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9 13:34
가을이 깊어가네요. 좋아하는 시 올려볼께요. 한번 읽어보세요.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 최금진
차는 계곡에서 한달 뒤에 발견되었다
꽁무니에 썩은 알을 잔뜩 매달고 다니는
가재들이 타이어에 달라붙어 있었다
너무도 완벽했으므로 턱뼈가 으스러진 해골은
반쯤 웃고만 있었다
접근할 수 없는 내막으로 닫혀진 트렁크의
수상한 냄새 속으로 파리들이 날아다녔다
움푹 꺼진 여자의 눈알 속에 떨어진 담뱃재는
너무도 흔해빠진 국산이었다
함몰된 이마에서 붉게 솟구치다가 말라갔을
여자의 기억들은 망치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흐물거리는 지갑 안에 접혀진 메모 한장
'나는 당신의 무엇이었을까'
헤벌어진 해골의 웃음이
둘러싼 사람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 무엇이었을까......메아리가
축문처럼 주검 위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갔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박형준
그 젊은이는 맨 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았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잤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 때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 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2015.10.29 14:32
2015.10.30 13:13
이 시 좋아요.
2015.10.29 15:58
음... 여자가 그 남자를 정말 사랑했을까.. 궁금하네요.
허리아프다 그 말 할때는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요를 편 것을 보고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같아요.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시입니다.
2015.10.29 17:20
왠지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시입니다.2222
제가 시를 다 읽을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새삼 시가 좋은 요즘입니다.
회귀
김경미
누가 또 어디쯤서 나를 저버리나 보다
마음 속 햇빛 많은 나뭇잎들 폭설처럼
떨어져 내리더니
수박향내 애틋하던 저녁 산책길이 돌변했다
이번엔 남의 집 대문앞이 아니다
누드화 같은 이 바다로 바다로 누가 날 버리나 보다
잡을 것 오직 은박지 같은 물뿐이다
소리치는 것도 부끄럽다 망망대해 혼자뿐인데
누군가 나타나도 원수가 될 것이다 기다림 간절했으므로
언제나 이런 식이다
이렇게는 아니었다 이렇게는 아니었다고 미안하다고
용서하라고
현생의 나를 만난 내 생에 사과라도 남기고 싶었으나
물천장 위 비바람에 섞여 내리는 주황빛 저녁이
성당의 색유리 가득한 성가 같아
붉은 점박이 나리꽃처럼 걸핏하면 끼얹어지는 이 침수
이 상실감을,
하긴 나는 사랑하던가 떠나고 없는 고요할 물 속
묵묵함을 내심 더 바랬던가 늘 그런 식이었던가
2015.10.29 17:45
시인들이 내심 잃지 않으려했을 상심의 시간들을 생각합니다.
2015.10.30 01:51
두번째 시가 전 왜 아무 느낌이 없죠.....ㅡㅡ;;이래서 가끔 시 읽는데 절망합니다.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좋아해요. ㅠㅠ
이 시를 읽으니 어쩐지 다정한 시를 읽고 싶어서 한 편 베껴왔어요.
다정함의 세계
김행숙
이곳에서 발이 녹는다
무릎이 없어지고, 나는 이곳에서 영원히 일어나고 싶지 않다
괜찮아요, 작은 목소리는 더 작은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함께 희미해진다
고마워요, 그 둥근 입술과 함께
작별인사를 위해 무늬를 만들었던 몇 가지의 손짓과
안녕, 하고 말하는 순간부터 투명해지는 한쪽 귀와
수평선처럼 누워 있는 세계에서
검은 돌고래가 솟구쳐오를 때
무릎이 반짝일 때
우리는 양팔을 벌리고 한없이 다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