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4 00:12
1.
기억하고 계신 분이 있을까 모르겠어요. 며칠 전에 단골 카페를 찬양하는 글을 끄적였는데
그 곳의 무엇보다도 좋은 점은 예쁜 알바생이 있다. 웃는 모습이 궁금해서 연락처를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울컥울컥 샘솟는다...라고 썼었지요.
자세한 내용은 뒤에 구구절절 이어지겠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연락처를 받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모든 게 일기예보 덕분이지요. :)
2.
저는 본질적으로 '유희적 인간'이라고 자평합니다. ...는 뻥이에요. 사실은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자신을 그럴싸하게 포장할 만한 단어를 찾은 것 뿐이지만.
아무리 더럽고 치졸하고 불합리하고 따분한 상황일지라도 그 속에서 나름대로 재미있는 포인트를 찾아내어 몰입하는 능력 비슷한 게 있거든요.
카페인과 타우린, 니코틴으로 움직이는 1염통 엔진은 흥미 본위로 쉼없이 굴러갔지요.
그런데 요 며칠동안은 무기력감 때문에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뭘 해도 즐겁지 않더라고요.
문제가 뭘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드디어 과부하가 걸린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논문을 쓰고, 졸업을 하고, 스펙을 맞추고, 취업준비를 하고... 1년 동안 말도 안되는 하이 텐션으로 살았는데, 그것 자체는 나름 재미있고 나쁘지 않았어요. 누구나 다 하는 일이기도 하고요...
다만 당면한 상황에 오롯이 몰입할 수 없게 만드는,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너무 많다보니 하루하루가 급정거-급가속의 나날이라 맛이 가버린 거죠.
3.
그래서 2~3일 정도 짧게 여행을 다녀오기로 결심했어요. 룰루랄라 신이 나서 행선지를 정하고, 이런저런 제반 사항들을 조사하는데 하필 목요일까지 비가 온다더라고요.
어디로든 여행을 떠나면 하루에 15km 이상은 걷는 타입이라 그정도의 날씨면 여행 자체를 미루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거든요. 하... 잠깐 상승세였던 기분이 다시 바닥을 치니까 처음 상태보다 더 우울해졌어요.
그 왜, 배가 너무 아파서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다가 화장실을 발견했을 때의 그 기쁨과, 도착하고 나서야 화장실 문이 잠겼다는 걸 깨달았을 때 느끼는 좌절감과 비애감 같은 거요...
이것이 어제의 이야기입니다.
4.
결국 깔끔하게 GG치고, 아름다운 알바생 양을 보며 소소한 위안이라도 얻을까해서 평소처럼 아침 일찍 카페에 갔어요.
귀에 이어폰을 꽂고서, 이 나라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인 음악에 몸을 맡긴 채 한껏 멍때리면서 커피를 마시는데 때마침 흐르는 노래 가사의 한 구절이 귀에 딱 귀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대와 함께라면 어디든 천국, 그대와 함께라면 세상도 천국.'
처음 듣는 노래라서 제목은 모르겠지만, 가사가 대충 그랬어요. 듣고 나서 아, 저 사람이 나한테 웃어주면 혼자 여행같은 거 안 가도 될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너덜너덜해진 멘탈도 한 몫 거들었지요.
면전에서 퇴짜를 맞더라도, 그래서 뻘쭘해서 이 카페에 더는 못 오게 되더라도 지금의 상태보다 더 나빠질 것 같지가 않았어요. 이미 최악이었으니까요.
당장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머그잔을 들고 카운터에 가서 호기롭게 저질러버렸습니다.
"저기요. 여기 커피 좀 리필해주시고, 혹시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2015.11.24 02:11
2015.11.24 14:28
결론을 맨 앞줄에 배치했더니 마지막 부분이 카페베네 로고가 들어가야 될 것처럼 끝났네요 :(
뭔가 또 재밌는 일이 생기면 더 끄적여 볼게요 !
2015.11.24 14:42
여담이지만 커피 리필을 신청하고 번호를 받고 자리에 돌아왔는데,
머리가 식으니까 굉장히 쑥쓰러웠어요. 근데 커피를 막 새로 주문한 참이라 자리를 뜰 수도 없고 (...)
그래서 몇 시간은 쓸데없이 노트북을 보며 바쁜 척을 했답니다.
2015.11.24 16:52
2015.11.24 19:15
사실 번호를 받은 것 자체는 그렇게 흥미진진한 전개는 아니었어요.
패기넘치게 멘트를 던지고 나니 '네?' 라며 놀라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싫어요?' 라고 되물었죠. 그랬더니 배시시 웃길래 이 때다 싶어서 핸드폰을 슥 내밀었더니 (사실 웃는 모습을 봤다는 점에서 소기의 목표는 이 시점에 이미 달성했죠 ㅎㅎ;) 선뜻 번호를 찍어주더라고요.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러 없는 번호인지 확인한 후(...) '퇴근 후에 연락 드릴게요.' 한 마디 건넨 후에 자리로 돌아왔죠.
그 후에는 음...보통 리필된 커피는 알바생이 갖다 주는데 사장님이 직접 오셨어요.
전후사정을 다 들으셨는지 웃으면서 '어쩐지 매일 오는 이유가 있었네?' 하면서 농을 던지시길래 멋쩍어서 하하하 웃었죠.
사실 알바생이랑 사이 좋아 보이길래 처음엔 커플이 아닐까 의심(!)했었는데 알고보니 사장님의 조카더라고요...
그리고는 '딴 사람이면 모르겠는데 학생이 착하게 생겨서 봐주는 거야.' 라고 말씀하시면서, 괜히 엄한 데 가서 돈 쓰면서 커피 마시지 말고 손님 없을 때 둘이 차나 한 잔 하라고 허락해주셨어요. :)
...막상 그 때는 별 생각 없었는데 기억을 되짚어보니 뻔뻔스럽게 저런 말을 잘도 했구나...싶어요.
2015.11.25 00:39
2015.11.24 03:20
2015.11.24 14:31
위로와 축하 정말 감사합니다 !
사실 그렇게 로맨틱한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심경의 변화까지 쭉 적다보니까 그렇게 보이기도 하네요... 가장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서는
'단골 손님 유치를 위한 알바생의 계략'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어요... :)
2015.11.24 08:18
2015.11.24 14:35
당초의 행선지였던 강릉은 아직도 비가 오네요. 사막 한 가운데에서 마시는 비타500 한 모금 같은 촉촉함입니다.
대나무숲 님도 좋은 일만 가득 하세요. 감사합니다 :)
2015.11.24 08:49
그 카페에 계속 가실 수 있겠네요 ㅎ
Good Luck!
2015.11.24 14:36
동네에 드립커피를 취급하는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 생각해보면 아찔해요. 앞으로 또 뭔가 좋은 일이 생기면 듀게에 적어보도록 할게요 !
2015.11.24 09:11
연재 기대해 봅니다.
부럽네요.
2015.11.24 14:39
일단 계속 연락은 주고받고 있고, 사장님의 동의를 얻어서 한가한 시간대에 내일 그 카페에서 차 한 잔 하기로 했어요.
감사합니다. :)
2015.11.24 16:57
부모님 허락하에 데이트하는 고딩 같은 기분이겠습니다. 후기 연재해 주시길. ^^
2015.11.24 17:02
2015.11.24 11:47
막장 미니시리즈는 아니겠죠? 고퀄리티 단막극으로 기대해봅니다^^
2015.11.24 14:40
간단한 호구조사 결과 저보다 여섯 살이나 어리지만 숨겨진 혈연관계로 얽혀 있거나 하진 않은 것 같아요. :)
즐겁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2015.11.24 17:00
언젠가.. 저하고 같이 일하던 여직원 중에 EXID의 하니를 쏙 빼닮은 친구가 있었는데 꽤 오래 사귄 남친이 있었어요. 그래서 언젠가 남친은 어떻게 만났냐고 했더니 카페에서 알바할때 손님으로 온 남친이 강력하게 대쉬해서 지금까지 만나고 있다..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용기있는 자가 미인을 얻는다"라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아.. 물론 백퍼센트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이상형이다 싶으면 우물쭈물하지 말고 대쉬는 해보라는 정도로 이해해 주시길.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도 나오는 명언이지만 "여자는 짐작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고들 하지요.
2015.11.24 19:17
하하하 맞아요. 용기 있는 자가 모두 미인을 얻는 건 아니지만, 미인을 얻은 사람은 모두 용기 있는 사람이겠지요. 아니면 엄청 잘생겨서 숨만 쉬어도 여자들이 반하거나요... :(
격려와 축하 감사합니다 칼님 :)
2015.11.24 17:00
용기있는 쏘딩님께 축하와.. 박수를 보냅니다. ^^
2015.11.24 18:20
쏘딩님, "정말 낭만적"이십니다 2222 행운을 빌어요^^
2015.11.24 19:21
저는 제가 로맨티시스트라기보다는 '오다 주웠다.' 타입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니었나봐요... 좋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5.11.25 22:59
화이링!
2015.11.25 23:03
오늘 짧게 데이트하고 왔어요 :)
뒷이야기 애타게 기다립니다.
초단위로 기재해주세요. 므흣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