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 릴리 Ci qing (2007)

2010.02.06 19:13

DJUNA 조회 수:5517

감독: Zero Chou 출연: Rainie Yang, Isabella Leong, John Shen, Jay Shih 다른 제목: Spider Lilies

[스파이더 릴리]는 [드랙퀸 가무단]의 제로 추가 만든 두 번째 극영화이고 이 두 영화는 모두 감독이 추진 중인 레인보우 시리즈에 통합된다고 합니다. 이들이 각각 어떤 색깔을 대표하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하여간 제목의 스파이더 릴리는 꽃 이름입니다. 주로 아열대 지방에서 자라는 독성있는 꽃이에요. 영화 대사를 들어보니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한다는 전설도 있는 모양이더군요. 영화 속에서는 주인공들 중 한 명인 문신예술가 타케코가 왼팔에 스파이더 릴리 문신을 하고 있지요.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웹캠걸인 샤오뤼입니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이 18살 소녀는 밤마다 야한 옷을 입고 컴퓨터 앞에서 핍쇼를 하죠. 온라인 저편에서는 인터넷 방송을 보다가 어린애가 옷 벗는 걸 혼자 독점해서 보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이 있고요.

이 두 사람이 어떻게 연결되느냐... 타케코는 샤오뤼의 첫사랑이었답니다. 샤오뤼가 9살 때 더벅머리를 휘날리며 자전거를 몰고 다니는 동네 이웃인 고등학생 타케코를 짝사랑했던 거래요. 오래간만에 타케코를 다시 만난 샤오뤼는 타케코의 문신가게를 찾아와 자기 블로그와 웹사이트의 주소를 알려주고 문신을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서부터 둘이 그냥 사귀면 될 텐데, 그렇게 쉽게 일이 풀릴 리가 없겠죠. 샤오뤼와 타케코에게는 보다 풀기 어려운 컴컴한 과거가 있습니다. 둘 다 9년 전에 일어났던 지진의 희생자들이에요. 샤오뤼의 엄마는 지진이 일어나자 자기가 죽었다고 딸을 속이고 아들과 함께 달아났어요. 타케코는 그 지진으로 아버지를 잃었고 하나뿐인 남동생은 그 때문에 충격을 받아 기억장애를 일으켰지요. 타케코는 이 사건 이후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꼭꼭 억누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영화를 보면 밝혀집니다.

가끔 캐릭터들을 모아놓고 "너네들 왜 그렇게 사니?"라고 외치고 싶은 영화들이 있는데, [스파이더 릴리]도 그 중 하나입니다. 한 마디로 주인공들의 생각이 너무 복잡하고 영화 역시 단순하게 이야기를 풀지 않아요. 심지어 단순한 성격인 샤오뤼도 똑바른 길은 절대로 가지 않는군요. 그냥 "나 9살 때 언니 좋아했거든? 지금 나도 다 컸고 언니도 사귀는 사람 없으니 우리 사귀자!"라고 충분히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얘는 직설법을 피해요. 대신 타케코에게 자기 명함을 넘겨주고 밤마다 인터넷 방송을 하면서 과연 언니가 채팅룸에 들어오나, 들어오면 아이디가 뭘까 궁금해하고만 있지요. 그래놨으니 머리가 조금 더 굵고 죄의식이 더 깊은 타케코의 행동이 어떤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죠.

그 결과 영화는 중국어권 아트 하우스 영화 특유의 우울하고 느릿느릿하고 상징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침묵 속으로 빠져듭니다. 사람들을 연결시켜주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오히려 그들을 격리시키는 인터넷이라는 테크놀로지의 묘사도 빠지면 섭하죠.

다행히도 이 모든 것들은 느긋하게 앉아 즐길만 합니다. 일단 관객들에게 그럴 여유가 있고 배우들은 호감이 가고 영화의 소재인 문신이 거의 공감각적인 비주얼을 만들어주거든요. [스파이더 릴리]는 나른하고 예쁘고 적절하게 섹시한 백일몽과 같습니다. 주인공들을 얽매고 있는 상실과 단절의 어두운 그림자도 커피의 쓴 맛처럼 영화에 멋스러운 향취를 더해주는군요. 아마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우리 사귀자!"의 직설법을 계속 유보했던 거겠지만요. (07/04/09)

★★★

기타등등

영화가 다루는 지진은 1999년 9월에 일어났던 대지진인 것 같더군요. 영화의 시대배경이 약간 미래인 2007년이니까 대충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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