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터 박스

2010.02.22 13:31

DJUNA 조회 수:7010

1.

기초적인 숫자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텔레비전의 화면 비율은 1.33:1입니다. 정사각형을 살짝 누른 듯한 모양이죠. 그런데 요새 우리가 보는 영화의 대부분은 1.85:1입니다. 양 옆이 잘려나갈 수 밖에 없지요. 물론 '와이드 스크린'인 2.35:1 비율의 영화들은 더 많이 잘리고요.

보통은 팬 앤 스캔이라는 중간 과정을 거칩니다. 그냥 양끝이 잘린 채로 내보낸다면 화면이 엉망이 되거든요. [지지]에서처럼 두 사람이 화면 양 끝에 앉아서 노래를 부르는데, 이걸 그냥 텔레비전 화면에 옮긴다면 두 사람의 코끝만 보이지 않겠어요? 이럴 때는 대사나 노래에 맞추어 화면을 이리 저리 옮기거나 컷을 넣어 주어야 하죠.

잘 된 팬 앤 스캔 버전은 사실 그렇게 거북하지 않습니다. 특히 비디오 시장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요새는 영화를 찍을 때부터 텔레비전 화면을 고려에 넣거든요. 심지어 몇몇 영화들은 텔레비전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나아지기까지 합니다. 솔직히 말해 [레인 메이커]는 쓸데없이 길쭉하기만 했던 원본보다 텔레비전 화면이 나았어요.

하지만 살릴 수 있다면 원래의 화면 비율을 살려서 보는 게 좋겠지요? 특히 비디오 시장에 신경 쓰지 않았던 옛날의 와이드 스크린 영화들은 비디오나 텔레비전으로 들어가면 아주 엉망이 됩니다. 잘 된 팬 앤 스캔 버전도 종종 갑갑해요. 레터 박스를 쓰면 화면 자체는 작아질지 몰라도 정작 진짜 화면은 넓어집니다(수학적으로만 따진다면 말이 안되는 이야기지만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들 아실 거예요.)

그러나 텔레비전의 작은 화면은 여전히 문제가 됩니다. 1.85:1 정도라면 보통 텔레비전에서도 무난해요. 하지만 2.35:1이나 그 이상인 영화를 텔레비전 화면에 밀어넣으면 정말 까만 화면에 걸친 리본 같아 보입니다. 떨어지는 해상도를 무시할 수가 없는 거예요. 레터 박스라고 해도 조금은 편집하고 확대해서 텔레비전 화면에 맞추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거슬리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2.

그래도 레터 박스는 아주 흔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바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화면 위아래에 까만 띠가 나오면 비디오 고장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 세상에 그득했었는데 말이에요. 그 동안 텔레비전 화면이 많이 커졌고 DVD와 같은 새 매체들의 등장 때문에 레터 박스의 입지가 훨씬 넓어진 것이죠.

앞으로 HD 텔레비전이 나오고 디지탈 방송이 나오면 또 사정은 달라질 거예요. 1.85:1 영화는 더이상 레터 박스를 쓸 필요가 없겠지요. 2.35:1 화면의 영화의 레터박스도 훨씬 덜 거슬릴 거고요. 오히려 엉뚱한 부분에 레터 박스가 쓰여질 걸요? 옛날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구식 헐리웃 영화들은 양 옆에 검은 띠를 남길 수 밖에 없을 겁니다. 텔레비전 비율은 1.33:1이고 50년대까지 영화 표준은 1.37:1이었으니까요. (1.66:1 비율 영화의 아나모픽 DVD에는 벌써 이런 띠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요샌 이런 걸 보고 윈도우 박스라고 부른답니다.)

요새도 와이드 스크린 텔레비전을 가진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안고 살죠. 이상하게도 대부분 사람들은 화면을 옆으로 쫙 늘리는 해결책을 취하더군요. 이해를 못하겠어요.

3.

화면 비율이 문제가 되는 곳은 텔레비전 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극장이 더 심할 때가 많죠. 예를 들어 서울극장 2관과 같은 곳을 보세요. 거기서 [스타 워즈] 같은 와이드 스크린 화면의 영화를 상영하면 화면이 어떻게 되나요? 양 옆이 잘립니다. 정확히 말해 왼쪽이 잘리지요. 오른쪽 세로 자막을 살리려고 화면을 왼쪽으로 밀어붙이기 때문입니다.

비디오 화면은 팬 앤 스캔을 해서 조절이라도 하지만 영화관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사 기사가 영사기를 움직여가며 수동식 팬 앤 스캔을 해주지 않는다면요. 하긴 자막 때문에 그런 것도 어렵긴 하겠네요.

더 어처구니 없는 것은 위 아래가 잘리는 경우입니다.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납니다. 많은 영화관이 스탠더드 화면의 위 아래를 잘라서 와이드 스크린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대표적인 곳이 코아 아트홀과 같은 곳이죠. 얼마 프랑스 단편 영화제 때 전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답니다. 위 아래가 잘리는 건 양옆이 잘리는 것보다 훨씬 치명적입니다. 잘못하면 머리가 날아가니까요!

그러고보니 전에 시네하우스에서 [황금광시대]를 보았던 기억이 나는군요. 찰리 채플린은 그렇게 변화 무쌍한 카메라 워크를 구사하는 감독은 아닙니다. 영화 전체를 통해 떠돌이 찰리의 머리는 대부분 화면 위쪽에 있지요.

시네하우스에서 그 영화를 보았을 때, 전 찰리의 머리를 볼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볼 수 있었던 건 머리가 잘려나간 불쌍한 몸 뿐이었어요. 생각없는 극장이 코미디를 공포 영화로 탈바꿈시켰던 거죠.

4.

세상이 바뀌어 가니, 이제 슬슬 사람들도 화면 비율을 위한 절단과 까만 띠에 익숙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앞으로 보편화될 와이드 스크린 브라운관은 넓은 화면을 보장해주는 것 뿐만 아니라 다양한 화면 비율을 보장해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99/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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