습니다. 그냥 안 하는 것보다 나아서 했다는 소문이 있어요.

영화는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부에서는 코펜하겐에서 러시아 KGB 요원 한 명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합니다. 그는 쿠바와 관련된 기밀정보를 미국에 넘기는데 마침 미국에 있는 쿠바의 고위층이 갖고 있는 가방에서 기밀 서류를 꺼내려면 역시 미국에 머물고 있는 프랑스 스파이 앙드레 데브루의 도움을 빌려야 합니다. 2부에서 데브루는 쿠바로 내려가 미사일 기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는데 알고 봤더니 그는 쿠바의 고위층 중 한 명인 후아니타 데 코르도바와 연애 중입니다. 3부에서 데브루는 파리로 가는데, 거기선 KGB가 토파즈라고 부르는 소련 스파이 조직이 암약하고 있죠.

보이시죠? 이야기의 연결이 굉장히 느슨합니다. 앙드레 데브루가 주인공에 가깝지만 그는 매력도 없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고 (바람둥이 남편!) 무엇보다 그가 속해있는 거대한 드라마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호흡이 긴 소설 안에서는 이들이 자리를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극장용 영화에서는 그게 힘들죠. 히치콕처럼 서스펜스로 관객들을 통제하는 것이 익숙한 감독에겐 더 어렵고요.

더 큰 문제점은 이 영화가 그가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첩보물과 전혀 종류가 다르다는 것이었죠. [찢어진 커튼] 이전에 그가 만든 첩보물은 모두 백일몽이며 판타지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종종 적성국을 밝히는 것까지도 거부했죠. 하지만 유리스의 소설은 리얼리즘을 요구했습니다. 당연히 60년대 국제정세에 대한 상세한 지식과 관심이 필요했어요. 하지만 히치콕은 막연히 사실적인 스파이물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만 있었을 뿐, 둘 중 어느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새로운 종류의 영화에 맞출 수 있는 에너지나 의욕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영화는 그 간격을 충분히 채워주지 못합니다.

그는 캐스팅에도 실패했습니다. 이 영화에는 관객들이 마음을 줄 대형스타가 없죠. 그것까지는 문제가 안 됩니다. [프렌지]나 [패밀리 플롯]에도 스타는 안 나오지만 [토파즈]보다는 재미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이야기에서 관객들의 관심을 유지하려면 역시 스타가 필요했어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쓰는 스타가 미셀 피콜리와 필립 느와레라면 문제가 되는 거죠. 그리고 그들은 3부에서나 겨우 등장하는 걸요. 역시 소문을 들어보면 그는 배우들과의 소통도 그렇게 좋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나마 배우가 빛났던 장면이라면... 별로 없는 거 같은데요. 자신이 폭로될 수 있는 자리에서 꾸역꾸역 먹어대던 필립 느와레의 모습이 가장 기억에 남긴 합니다만.

영화가 재미없기만 한 건 아닙니다. [토파즈]에도 히치콕의 흔적은 여기저기에 남아있고 그 중 일부는 (꽃처럼 활짝 펼쳐지는 후아니타의 보라색 드레스!) 일급 히치콕입니다. 쿠바 장면에서 존 버논이 연기한 쿠바 고위 간부는 악역이지만 흥미로운 인물입니다. 아, 그리고 이 영화는 간접적으로나마 인종문제가 언급된 유일한 히치콕 영화죠. 흑인 캐릭터가 비중있는 역할로 나오는 두 번째 영화이기도 하고요. 전체적으로 지루하지만 늙은 거장이 왕년이 솜씨를 보여주면서 변해가는 세계와 접속하려고 노력하는 게 보이는 영화입니다. 부분부분을 연구하는 것이 전체를 감상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죠. 이 영화를 재평가하려는 시도도 거기에 머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15/08/14)

★★☆

기타등등
히치콕은 30분 조금 넘어 나옵니다. 휠체어를 타고 있어요.


감독: Alfred Hitchcock, 배우: Frederick Stafford, Dany Robin, John Vernon, Karin Dor, Michel Piccoli, Philippe Noiret, Claude Jade, Michel Subor, Per-Axel Arosenius

IMDb http://www.imdb.com/title/tt0065112/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4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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