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5.28 07:19
개개인마다 정보를 판단하는데 가벼운 편향이 있고, 그걸 보통 가치관이라고 부르더군요. 또한 개개인마다 정보를 취향에 따라 취사선택하는데, 그건 보통 세계관이라고 부르더군요. 내집단보다 외집단을 훨씬 단순한 조합으로 이뤄졌다고 판단하고, 타자들보다 자신이 훨씬 복합적이고 다차원적 존재로 파악하는 것을 오류로 자주 지적되죠. 그런 오류가 잦은 이유는 세계를 더욱 복잡하게 이해할수록 판단을 내리기 힘들테니 그럴겁니다. 저도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는 욕망과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사이에서 매번 갈등하고는 합니다.
아무래도 모든 사람들이 세계가 단순한 - 저는 [맥락]이라는 단어를 더 좋아하는데 - [서사]로 이루어져 있기를 기대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흔히 쓰이는 세대론이나 계급론 같은 경우에도, 위대한 선인이 있었지만 그 핵심은 단순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을 해요. 종교도 마찬가지로 (깊게 파지 않으면) 단순한 서사를 제공하죠. 무언가를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이해할 수 있고, 공통 서사로 올라설 수 있겠죠. 알알이 쪼개어 내는 일은 학자들이 담당하구요.
제가 이번에 어떤 영상을 봤는데, 보면서 눈물이 마구 흐르더라구요. 참, 감정이 복받치는 일이 더 잦아지고 있어요. 이번 강남역 사건에서 있었던 충돌이었는데, 어떤 흰 마스크를 쓴 남자 한 명과 썬글라쓰를 낀 남자 한 명을 둘러싼 많은 추모객들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확성기 같은 것도 준비 안해간 것을 봐서는, 이런 상황에 완전 초심인 인간 같았어요. 몇 십마디 하고 응수받고, 몇 십마디 하고 응수받고 하더군요. 제가 이 영상을 보고 왜 그렇게 슬펐냐면... 한국사회에서 면대면 대화를 하기 위해선 이 정도 극악한 상황에도달을 해야한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대화의 국면 없이 여기까지 진행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니 참 암울하더군요. 저는 꽤 오랫동안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거의 동등한 위상을 가지고 있으며, 전자로 후자를 어느정도 대체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던 사람인데(인간관계를 가상으로 대체해버리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죠), 최근에는 아니라는걸 거의 받아들였습니다. 인터넷에서의 롤플레잉 채팅이 희곡이 될 수 없는 이유처럼요. (희곡 교수님께서는 불가능한 이유로 '넷은 신체가 없다'고 하셨죠)
제 입버릇 같은 말이 있습니다. '더 공부해보고 이야기하겠습니다'인데, 좋게 말하면 자세하게 파악을 해서 결정을 내리겠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지금 한 이야기로는 들을 생각이 없고 판단을 뒤로 지연시키겠다는 말이죠. 이것은 '아뇨, 그건 틀렸고 전 받아들일 생각이 없습니다'보다 더 치사하기도 합니다. 후자면 피아가 식별될텐데 전자에게는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기 힘들테니까요. 이번 선거 예측이 그렇게 틀어진 이유로는 이런 식으로 판단을 뒤로 미룬 사람들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흔히 부동층이라고 이야기는 하지만, 설문조사에서 '모르겠음'을 선택한 사람들 말이에요. 그 사람들은 선거를 하기 바로 직전까지 결정을 미룬다고 하더라구요. (사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그런겁니다. 처음부터 담론을 특별하게 판단하고 있는 사람은 적을거란 것이요. 물리세계에는 존재하지만, 누구에게나 누군가 물어보기 전까지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이슈들이 많을 겁니다. 아주 얇은 지식으로 세계관이 형성되어 있을지는 모르나, 가치관까지는 결정되지 않았을 수도 있죠. 저는 요즘 사람들이 향유하는 정보매체는 어떤 종류가 있으며 얼마나 시간을 점유하는 지 궁금해요. 정보습득을 단순히 인터넷에서만 한다고 봅시다. 그럼 하루에 넷에 머무르는 시간이 5시간이라고 했을 때, 듀게에 2시간, 트위터에 1시간, 인스타그램에 2시간 이렇게 보낸다거나, 페이스북에 4시간, 카카오스토리에 1시간 이렇게 보낸다거나 하겠죠. 아니면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서도 지식의 취사선택으로 구조를 형성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구요.
저는 이런 식으로 가정합니다. 같은 커뮤니티를 활용하고 있다 하더라도 게시물을 선택하여 읽는건 개인마다 매우 차이가 납니다. (그 차이가 커서 가끔씩 놀랄 때가 있습니다. 지인은 읽은 글인데 제가 안 읽거나 제가 읽은 글인데 지인은 안 읽거나 {그게 아예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다수} 하는게 많을 때 참 놀랍더군요) 취향에 맞춘 취사선택은 개인의 서사 중 세계관을 구성합니다. 이 세계관은 같은 매체를 활용할수록 그나마 비슷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끔씩 논란이 있을 때 운이 좋으면 판단까지 이르릅니다. 그런 항목들이 가치관을 이룰겁니다. (당연하게도) 개개인이 이런 과정을 거쳐 자신의 위상을 설정했을 것이고 다들 다른 세계를 보고 있게 되는 것이겠죠.
판단에 도달하기 전 인식 상태로 머무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걸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판단에 도달해서 행동으로 이르르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겠죠. 가장 약한 단위의 행동인 '온라인 댓글달기' / '온라인 글쓰기' 에 도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도 꽤 판단으로 진전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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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번 사태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점은 왜 자꾸 '서사 끼워팔기'를 하고 싶어하는가였습니다. 천안함 장병들과 강남역 살인사건은 매우매우 약한고리로 연결되있고, 군역과 여성인권도 상당히 약한고리로 연결되있죠. 어째서 한 쪽의 서사에 연결고리가 약한 다른 쪽의 서사를 끼워 넣는가 궁금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신이 배제된 서사를 이해할수가 없다, 는 것으로요. 세계를 이해하는데 단순하고 좋은 도구인 서사에 자신의 (주된) 자리가 없는 것을 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달리 말해보면 남성이 보조적 위치에 존재하는 서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이해가 안되는 것이죠. 익숙하지 않을테니까요.
이번 추모에서 제게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죽음을 이용하고 있는가?' 제가 무언가를 판단까지 내릴 때 자주 이용하는 것은 당사자주의입니다. 그가 거기서 어떤 주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당사자인가? 하는 것이요. 피해자-여성의 환유 관계를 강한 고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사자로 속할 수 있다는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약한 고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일이 당사자를 제외하고 진행되는 정치적 상황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겠죠. 최근의 저의 세계관과 가치관은 여성주의에 우호적으로 구축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피해자의 혈연이라고 알려진 사람의 토로에 대한 반응이었죠(사실 확인도 안했지만).
전 오래전에 [쿨하지 못해 미안해, 70 - 49 = 21 http://www.djuna.kr/xe/board/3531298 ]이라는 글을 썼던 적이 있습니다. 공지영의 남성 성매매 통계 오기에 대한 분노로 쓴 글인데요. 지금 보면 통계에 대한 애정 때문에 통계 자체의 견고함이 공격받는걸 못 참는 자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창피한 글이죠. 그래도 지금도 이런 부수적 피해에 대한 분노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최근에 이와 비슷한 논쟁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용어 때문에 일어나고 있을 겁니다. 저는 이 사건이 있기 전에 듀나님이 이 용어를 쓰는 걸 보고 투덜거렸다가 마음을 비운 일이 있었죠. 개인적으로 이 단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도, 남성을 서사의 주인공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옮겨보자면 '남성이 허락하는 [잠재적 가해자]라는 용어' 정도가 되겠죠. 사실 이 단어에 대해서는 전 판단을 미뤘습니다. (이에 대해 가장 절묘한 이야기는 '남자는 다 늑대'와 '남자는 잠재적 가해자'라는 서사를 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둘 다 싫기 때문에....)
저는 통계를 믿기 때문에 범죄가 근 3년간은 개선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그 방향과 사회적 반응은 상관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즉, 지금 이렇게 반응이 일어나고 있는게 이상한게 아니라, 지금까지 반응이 없었던게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왜 이 꼴, 이 모양인데 아무런 반응이 없는가'는 예전부터 화두가 아니었던가요. 최근 짧은 시일 내의 강력 범죄들도 통계적 빈도 상에서는 큰 의미는 없을 것이라 가정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공포가 거짓이 되는건 아니죠. 지금까지 일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일상이 아니었을 뿐이라는 의미일 뿐이지요. (사실 범죄통계는 너무 복잡하게 꼬여 있어 손을 대기 무섭습니다...)
저는 어느 한 편의 승리, 같은 결과를 믿지 않습니다. 둘 다 이기거나, 둘 다 지는 것 뿐입니다. 이젠 익히 알려졌듯 한국이 소멸할 것이냐 말 것이냐도 걸린 문제이니까요. 혁신을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곳들도 인구의 새물결이 흘러 들어가자 융합!이라고 하면서 통/폐합을 하고, 감축!이라고 하면서 특별제도들을 전부 폐지하고 있지 않나요. 그냥 내버려두면 알아서 인구 감소가 도달하여 후려쳐서 고통스러운 재조정을 시킬겁니다. 게다가 이건 도달한 결과에 의한 임기응변일 뿐이구요. 많고 견고한 서사들이 나와 공통 서사로 올라서길 바랄 뿐입니다. 그런 세계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는걸 받아들이도록 말이에요. 그것이 이 전쟁의 결말이 되겠죠. (국지전과 참호전으로 끝이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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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견고한 서사를 가지고 있다는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빠르고 깊게 정보를 관조할 수 있는 세계를 얻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 조감-권력에 대해 생각을 해보고 있어요. 넷에서 1인-미디어를 조합하여 세계를 조감하고 있다는 권력-환상을 얻어 내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우리는 기분 나쁜 매체를 쉽게 목을 칠 수 있고, 자신이 얻고자 하는 정보를 타임라인이나 RSS, 취사선택한 뉴스 등으로 조성할 수 있는 (환상)권력을 얻게 되었죠. 정보를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할수록 세계관/가치관은 (실제와는 상관없이) 매우 두터워집니다. 그런 매체공간의 분절이 현재의 개인 서사의 분절로, 그리고 서사전쟁으로 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다른 세계를 산지 오래된 것입니다. (일상을 채우는 시간을 점유하는 공간들을 떠올려보세요. 어떤 것들이 교육을 대체하고 있는지 말이죠.)
2016.05.28 08:23
2016.05.28 09:00
skelington_ 세계가 정말 잠재적 여권주의자와 잠재적 남권주의자로 이루어졌을까요? 저는 그 비율이 예상보다는 많지 않을꺼라고 가정하는 편이에요. 음, 그런 사람들로 이뤄졌다면 그 사람들을 발현시키기 위해 더 전선이 넓어져야 될 것이고, 아니라면 판단의 기준이 되는 서사를 찾아내 늘려야겠죠. 하하, '잠재적 우군' 생각이 나면서, 정말 어떻게든 주체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이 떠오르네요. 뭐, 저도 이런 글을 썼으니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죠. 제 관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니. 어느 쪽이든, 어째서 거기까지 도달했는가를 파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이든 거짓이든 서사로 말이죠. 그래야 과정에 개입을 할테니까요.
대의와 명분을 얼마나 얻을 수 있느냐 문제가 되겠죠. 이 두 단어가 언제나 나쁜 위상을 차지하고 있지만, 실제 [사회 구조] 문제라면 저것들로 해결을 해나갈 수 있을테니까요. 내적 충돌 없이 납득 갈 수 있도록 진행이 되었으면 싶어요. 뭐, 이건 제 바람이고 전 사실상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존재 중에 하나니까요. 제게 흐름은 나쁘지 않게 느껴지니 조용히 있어야겠죠.
2016.05.28 09:48
2016.05.28 16:43
잔인한 오후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평소에는 발동이 안되는 묘한 감각이 느껴집니다. 뇌가 간질 간질 거리는 느낌;
문제의식에 부분적으로는 공감도 됩니다.
다만 마지막 문단에서는 좀 갸우뚱합니다. 정보의 비대칭성이라는 매우 강력한 현실적 한계 혹은 변수는?
게다가 조감은 단지 취하는 정보의 량이 아니라 관찰자의 정보를 판별하고 해석하는 역량이 관건 아니던가요?
다소 기계적으로 주체를 보는게 아닌가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미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바로 이 댓글의 앞부분에 지적했던 그런 상황들도 한몫해서
2016.05.28 16:51
전 이런 현상에 대한 여러가지 입장을 관찰할때, 어떤 입장이 더 '가치'가 있는지에 주목합니다. 당연히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일 수 밖에 없죠.
어차피 사회과학은 수학만은 아니니까요. 결국 당파성이 문제, 그리고 어떤 사람들의 당파성인가의 문제 아닐까 합니다.
이번 사안에서 어떤 이들의 어떤 목소리가 한국사회의 발전에 더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 목소리를 내는 것이 더 효과적인가의 문제
2016.05.28 17:22
각자 최대한 자기 입맛에 맞을 확률이 높은 다른 세계를 살 수 있다는 점이 이 시대의 몇 안되는, 그 이전 시대에는 없는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전 일베가 도무지 싫기에 거길 제가 머물곤 하는 세계에 포함시키지 않아도 되고, 티비 프로도 이젠 지금 이 순간 방영중인 프로만을 봐야하진 않는다는 것... 예를 두개뿐이 들진 않았지만 여하튼 그런것들이 굉장히 좋습니다.
몇년 전까지만해도 저와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과 불쾌함과 무례함과 어이없음을 무릅쓰고 의사소통을 하려한 적도 있긴했는데 요즘엔 별로 그래야할 필요를 못느낍니다. 체감상 예전보다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자신과 다른 것을 수용하는면이 떨어졌다고 느끼기도 하고(전반적으로 여러모로 여유가 없어보입니다. 뭐에든 한 줄 요약을 요구하고 그마저도 왜곡해버리는 반지성주의적인 풍토도 크게 자라난것 같고) 어차피 그래서 그런식으로 바뀌지 않는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바엔 그냥 최대한 마주칠 일 없이 대체적으로 마음 편한 환경에서 마음 편한 사람과 지내는것만으로도 좋지 않나 싶어요. (여건상 그럴 수가 없어서 싸우고 목소리를 낼 수 밖에 없는 분들이 계시다는것을 알고있고, 그런 분들의 여건을 찌질이들이 피해자탓하듯이 '그런게 싫으면 그런게 없는데서 살면되지'라는 식으로 어이없게 탓하는건 아닙니다)
2016.05.28 19:05
soboo_ 저는 어떤 집단의 이야기라도 개인의 서사로 환원되기를 바라는 편이에요. 무슨 이야기냐면 구조적 대응은 거시 통계가 필요하지만, 서사 전쟁에서는 중첩된 개인 서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좀 더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포스트잇에 써져 있던 이야기가 인터넷 상에 고백되길 바라요. 공통 서사로 편입될 수 있도록 말이에요. 아주 자세할수록, 현실감이 깊게 묻어날수록 강력하겠죠. 남녀가 동시에 이용하는 홈페이지에서 말이에요. 누군가의 현실적인 경험을 없던 일로 공격하긴 어렵죠. [단지]나 [혼자를 기르는 법]의 몇몇 화, [505 생활만화]의 몇몇화가 떠오르는군요. 영화나 픽션 웹툰보다 논픽션이 필요한 시대에요. 저도 왠만하면 제 이야기를 하려고 하구요.
마지막 문단은... 개개인이 자신의 세계관을 얼마나 견고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서술해봤어요. 저는 회의가 좀 심해서, 의심하고 의심한 걸 또 의심해봐요. 원자료를 보지 않고서는, 실제 일어난 일을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거의 믿지 않아요. 역설적으로 어느 정도 비용을 들였으면 찰떡같이 믿고 넘겨버리죠. 매체가 갈린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반복해봤어요. 생각해보면 과거에도 조중동만 믿는다 그렇게 이야기 했었죠. 인터넷도 수구화 된다는 이야기일지도요. 정보 통로를 자의로 조작했다고 너무 믿을 수는 없단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저는 이런 상황이 되었을 때... 결국에는 마음이 가는대로 가요. 최대한 끝까지 판단은 뒤로 미루고,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을 얻어보고 대충 위상을 정하다가, 정말 피해 입는/입을 사람들이 있으면 피해의 크기를 가늠하고 응원하려고 하죠. 제가 무슨 포지션을 취한다고 해서 어떤 영향이 있으리라 기대도 하지 않으니 마음이 편하죠. 저는 그만큼 영향력 있는 존재도 아니고, 주체로 자리잡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니까요. 남들에게는 아주 작은 바늘 끝만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을테니 딱 그 정도로 생각합니다. 스쳐지나가며 글을 띄엄띄엄 읽혀주는 정도로. 그렇게 생각하면 자아가 비대해질 필요도 없고, 어떤 사안에 대한 생각을 서술하는게 그렇게 어렵진 않아지죠. 더 많이 조심하게 되구요. 그냥 듀게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정도의 서사인거죠.
익익_ 하하, 저도 이 취사선택의 세계가 너무나 사치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어서 즐겁습니다. 이렇게 향락을 누려도 될까? (넷플릭스에서 원하는 대로 영화를 누르며) 부귀영화를 누리는데 뭔가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KMDB의 감상료 0인 VOD 보기를 누르며) 3S 정책 같은게 아닐까? (트위치에서 해외 방송을 보며)
웹의 서사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낄 때가, 가족이나 친구가 완전히 사라져 보일 때가 그렇습니다. 서사 주인의 적들은 전부 낯선 사람들이고, 길거리에서 외지에서 집앞에서 마주치는 서사들이요. 그리고 세대론 이야기할 때도 다들 온전히 개인으로만 다뤄져서 기분이 이상할 때가 있습니다. 아직은 1인가구보다는 다인가구가 더 많고, 결국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가족이나 친구들일텐데 말이에요. 그 다음은 직장인이나 같은 학업을 하는 사람들이겠죠. 그렇게 한정된 세계를 벗어났을 때야 겨우 웹세계의 지인들과 타인들을 만나게 되는데, 현실 세계에서의 대화가 자꾸 미뤄지는 경우가 많죠. 저도 넷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노력하는건 거의 포기했습니다. 직장에 다니다 보니 그 정도의 여유가 없을 뿐더러, 책임과 의무를 느끼면서 엄근진하게 대화할 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데 있겠죠. 넷세계의 예의란 천차만별이니까요. 뭐, 인터넷의 힘이 빠지는 이유는 다들 여유가 없으니까 봉사적 (공짜) 생산이 줄어든게 아닌가 생각해요. 간단히 기업 같은 경우도 공시하던 연구소 자료들을, 자기 살려고 인하우스로 바꾸고 그런걸 보면 말이에요. 말 좀 하신다 싶은 분들은 수익구조 만들어서 문 닫고 들어가버리고요. 넷도 서서히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겠죠.
일상이나 웹이나, 그래도 느긋히 할 이야기 적당히 하면서 쌓아 올려가는 것도 좋더라구요. 뭐든 자기 시간 날때이긴 합니다만, 하하. 크게 싸우는건 너무 지치잖아요, 공감해요. 크게 싸우고 나서 '아 정말 속후련하고 잘 싸웠네'란 느낌보다는 '아, 무지 창피하고 부끄럽다' 이런 감정만 드는것두 있구요, 하하..
2016.05.29 00:57
뭐라 딱히 말할 수 없지만.. 묘하게 공감가지 않는 글이로군요.
이유에 대해서 저도 좀 더 생각을 하고 오겠습니다.
2016.05.29 02:31
흐흐, 전쟁은 너무 나가신거 아닌가요. 사람은 다른 사람 아프고 힘든거 잘 이해합니다. 공감을 못해서 그렇지. 당장 누구 자식, 부모가 죽은 것보다 내가 배고프고 가시 박힌게 나에게는 더 큰일이니까요. 나의 세계가 이렇다라고 아무리 얘기해봐야 너에게는 먼소리에요. 내 얘기에 공감해주길 원하면 먼저 상대방의 얘기를 듣고 공감해야 합니다. 언제 듣냐구요? 본문에 나온 서사 끼워팔기 할때요. 딴소리할때 그걸 잘 들어야해요. 왜냐면 내가 받고 싶은걸 먼저 해주면 상대방도 똑같이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힘들다,가 아니고 나는 이렇게 힘든데 너는 얼마나 힘들겠어? 라고 얘기해야하는거죠. 개인의 서사는 내가 말하고 싶은 나의 서사가 아니고 듣고싶은 네 서사여야 합니다. 내 삶과는 상관없고 사건과도 관계없고 관심도 없는 네 서사요. 그래야 견고한 세계관에 균열이 오고 이해와 공감의 물꼬가 트입니다. 내가 힘들고 무서울때야말로 너의 힘들고 무서움을 알아야 할때인거죠. 몸이 많이 아프고 나니까 이런 생각이 드네요.
2016.05.29 07:13
올렉_ 생각을 전달하기에 최적의 분량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너무 길어도 안 되고 짧아도 안 되고.
길어질수록 더 덧붙이게 되고, 더 길어지게 되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게 되죠. 이건 좀 길었다고 생각해요. (뭐, 제 방식으로 놀리시는 것일수도 있지만.)
김감자_ 전쟁이라고 하려면, 어떤 단일한 서사로 통합시키기 위해 나머지를 없애야 되겠죠. 양 쪽이 동등한 의미를 가졌다 이런 이야기는 아니에요. 실제 전쟁이 그렇듯이요.
상대방의 이야기를 공감하는 것은 면대면 일대일 상황에서는 매우 효과적이라고 봐요. 누군가를 카페에서 만나거나 한다면 그렇겠죠. 그러나 집단 간의 비공감 상황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개개인이 나서서 타집단을 '공감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아니면 타집단의 개개인이 나설 때 '공감한다'라는 말을 달아야 하는데 서로가 이미 너무 멀리 있으니 힘들잖아요. 음... 제가 지금까지 읽었던 성별 관련 글 중에 '나는 이렇게 힘든데 너는 얼마나 힘들겠어?' 형식의 글을 보진 못해서요.
그래도 여기까지 쓰다보니 이해가 되요. 김감자님에게는 다른 두 집단이 그나마 공유하고 있는 약한 고리를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계신다면, 저는 그 약한 고리를 핍진성이라고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요. 개인의 자세한 고백이 남과 겹치는 부분은 삶의 실감일테고, 상대방 이야기에 대한 동의가 상대와 교류하는 것은 감정일테니까요.
딴소리할 때 잘 들어야 한다면, 천안함이나 군역에 대한 이야기에도 고려할만한 가치가 어느 정도 있다는 이야기가 되어서. 어떻게 보면 편승이 너무나 쉬운 것이잖아요. 결국 함께 이겨야 한다면 저 쪽의 이야기도 어디엔가 넣기는 해야겠지만... 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극명한 두 행동의 차이는 말씀하신 세계관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고, 행위의 발현은 미뤄져있었을뿐 가치관이나 행동의 방향은 이미 예정되어있다고 봅니다.
'사람이 죽었는데...'를 전제로 설정해버리면 세상 그누구도 이사건에 당사자성을 가지지 못하고 자의적인 해석만이 나돌겠지요.
언급하신 희생자 가족의 일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