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시험기간에는 자습서를 제외한 모든 텍스트가 박진감이 넘쳤지요. 생물시험에 대비한다며 파브르 곤충기를 탐독하던 제 짝궁 생각도 나고. 오목이나 두던 놈이 바둑기보를 가져다가 모눈종이 앞에 무한한 탐구정신을 발휘하던 뒷자리 놈도 생각이 나고. 이런 잡다한 놈들과는 별개로 대부분의 평범한 학생들은 감독 선생님의 지도 편달 하에 무협지를 읽었지요. 그때만은 우리 모두 화산과 무당의 제자였습니다.

무협지는 제목과 작가는 달라도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정의로운 문파에 뭇 수련생들로부터 사형이라 불리는 쾌남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절세미녀인 아내와, 왠지 병약한 아들이 있지요. 어느 날, 가렴주구를 생활하하는 사파가 부패하고 악랄한 조정과 결탁. 풀뿌리 민주주의를 실천 중인 문파를 습격합니다. 민중의 삶은 도탄에 빠진지 오래고, 강호의 도는 땅에 떨어졌기에 대게 시대적 배경은 원명 교체기, 혹은 명청 교체기지요.

쾌남 사형은 정통의 무공으로 항거하지만 조정이 고용한 서역의 용병들에 의해 목숨을 다 합니다. 병약한 소년은 항아리 속에 숨겨진 채 부모와 문파 식구들의 죽음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돼지요. 병약하지만 복수를 다짐하는 소년. 마사다를 잊지 말자는 심정으로 칡뿌리를 씹으며 홀로 수련에 정진하는데... 아뿔사, 그만 근본없는 수련으로 기혈이 뒤틀려 정신을 잃고 맙니다. 하지만 주인공이라 죽지않고 깨어난 곳은 어느 포근한 이부자리. 머리 위의 물수건을 내동뎅이 치며 일어난 그의 앞에는 보이쉬한 매력의 잠재적 꽃소녀가 빙긋 웃으며 서 있습니다. 몸을 추스린 소년은 그를 눈여겨 본 소녀의 아버지이자, 신흥 문파의 지도자로부터 친히 무공을 전수받지만, 다시 한 번 아뿔사, 그들 부녀의 정체는 사실...

물론 한 학급 전체가 시험 기간에 무협지를 탐독한 것은 아니지요. 그래도 제도권 하에 고등교육이 이루어지던 배움의 터가 아니겠습니까? 반에 서넛은 무협지나 읽는 한심한 인간들을 비웃으며, 할리퀸 로맨스를 읽었지요. 장풍? 장풍 같은 소리하고 있네. 보아라, 여기 인생이 있다. 우연과 황금의 릴레이가 너희를 구원하리라. 분명 할리퀸 로맨스 속의 그들은 검기로 바위를 쪼개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제목과 작가만 다를 뿐, 내용은 대동소이 했습니다. 

여기 왈가닥에, 학업성적을 비롯한 품행은 방정치 못 하나, 한 없이 밝고 명랑한 소녀가 있습니다. 집안은 화목하지만 반드시 약간 어려워야 합니다. 그래도 너무 어려우면 안 됩니다. 끼니는 절대 거르면 안 돼요. 또한 꽃다발 속 안개꽃처럼 그녀의 주변에 절친 둘 셋은 있어야 합니다. 왜 한 핏줄을 가지고도 아나킨은 다크사이드에 사로잡혔고, 루크는 제다이 기사로 성장했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그런 그녀의 주변에는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세 명의 남주 후보생이 몰려듭니다. 주위를 알짱거리는 사내놈은 다섯이 될 수도, 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단 병력이 그녀를 위해 노래를 불러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결국 그녀와 아찔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인물은 셋이며, 그 중 둘이 본격적으로 그녀를 가운데 두고 격돌합니다. 이 숫자를 기억하세요.

명랑소녀를 둘러싼 남자들은 하나 같이 잘났습니다. 공부가 별로면 집이라도 부자고, 집도 공부도 평범하면 좋은 성격에 유머라도 넘칩니다. 대략 네 명의 남자가 그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데, 게 중 조금 덜 떨어지는 놈이 부위기 메이커이자, 초장부터 진짜 남자사람친구 역할을 합니다. 독자들도 그의 포지션에 대해서는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명랑소녀와 맺어지는 인물은 그녀와 감정적으로 공유되는 지점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녀가 가지고 있지 못 한 것을 가진 인물이어야 합니다. 

초장부터 개그나 치는 남자사람친구는 로맨스 게임에서 일찌감치 제외됩니다. 가뜩이나 밝은 명랑소녀에게 필요한 건 약간의 우수와, 문득문득 묻어나는 남성미에요. 이 남자사람친구 역할을 응칠에선 방성제가, 응칠에선 해태가, 그리고 응팔에선 현재 도룡뇽이 맡아주고 있지요. 이들이 명랑소녀와 주변 인물들을 오공본드처럼 자연스럽게 이어 붙이는 역할을 해 주면, 이제 세 명의 남자가 남아 본격적인 러브게임이 시작 됩니다.

가장 먼저 링에서 아웃되는 남자는 가장 화려하게 등장하는 잡니다. 등장만 화려합니다. 가장 멋져 보이고, 가장 젠틀해 보이지만 이 인물의 매력은 얼마가지 못 해 깨집니다. 깨져야만 합니다. 그는 명랑소녀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주변의 여자와 서브 로맨스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안심 없으니 등심이라고, 이 서브 커플의 로맨스만 응원하는 특이한 독자들도 있습니다. 작가들 역시 이 서브 로맨스에 적잖은 공을 들입니다. 너무 명랑소녀의 로맨스에 치중했다가는 읽는 사람도, 쓰는 사람도 지치니까요. 응칠에선 은지원과 신소율이 이 역할을, 응사에선 변칙적으로 삼천포와 윤진이가 이 역할을 맡습니다. 응팔에서는 선우가 이 역할을 맡고 보라와 로맨스를 꽃피우고 있지요.

이제 진짜 로맨스 게임이 시작됩니다. 결론부터 말 합니다. 너무 멋진 놈은 아웃입니다. 명랑소녀와 맺어지기 위해서는 필요충분조건을 만족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빈 구석입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여학생들은 완벽함에서 50원어치 덜어낸 빈 구석이 있는 남자에게 애정을 쏟는 요상하고도 신기한 감정상태를 보이곤 합니다. 내가, 이 뜨거운 가슴으로 저 남자의 빈 곳을 채워주고 말겠다! 내 손으로 저 남자 인간 한 번 만들어 보겠다! ... 그런 심리가 아닐까 감히 추측을 해 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렇다 치고.

살짝 덜 멋진 놈은 서로의 감정에 솔직해지기 전에는 일단 싸웁니다. 애들처럼 싸웁니다. 명랑소녀가 욕을 하면 욕으로 받아치고, 결정적인 순간에 "나에게만 따뜻한 내 남자"의 모습을 보일지언정, 갈등의 칠부능선을 넘기 전까지는 사사건건 충돌하고 상호갈굼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래야 저렇게 티격태격 하던 것들이 눈이 맞아버린 후에, 할리퀸로맨스에서 제일 불쌍한 자식이 되는, 마냥 잘난 놈의 운명이 한층 더 독자들의 애간장을 녹일 테니까요.

그래서 다들 알고 있는 것이지만, 어차피 남편은 정팔이. 그래도 남편은 정팔이가 성립이 되는 거지요. 응사에서 나정이, 응팔에서 덕선이는 마음 속에 자신도 모르는 새 쓰레기, 정팔이가 들어와 있음에도 그녀 스스로 쉽게 이성으로 다가가지는 못 하지요. 쓰레기나 정팔이가 가진 최고의 강점은 친밀감인데, 명랑소녀와 그들은 너무 오랜기간 과한 친밀관계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명랑소녀 스스로가 이성으로 서기에 확신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이때, 칠봉이나 택이와 같은 기폭제가 등장하는 겁니다. 칠봉이와 택이는 어느 시점부터 줄곧 명랑소녀를 여자로 대하지요. 예쁘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항상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너를 좋아한다는 표현을 거침없이 함으로써, 명랑소녀 스스로 이성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 있다는 것을 일깨우게 해줍니다. 인식을 하게 도와주는 거지요. 그래, 나 여자였지? 저기 아무생각 없어 보이는 쓰레기나 정팔이는 남자고. 그것도 내가 나도 모르는 새 호감을 품고 있었던 남자. 

그건 남주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쓰레기도 자신의 감정을 외면하고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나정이가 자신에게 그저 여동생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을 거에요. 다만, 너무 오랜시간 동성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마음을 드러낼 타이밍을 잡지 못 했던 거지요. 정팔이도 그렇습니다. 아마 선우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정팔이에게 덕선은 한때 설레었던 감정으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거기에 택이라는 잘난 놈이 나타나 대놓고 덕선이가 좋다고 선언을 해 버리니 아주 불이 붙는 거지요. 칠봉이이 애정공세에 쓰레기가 각성했듯이.

그렇다면 할리퀸 로맨스의 작가들이 이 무작정 잘났지만, 세상 제일 불쌍한 놈을 그냥 두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미 모성애로 그를 품에 앉은 수 많은 독자들이 있으니까요. 그대로 소설을 끝낸다면 책은 분서되고, 작가는 배식에 실패한 짬장처럼 공분 속에 파묻히겠죠? 어떻게 잘난 우리 택이를 불쌍하게 그대로 종량제봉투에 넣어 버릴 수 있겠습니까? 역사상 그 어떤 사문난적도 감히 그런 불경을 저지른 바는 없습니다. 암요, 구족을 멸하고 오가작통하여 대대손손 경계하게 할 일이지요.

할리퀸 로맨스 작가들은 소설의 2/3 시점에 왠 새로운 여자 캐릭터 하나를 등장시킵니다. 이 여자 캐릭터의 특징은 명랑소녀의 미덕과, 그녀가 갖추지 못 한 미덕을 고루 갖춘 사기 캐릭터라는 점입니다. 심지어 명랑소녀에게 없었던 장점을 하나쯤은 더 가지고 있어요. 그녀는 명랑하면서도 이지적이고, 여성적 매력이 넘치면서도 성격은 매우 쿨합니다. 이 대적불가한 대륙의 전설같은 존재는, 무공은 하늘을 찌르는데, 결코 명랑소녀와 대척점에 서지 않습니다. 남주도 이 매력이 철철 넘치는 여성을 아예 없는 존재 취급을 하지요.

그녀는 바람처럼 프레임의 안팎을 자유롭게 드나들다가, 잘났지만 불쌍한 놈이 문득 고독에 몸부림치는 순간에 짠! 하고 등장합니다. 그녀의 애정공세에 잘났지만 불쌍한 놈은 비로소 시련의 아픔을 딛고 웃음을 되찾게 되지요. 작가는 그 멋지지만 불쌍한 놈, 기어이 행복해지는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야 합니다. 응칠에선 형에게 의사가 그런 존재였지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성시원이가 그 의사 처자보다 잘난게 뭐... 웁웁...

문제는 택이를 이루지 못 한 첫사랑의 아픔에서 구원해 줄 인물로 누가 등판할 것인가인데. 인터넷을 보니 사람들이 이창호 9단의 부인께서 12살 연하라는 점을 들어 진주를 등판시키려 하더라고요. 저도 여기에 가능성을 보태어 봅니다. 이창호 9단의 실제 삶이 그래서가 아니라, 진주는 실상 구원투수가 갖추어야 할 모든 잠재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재밌게도, 택이가 결국 상실감을 맛 볼 시점이 진주가 1군 엔트리에 등록이 될 시점이 됩니다. 현재 쌍문동 친구들은 열 여덟 살, 진주는 일곱 살. 미래의 정팔과 덕선의 말에 의하면 도중에 그들은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가진 바 있지요? 대충 짐작하기로 그들이 재회하여 로맨스 버젼 2.0을 선보일 시점이 대략 이십대 중 후반. 그때 진주가 딱 덕선이의 나이가 됩니다. 까짓거 택이 장가 몇 년 더 미룹시다. 삼십대 초반의 택이 앞에 나타날 진주는 대학생. 조금 무리가 있지만 성인들이 연애질 한다는데 누가 뭐라 그러겠습니까?

치마입고 머리 기른 선우를 상상해 봅시다. 극에서 선우는 꽤 괜찮은 외모를 가진 걸로 나오지요? 유전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오빠와 엄마의 사랑을 듬뿍 자란 아이. 사랑은 받아 본 사람이 주는 법도 아는 겁니다. 희귀변종 보라와 달리 집안이 똑똑한 선우네. 거기에 결정적으로 선우의 성격. 보라 누나가 그렇게 밀어내도 한 친의 구겨짐도 없이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그 무한 긍정의 정신!! 폭발하는 야생마 같은 에너지!!

분명 나이든 택이는 덕선이를 상실한 상처, 온 동네의 꼬맹이였던 진주에 대한 기억으로 처음에는 그녀를 밀어낼 겁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쿨내 풀풀 풍기면서도, 너를 내 남자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총폭탄정신이다 그겁니다! 어디 덕선이가 그런 거 할 수 있는 인물입니까? 결국, 어른 택이는 여성스럽고, 긍정적이며, 예쁘고, 기억을 공유하는 진주에게 웃어주게 되어 있는 겁니다

내가 분명히 뭘 쓰려고 시작을 하긴 했는데....

.... 이러니까 좀 덕후 같아 보이기는 하다. 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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