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ostolos Doxiadis (글) 정회성 (옮김)

1.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의 소설 [골드바흐의 추측]은 오래된 수학의 난제 하나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습니다. 제목에서도 써먹고 있는 '골드바흐의 추측'이라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골드바흐의 추측이란 무엇일까요? 난제라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 자체는 간단하니까요. 대충 이런 것입니다. 18세기의 수학자 크리스찬 골드바흐는 1742년 숫자를 가지고 놀다가 모든 짝수는 소수 두 개의 합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4=2+2, 6=3+3, 8=3+5, 10=5+5, 12=5+7... 그는 당시 최고의 수학자인 오일러에게 이게 일반적인 성질이냐고 물었습니다.

오일러는 골드바흐의 명제를 두 개로 나누어 정리했습니다. (1) 2보다 큰 짝수는 두 소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2) 5보다 큰 홀수는 세 소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우리가 골드바흐의 추측이라고 하는 부르는 미결 문제는 첫번째입니다. 두번째는 1937년 러시아의 이반 비노그라도프가 증명했으니까요.

흠,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는군요. 하지만 어떻게 증명하지요? 숫자 하나 하나를 다 체크해 보면 어떨까요? 이미 궁금한 수학자들이 수퍼 컴퓨터를 돌려서 400조까지는 체크해봤지만 아직까지는 골드바흐의 추측에서 어긋난 짝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귀납법은 증명의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400조 너머에서 하나라도 골드바흐의 추측과 다른 게 나온다면 귀납법에 기댄 엉성한 증명은 박살납니다.

2.

그런데 이런 걸 알아서 뭐하죠? 사실 알아서 도움되는 건 별로 없습니다.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해서 비행기를 못 만드는 것도 아니고 우주선이 궤도밖으로 벗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아마 골드바흐의 추측이 증명된다고 해도 엄청난 수학적 도약 따위는 없을 거예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이런 것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소문도 요란했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몇 년 전에 증명 되었지만 우리가 거기서 얻은 건 또 뭐죠?

그러나 독시아디스가 쓴 이 소설의 주인공 페트로스 파파크리스토스는 그런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소설 [골드바흐의 추측]은 이 간단한 문제가 한 사람의 일생을 말아먹은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저명한 수학자였던 페트로스 파파크리스토스가 '인생의 패배자'가 되었을까요? 이야기는 꽤 신파극 냄새가 납니다. 우리의 주인공 페트로스는 아빠 친구 딸과 연애를 하지만 그만 실연당하고 맙니다. 충격받은 페트로스는 뭔가 거창한 일을 해서 이름을 떨치는 것이 유일한 복수라고 믿습니다. 그가 정말 그 추측을 증명했을까요? 물론 그럴 리는 없죠. 페트로스가 풀었다면 독시아디스도 풀었다는 말이니, 그는 소설 쓰는 대신 추측을 증명한 논문을 써서 자기 이름을 만방에 떨쳤겠지요. 대신 페트로스는 골드바흐의 추측에 전인생을 잡아먹힌 꼴이 되어 친척들의 놀림감 겸 패배자의 모델로 전락하고 맙니다. 소설은 그의 조카의 시선을 통해 이 몰락한 수학자의 이야기를 열정적으로 전개해갑니다.

왜 페트로스처럼 똑똑한 사람이 이런 짓을 했을까요? 그렇게 실연의 충격이 대단했을까? 물론 그런 건 아닙니다. 첫사랑과 실연의 기억은 로켓의 부스터처럼 그를 추측을 향해 날아가게 도와준 뒤 사라져 버렸습니다. 남은 것은 이 간단하고 실없어보이기까지 한 문제에 대한 끝도 없는 집착입니다.

하지만 왜? 그 '왜'라는 질문이 이 소설의 핵심입니다. 독시아디스는 페트로스의 이야기를 통해 수학자라는 사람들이 어떤 걸 머리 속에 품고 사는지 보여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수학과 수학자들에 대해 그릇된 상을 품고 있습니다. 수학은 결코 건조한 숫자들의 나열이 아니며 수학자들도 인간 계산기가 아닙니다. 수학은 '한없이 흥미진진하며 장엄한 시적 세계'이며 일급 수학자들의 세계 역시 열정과 야심, 비열함과 광기가 흘러넘치는 흥미진진한 무대입니다. 아마 이런 이야기는 다른 세계보다 더 심할 수도 있습니다. 순수 수학에서는 다른 사람들한테는 완충 작용을 해줄 현실의 간섭이 적기 때문이죠.

독시아디스는 페트로스를 그의 베르질리우스로 삼아 독자들에게 수학자들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페트로스 자신은 가공 인물이지만 그는 하디, 라마누잔과 같은 실존 인물들 사이에 교활하게 뒤섞인 채 남아 그들의 시적이지만 약간 미친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줍니다.

소설은 수많은 수학적 지식과 연관되어 있고 당연히 수많은 전문 용어들이 튀어나옵니다. 독시아디스는 비교적 명쾌하게 이들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비전문가인 독자들도 건너뛰지 말고 한 번 시도해 볼 만 합니다. 하지만 이해 못한다고 실망하지 마시기를. 중요한 것은 소설 속에 끼어 있는 지식 쪼가리들이 아니라 수학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을 아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소설을 보다보면 이 미친 세계에 대해 정말로 조금은 알게 됩니다. 아마 여러분도 소설을 끝낸 뒤엔 페트로스처럼 숫자들이 춤을 추는 꿈을 꿀지도 모르겠군요.

3.

[골드바흐의 추측]은 안내자로서, 교양서로서는 훌륭합니다. 하지만 소설 자체로는 어떨까요?

책은 일단 재미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미덕 하나는 놓치지 않은 셈이죠. 캐릭터들의 열정에는 진실성이 담겨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미덕 하나도 건진 셈입니다. 그러나 이 둘을 넘어서면 꽤 심각한 문제점이 등장합니다.

소재 자체가 소설의 장애가 됩니다. 하나의 학설이나 미해결 문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가는 작품은 [골드바흐의 추측]이 최초는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로 조제핀 테이의 [시간의 딸]을 들 수 있죠. 이 소설은 리처드 3세에 대한 비주류 가설을 옹호하기 위해 쓰여졌는데, 추리 소설 형식을 따르면서 리처드 3세의 '누명'을 벗겨갑니다.

하지만 골드바흐의 추측과 리처드 3세 옹호론은 사정이 다릅니다. 비주류 역사 가설은 줄거리가 있고 뼈대가 있습니다. 하지만 골드바흐의 추측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아무 것도 모른다면 페트로스는 어떻게 줄거리를 끌어가야 할까요? 최종 증명은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중간까지는 가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 중간과정 역시 상당한 업적이어야 하니, 남의 업적을 훔치거나 작가가 직접 그 업적을 쌓아올리지 않는 한 중간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 결과 독시아디스는 종종 무리수를 둡니다. '남의 업적 훔치기'도 간접적으로 한 번 등장하고 종종 이해되지 않는 변명도 나옵니다. 예를 들어 페트로스가 핑게로 삼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소설 속의 새미 엡스타인도 말했듯이 좀 심했어요.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독시아디스는 어려운 소재로도 충분히 흥미를 끌만한 소설을 쓴 셈입니다. [골드바흐의 추측]이 담고 있는 알맹이는 상당히 커서 이 정도의 단점은 잊어주고 싶군요.

4.

이 소설의 영역판을 출판한 Faber & Faber사에서는 2년 안에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하는 사람에게 백만 달러의 상금을 주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250년 동안이나 미해결로 남은 문제가 백만 달러 상금 때문에 2년 만에 뚝딱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군요. 하지만 누가 알겠어요? (00/06/05)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