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영화

2010.02.22 13:33

DJUNA 조회 수:8258

파프리카 지금까지 봤던 영화들 중 가장 무서운 영화가 뭐예요?

듀나 글쎄요. 대답하기 힘들군요. 하지만 지금까지 가장 무섭게 봤던 영화가 뭐냐고 묻는다면 대답해 줄 수 있어요.

파프리카 같은 질문 아닌가요?

듀나 아뇨. 달라요. 공포 영화들의 자극은 1회성이고 영화를 본 당시의 상황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예를 들어, 전 어렸을 때 [사이코]를 정말 무섭게 봤어요. 하지만 지금 그 영화를 보면서 공포를 느끼거나 하지는 않지요. 물론 여전히 흥미진진한 영화이지만요.

파프리카 좋아요. 그렇다면 가장 무섭게 본 영화는?

듀나 여럿 있어요. 아까 말했던 [사이코]도 그 중 하나지요. 전 [이블 데드]를 운좋게 극장에서 본 적이 있는데, 그 때도 엄청났었지요. 그리고... 말하기 쑥쓰러운데, [레비아탄]을 굉장히 무섭게 봤어요.

파프리카 아니, 왜요?

듀나 생각해보면 영화랑 전혀 상관없는 이유 때문이었어요. 그 영화를 댁도 잘 아는 H 아무개와 함께 봤지요. 그런데 그 사람 워낙 겁이 많잖아요. 옆에서 꺅꺅 비명을 질러대는데, 저도 모르게 그 사람 페이스에 말려들었나봐요. 다시 봤을 때는 '아니, 그 무섭던 영화가 저렇게 시시했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제가 '무서운 영화'랑 '무섭게 본 경험'을 분리하는 거예요.

그 쪽은요? 어떤 영화를 볼 때가 가장 무서웠어요?

파프리카 [샤이닝] 처음 봤을 때 무서웠고... [페노미나]랑 [서스피리아]... 그런 것들요. [페노미나]는 두 번째 봤을 때는 강도가 확실히 떨어지더군요. 참, [검은 옷의 여인]이란 텔레비전 영화 알아요?

듀나 미스 레몬이 유령으로 나온다는 그 영화?

파프리카 네, 그 영화도 정말 무섭게 봤어요.

듀나 미스 레몬이 유령으로 나오는데?

파프리카 나중에 한 번 봐요.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게 될테니까. 그런데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죠?

듀나 [블레어 위치]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나요? 우린 왜 이 영화에 대한 의견이 이렇게 엇갈리는지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지요.

파프리카 그렇구나. 그런데 그 쪽 의견이...

듀나 다시 정리하죠. 전 [블레어 위치]를 비난하거나 옹호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엉뚱한 포인트를 잡고 있다고 했어요. 지나치게 마케팅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죠. 양쪽 논리는 모두 같아요. [블레어 위치]를 재미있게 본 사람들은 웹사이트나 [블레어 위치의 저주]와 같은 홍보용 매체 때문에 [블레어 위치] 전설에 푹 빠진 사람들이며, 따분해하는 사람들은 그런 정보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파프리카 그럼 그렇지 않다는 건가요?

듀나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아요.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 부수적인 이유는 될 겁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요. [블레어 위치]를 지루하게 본 사람들은 [블레어 위치]가 재미없었기 때문에 지루했던 거죠. 정보랑 별 상관 없어요.

파프리카 왠지 시시하게 들리는 답이네요.

듀나 그렇지가 않아요! 사람들은 여러가지 다양한 대상을 다양한 이유와 방식으로 두려워하지요. 모든 사람들이 같은 걸 무서워하지는 않아요. 그 때문에 다양한 공포 영화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거죠.

파프리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두려워하는 것도 많아요. 예를 들어 우린 모두 신체 손상과 고통을 두려워하죠. 많은 슬래셔 무비들은 좋아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사람 모두에게 강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듀나 네, 하지만 세상엔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음식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리고 그렇다면 오히려 재미가 없지 않겠어요?

그리고 모든 음식이 처음부터 맛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탕이나 햄버거처럼 쉽게 맛을 익힐 수 있는 음식도 있지만 캐비어나 포도주처럼 맛에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걸리고 또 진가를 느끼기 위해 미묘한 미감이 필요한 음식도 있습니다.

공포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더 설명하기 위해서는 사전이 필요한 것 같군요. '무섭다'와 비슷한 방식으로 쓰여지는 말들을 열거해보기로 하죠. '두렵다', '으스스하다', '섬뜩하다', '소름끼친다...' 이 모두는 조금씩 다른 의미입니다. 우리가 대충 '무섭다'로 통일하고 마는 감정들은 훨씬 미묘하고 세분화되어 있지요.

아까의 비유를 연장한다면, 슬래셔 무비는 공포 영화의 햄버거입니다. 모두에게 영향력을 끼치지요. 하지만 어떤 공포 영화들은 보다 미묘합니다. 그런 영화들은 섬세한 공포의 미각을 갖춘 관객들을 위한 것들이지요.

파프리카 흠, 지금 [블레어 위치]를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공포 영화 관객들의 수준을 나누고 있는 건가요?

듀나 아뇨. 다시 음식 비유를 써먹겠어요. 포도주를 감식하려면 정교한 미감이 필요하지만, 모든 정교한 미감을 가진 사람들이 포도주를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블레어 위치]가 재미없다면 그건 그 사람 취향에 맞지 않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일단 그 영화의 영역에 들어가면 미묘한 미각이 동원되어야 하죠.

세상엔 그런 은밀한 영화들이 많습니다. 제가 자주 예로 드는 발 루튼의 영화들이 그렇지요.

파프리카 발 루튼의 영화를 무섭게 보나요?

듀나 아뇨. '무섭'지는 않아요. 흠, 적당한 단어를 찾기가 쉽지 않군요. 영어 단어를 써도 된다면 'eerie'하다고 하겠어요. 전 루튼의 영화가 은밀하게 'eerie'하다고 생각합니다. 루튼이 다루는 것이 직접적인 신체 손상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야수성이나 자기 파멸적인 속성과 같은 음침하고 추상적인 요소들이기 때문이죠. 루튼이 그렇게 소극적이고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했던 것도, 그것이 모든 공포영화에 맞는 방법이어서가 아니라 바로 루튼 영화의 은밀함에 맞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속삭이는 듯한 불길함은 노골적인 신체 손상보다 저한테는 더 잘 먹힙니다. 예를 들어 저는 [13일의 금요일]보다 [행잉록에서의 소풍]이 더 무섭습니다.

파프리카 그렇다고 '햄버거 공포 영화'의 가치를 무시할 수는 없지요.

듀나 물론 그렇지요. 전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미묘함이 꼭 단순함보다 늘 나으라는 법도 없고요. 늘 하는 말이지만, 중요한 것은 '다양성'이지 '우월성'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둘을 착각하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미각의 다양성을 무시한 결과의 부정적인 요소들은 곳곳에 보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얀 드 봉의 [더 헌팅]이지요. 와이즈의 오리지널 [더 헌팅]이 가졌던 속삭이는 듯한 불길함을 무시하고 노골적인 싼 느낌을 동원한 결과 영화는 아주 뻔해졌으며 양쪽 다 만족시킬 수 없었으니까요.

유감스럽게도 관객들의 취향은 점점 좁아지고 있는 중입니다. [식스 센스]의 예가 있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 영화가 성공한 것은 공포 때문이 아니라 잘 짜여진 드라마와 반전 때문이라고 말하겠어요. [식스 센스]는 어떤 의미로나 그렇게 '무서운' 영화는 아니었으니까요.

다양성의 결여는 모두에게 손해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호러 영화 팬들이 나서야지요. 자신만의 취향을 개발하고 그 취향을 위한 감각을 개발하는 것은 바로 수용자들이 우선적으로 나서서 해야 할 일입니다. (99/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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