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실 영화 <캐롤>을 보고 나서 이것이 과연 동성애자들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가 좀 의문이 생겼어요. 


캐롤의 경우 테레즈를 정말로 사랑하는 건지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거든요. 


캐롤이 테레즈와 만나는 첫 만남에서부터 캐롤의 눈빛은 사랑에 빠진 여자의 눈빛이라기 보다는 


저 아가씨가 자기한테 반했다는 걸 눈치채고, 순진한 아가씨를 꼬시려는 느끼한 40대 아저씨의 눈빛 같았어요.  


(느닷없이 호출된 죄 없는 40대 아저씨들께는 죄송 ^^) 


장갑을 일부러 놓고 떠나는 등 작업을 거는 게 상당히 능수능란하다는 느낌도 들었고요. 


테레즈를 집에 초대했을 때도 테레즈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랄까 그런 게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남편과 맞닥뜨린 후 자기가 기분이 나빠진 상태에서 테레즈한테 퉁명스럽게 대한다는 느낌이 들었지 


초대받은 손님인 테레즈에게 불쾌한 상황을 맛보게 해서 미안해 한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어요.   


캐롤의 남편이 야비한 사람이라는 건 알겠지만, 사실 캐롤은 자신이 동성애자이면도 이성애자인 남편과 결혼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남편의 인생을 망가뜨린 책임을 져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깐 들었고요. 


이혼이 마무리되기도 전에 캐롤은 순진한 백화점 아가씨를 꼬셔서 여행을 가는데 마치 골치 아픈 문제에서 도망치는 듯한


느낌이었고, 아니나다를까 테레즈와의 관계가 녹음되었다는 걸 알고나서는 테레즈가 자는 틈에 혼자 돌아가 버리죠. 


친구에게 테레즈를 떠넘겨 버리고요. 테레즈에게는 너도 언젠가 내 마음을 이해할 것이라는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요. 


캐롤이 40대 유부남이라고 바꿔서 생각해 보면, 캐롤이 테레즈에게 얼마나 무책임하게 대했는지 확실하게 느껴지는데요. 


아내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고 해도 어쨌든 결혼한 상태에서 순진한 20대 아가씨를 꼬셔서 여행을 갔는데 


그 관계의 꼬리가 잡히니 그 아가씨를 집까지 다시 데려다 주기는커녕 친구한테 네가 얘좀 돌봐줘라 하고 맡기고,  


얼굴을 보고 헤어지자고 말하는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고 편지 한 장으로 이별을 고하는 뭐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


딸의 양육권이 걸린 문제라고 해도 캐롤이 테레즈를 정말로 사랑하는가에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더군요. 


캐롤과 테레즈가 육체 관계를 맺는 장면에서도 캐롤은 뭔가 아름다운 것을 탐닉하는 느낌이랄까 뭐 그 정도여서  


간절히 사랑한다는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어요. 


캐롤이 테레즈를 다시 만났을 때도 잭이라는 친구가 방해했을 때,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금방 떠나버리죠. 


훼방놓은 잭이 미운 분들도 계셨겠지만 저는 캐롤도 그다지 이해가 가지는 않았어요. 동성애가 억압당하는 시기였다는


것을 감안해도 테레즈와의 만남이 캐롤에게 소중한 것이었다면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 척하고 좀 버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무엇보다 이상한 건 마지막 장면에서 테레즈를 바라보는 캐롤의 눈빛이에요. 


그게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돌아왔음을 기뻐하고 감격하는 사랑의 눈빛인가...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저에게 그 눈빛은 맨처음 백화점에서 테레즈에게 흘리던 느끼한 욕망의 눈빛과 그리 달라보이지 않았거든요. 


처음에는 이 영화에서 케이트 블란쳇이 연기를 제대로 못했다고 생각했어요. 같은 여자인 테레즈를 사랑하는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기에는 좀 역부족이었나보다, 동성애자인 여배우를 캐스팅했다면 좀더 실감나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만약 케이트 블란쳇이 감독이 원하는 연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면 그런 연기를 한 얼굴을 클로즈업해서 마지막 장면으로 


넣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거든요. 결국 케이트 블란쳇이 감독이 원하는 연기를 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요... 


이 영화의 제목은 <캐롤>이죠. 테레즈가 아니고요. 그렇다면 감독이 뭔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캐롤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캐롤이라는 캐릭터가 더 중요하니까 그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삼았겠죠. 


그렇다면 감독은 테레즈라는 캐릭터의 지극한 사랑이 아니라 캐롤이라는 상류층 동성애자의 이중적인(이기적인, 회피하는, 욕망을 채우는) 


사랑을 말하고 싶었던 건가 하는 생각도 들더군요. 


다른 분들은 다 캐롤이 테레즈를 몹시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면 제 감수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요. ^^ 


그렇지 않다면, 그리고 이 영화에서 캐롤의 사랑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것이 배우의 연기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면,  


캐롤은 테레즈를 그렇게 열렬히 사랑하는 캐릭터는 아니고 <캐롤>을 진정한(?) 사랑 영화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가령 <가장 따뜻한 색, 블루>는 저에겐 진정한 사랑 영화거든요.)


어쨌든 결론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캐롤의 그 느끼한 눈빛의 비밀을... ^^ 


(그 눈빛의 비밀을 밝혀주시는 댓글들, 혹은 저의 잘못된 이해에 대해 지적해 주시는 댓글들 모두 환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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