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몽〉은 뭐… 이제 와서 말해 뭐하나 싶을 정도로 유명한 영화죠. 일본 영화사의 거목, 아니, 산맥인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대표작이고, 1951년 제3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1952년 제2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면서 그를 서구 영화계에 알렸을 뿐만 아니라 일본 영화계 전체를 서구에 알리는 계기가 된 작품입니다. 비록 당시 일본 영화계에서는 왜 하필이면 별로 일본적이지 않은 쿠로사와가 받게 되었단 말인가, 하면서 한탄하는 분위기가 대세였다고 합니다만. (여담이지만, 쿠로사와의 영화가 서구적,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할리우드스럽다는 주장은 지금까지도 굳건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견해 중 하나인데요, 그냥 그런가 보다, 를 넘어서서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면밀히 살펴보고 싶으신 분들께는 스티븐 프린스의 쿠로사와 연구서 『전사의 카메라: 쿠로사와 아키라의 영화』(Warrior's Camera: The Cinema of Akira Kurosawa)를 권하고 싶습니다. 프린스는 쿠로사와의 영화 양식이 얼마나 고전기 할리우드의 규범과 다른지, 그리고 그의 영화가 얼마나 많은 부분 일본의 문화적 전통 하에 놓여 있는지를 주의 깊게 다룹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여러 증인들의 서로 다른 증언을 보여줌으로써 인식 및 진실의 주관성을 제시하는 영화의 이야기는 “라쇼몽 효과”라는 표현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으며 이후 많은 영화에 영향을 미치면서 사실상 하나의 작은 장르가 되기도 합니다. 최근 영화로는 〈영웅〉(英雄, 2002)이나 〈조망점〉(Vantage Point, 2008) 같은 예가 떠오르는군요.

또한 〈라쇼몽〉은 고전영화를 찾아보는 영화팬들을 넘어서서 보다 광범위한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를테면 대학교의 학부생 대상 교양강의를 살펴봐도 〈라쇼몽〉을 참고자료로 하는 경우를 심심찮게 만날 수가 있어요. 법학과나 철학과에서 그러는 건 그렇다 치고, 제 주변 경험자의 증언에 따르면 서양사학과에서 주관하는 “역사와 영화” 같은 두루뭉술한 제목의 교양강의에서조차 이 영화를 보여주었다고 하더군요. 어느 쪽이든 간에 대체로 인식 혹은 진실의 주관성이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영화를 끌어오는 경우였다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해보면 특히 웬만한 인문사회학과에서는 〈라쇼몽〉을 상영할 만한 핑계 찾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관찰자 자신의 주관성으로 인한 왜곡과 한계를 인지하는 건 웬만한 학문 분야에서는 기본으로 갖춰야 할 태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인기’가 과연 〈라쇼몽〉에게 좋은 일이었을까요? 지나치게 많이 소개되고 많이 언급되는 영화일수록 영화 자체보다는 그것이 낳은 개념을 통해서만 인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거꾸로 영화 전체의 의미가 한두 가지 개념이나 주제로 축소되거나 심지어 왜곡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찰스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Modern Times, 1936)를 이야기하면 이제는 ‘현대산업사회 안에서 기계화된 노동자’ 외에는 다른 논의가 좀처럼 나오질 않습니다. 세르지오 레오네나 샘 페킨파의 서부극은 무조건 착한 놈은 착하고 나쁜 놈은 나쁜 옛날 서부극의 단순한 흑백구도를 뒤엎고 ‘진짜 서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들 말하고 맙니다. 어떤 영화는 제대로 평가받기도 전에 이런 한두 가지 논점 때문에 사장당하기도 합니다. 멀리는 영화를 보지도 않은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이 신성모독 혐의를 뒤집어씌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 1988)이 생각나고, 가깝게는 친일 혐의로 날개 꺾인 〈청연〉(2005)이 떠오릅니다. 다행히 그처럼 화석화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괴물〉(2006)이 한동안 ‘반미’ 소리만 들었던 걸 떠올려보세요. 자기 머리로 직접 생각하지 않는 감상자들이 낳는 폐해는 수없이 많습니다.

역사의 구석에 묻힌 뒤 재평가를 기다리는 영화라고는 할 수 없지만, 〈라쇼몽〉도 그리 속편한 처지는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인식/진실의 주관성’이라는 너무나도 근사한 표현이 이 영화에 대한 능동적인 평가를 가로막곤 합니다. 관찰/경험 주체의 주관성에 따라서 대상은 다른 모습으로 인지된다는 이야기는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철학적으로 심오한 척 거들먹거리기 좋다는 점에서 실로 유혹적이며, 많은 사람들이 그 유혹이 유혹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로 쉽게 그런 해석에 머리를 내맡깁니다. 만인의 친구 위키피디아의 도움을 빌려보았더니 ‘라쇼몽 효과’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제공되더군요. “The Rashomon effect is the effect of the subjectivity of perception on recollection, by which observers of an event are able to produce substantially different but equally plausible accounts of it.” 즉, 라쇼몽 효과란 어떤 사건을 회고함에 있어 인식의 주관성이 빚어내는 효과로, 해당 사건의 관찰자들은 그 사건에 대해 실질적으로는 제각기 다르지만 모두 그럴듯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표현 자체가 영화에서 파생된 것이니 만큼 영화가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간주해도 괜찮겠지요. 그러나 〈라쇼몽〉에서 하나의 사건을 둘러싸고 제시되는 여러 가지의 증언이 과연 관객으로 하여금 그러한 인식의 주관성에 대해 생각하게 하나요? 혹은, 이 영화는 그것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도적, 여인, 사무라이의 증언은 종종 세부 사항이 너무나도 달라서 서로의 증언이 지니는 신빙성을 훼손하는 지경까지 이릅니다. 즉, “equally plausible”하지 못해요. 이를테면 도적의 이야기에서 도적은 사무라이를 직접 풀어준 뒤 결투를 벌여 그를 죽입니다. 하지만 여인의 이야기에서 도적은 사무라이를 풀어주기는커녕 그녀를 범한 뒤 그냥 사라져 버리고, 본격적인 갈등은 여인과 사무라이 사이에서 벌어집니다. 누가 누구를 왜 죽였는지, 혹은 어떻게 죽였는지에 대한 세부적인 기억은 인식의 주관 때문에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사흘 전에 일어난 살인사건을 둘러싼 증언에서 현장에 있었던 등장인물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고 저마다 내가 피해자를 죽였다는 주장을 편다면, 그러한 증언을 듣는 관찰자는 인식의 주관성에 대해서 생각하기보다는 이 중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물론 심리학적으로 따져본다면 인간에게 그 정도로 큰 기억의 왜곡이 벌어질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라쇼몽〉은 자신을 속이고 정당화할 정도로 강력한 개인의 강박을 탐구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영화는 오히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원작에는 없었던 액자 구조까지 도입하면서 각 증언의 진실성과 거리를 두면서 때로는 등장인물로 하여금 직접 “그 증언은 거짓말이야.”라고 말하게 만듭니다. 또 아마 성실한 추리소설 독자들이라면 영화 속의 몇몇 증언들이 중요한 물증의 행방에 대해 모순된 설명을 내놓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자연히 증인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될 겁니다. 인식의 주관성이라는 주제는 동일한 사건을 둘러싼 여러 인식 주체가 저마다 자신의 인식이 진실임을 확신하고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반면 이 영화는 각각의 증언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을 남겨 놓아 관객으로 하여금 각 증언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들고, 따라서 증인 중 누군가는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있으리라 추측하게 합니다. 발 루튼이 40년대에 만든 공포영화들이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판의 미로〉(El laberinto del fauno, 2006), 혹은 조 롸이트 감독의 〈속죄〉(Atonement, 2007) 앞부분을 〈라쇼몽〉과 비교해 보시길. 앞의 영화들에서는 물리적으로 확정된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지만 그 의미(혹은 양태)가 관찰자들의 세계관에 따라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됩니다. 두 세계관이 서로를 인정할 수는 없겠지만 관객이 보기에는 어느 쪽을 택해도 벌어진 사건 자체가 왜곡되지는 않습니다. 이와는 달리 〈라쇼몽〉은 증언에 따라 사건 자체의 내용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인식의 주관성을 운운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애가 야자 빼먹고 PC방 갔다는 사실이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 “아니에요, 저 그때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었어요.”라는 변명을 듣는다고 해서 ‘아, 저 아이가 인식하기에는 교실이 PC방처럼 보이고 스타크래프트가 개념원리처럼 보일 테니까 저렇게 말하는 것도 나름의 진실이겠구나.’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더구나 〈라쇼몽〉은 원작에는 없었던 증언을 하나 더 추가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 증언도 완전하게 믿을 만한 것은 아닌 것으로 밝혀지지만, 그렇더라도 살인사건에 얽힌 세 등장인물과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별개의 관찰자가 앞의 모든 증언을 부정한 뒤 마지막에 내놓는 증언이라는 점에서 좀 더 믿고 싶어지는 데가 있습니다. 더구나 쿠로사와는 앞의 세 증언을 재현할 때는 배경 음악과 배우의 연기를 통해 고도로 양식화된 스타일을 보여주지만 이 마지막 증언은 배경 음악 없이, 등장인물들의 동선이 구질구질하고 어지럽게 얽히는 꼴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쪽이 보다 ‘사실적’으로 느껴져요. 게다가, 사후해석이기는 하지만, 마지막 증언을 한 사람이 결국 영화의 끝에 가면 자신의 거짓말을 반성하고 종국에는 도덕적으로 선한 선택을 내리기 때문에, 그의 증언에 의지하기는 더더욱 쉬워집니다. 〈라쇼몽〉을 다룬 많은 글들이 ‘결국 마지막 증인의 증언도 거짓으로 밝혀진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지만, 만약 누가 제게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겠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다들 거짓말을 했으니 알 수 없다고 대답하기 보다는 마지막 증언을 토대로 하되 거기에 끝에 가서 밝혀지는 사실 하나를 첨부한 다음 ‘아마 이거겠죠.’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결국 〈라쇼몽〉에서 부각되는 주제는 ‘객관적 진실은 인식 주체의 주관에 따라 다르게 인지된다.’는 인식론적 깨달음이라기보다는 모든 사람이 한 가지 사건을 두고 빤히 보이는 여러 거짓말을 늘어놓을 때, 그 거짓말의 이면에서 아른거리는 이기적인 동기의 추악함과 그에 대한 절망입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쿠로사와가 만들었던 〈어느 멋진 일요일〉(素晴らしき日曜日, 1947), 〈주정뱅이 천사〉(醉いどれ天使, 1948), 〈들개〉(野良犬, 1949), 〈살다〉(生きる, 1952)와 같은 작품들에서 일관적으로 (하지만 작품마다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는 주제이지요. 그냥 ‘아, 요즘엔 다들 자기만 잘 살자고 남들 속여먹는군, 말세야.’로 말하고 말 수준은 아닙니다. 쿠로사와는 이 시기뿐만 아니라 영화 경력 전체에 걸쳐 일본의 전근대적, 봉건적인 인습, 즉 사회적 관습과 규율에 따라 개인을 옭아매고 희생하는 성향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보여 왔는데, 이것이 〈라쇼몽〉에도 강력하게 반영되고 있습니다. 도적, 여인, 사무라이의 증언 저변에 깔린 동기를 보면 누구도 자신의 물질적 이득을 위해서는 증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사회적 위신을 위해 증언합니다. 도적은 자신을 비록 도적일지언정 정정당당하고 겁 없는 사나이로 묘사하고, 여인은 스스로를 정절을 빼앗겨 슬퍼하는 가운데 그로 인해 남편에게도 버림받은 가련한 약자로 그리고 있으며, 사무라이는 그런 여인을 간통을 저지르고 부화뇌동한 창녀 취급하면서 자신은 불명예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진정한 무사인양 제시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증언에서는 이 세 인물이 모두 생존과 체면이라는 문제에 목숨을 걸고 벌벌 떨며 서로를 헐뜯는 야비한 사람들로 표현되면서 방점을 찍습니다.

반면 이러한 사건(혹은 아쿠타가와의 원작)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영화화 과정에서 첨가된) 또 다른 관찰자들의 경우에는 보다 물질적인 욕망이 우선합니다. 네 번째 증인의 거짓은 증거를 빼돌려 돈을 벌고자 하는 욕심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또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공간인 라쇼몽의 목재를 잡아 뜯어서 불을 피우는 행위가 강조되고 있다는 점도 언급해 둘만합니다.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사건을 둘러싼 반응은 말할 것도 없고요. 「덤불 숲」(藪の中)이 원작임에도 불구하고(오프닝 크레딧에서는 「덤불 숲」만 언급됩니다.) 굳이 주인에게 버림받은 뒤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채 라쇼몽에서 비를 피하던 하인이 굶어죽는 것과 악행을 저지르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용을 담은 단편 「라쇼몽」(羅生門)까지 끌고 들어와서 영화를 만든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주제적인 측면에서 쿠로사와의 〈라쇼몽〉은 아쿠타가와의 「덤불 숲」에 담긴 전근대적 가치관에 대한 비판을 강화하는 동시에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현대인(전후 일본의 50년대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의 물질에 기반한 부도덕성, 염치없음에 대한 비판을 첨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쿠로사와가 대게 그러하듯 그런 세상일수록, 혹은 그런 세상이기에 더욱 올바른 일을 행하고자 하는 개인의 의지가 강조되고 있습니다만 〈주정뱅이 천사〉, 〈들개〉, 〈살다〉와 같은 영화에서처럼 개인의 선의지와 세상의 추악함은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압도하는 결말로 치닫기보다는 평형 상태를 이루면서 관객 자신의 선택을 촉구하는 방향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주제는 그렇다 치고, 사실 〈라쇼몽〉을 되풀이해서 보게 만드는 진짜 힘은 그 스타일에 있습니다. 쿠로사와는 이전에도 〈스가타 산시로〉(姿三四郎, 1943), 〈속 스가타 산시로〉(續 姿三四郎, 1945),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내들〉(虎の尾を踏む男達, 1945), 〈조용한 결투〉(静かなる決闘, 1949)를 통해 문학 작품의 영화화를 시도한 바 있지만 이중 어느 작품도 〈라쇼몽〉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아쿠타가와의 원작을 완전히 해체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액자 구조를 덮어씌우고 쿠로사와적 주제를 더 전면적으로 드러낸 것을 제외하면 원작의 이야기는 고스란히 살아있습니다. 다만 쿠로사와는 문학이라는 장르와 겨루기라도 하려는 듯 극도로 영화적인 화법을 취합니다. 〈라쇼몽〉은 일종의 법정물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무성영화에 가깝습니다. 특히 영화의 핵심이 되는 네 번의 증언 장면은 일본어를 모르는 관객이 자막을 끄거나 아예 소리를 없애고 보아도 등장인물들의 동기 및 감정을 이해하는 데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 증언/회상 장면 위로 내레이션을 넣거나 회상 사이사이 증인들의 증언하는 모습을 끼워 넣는 연출은, 화면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정보를 대사를 통해 전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기보다는, 영화 전체의 액자 구조를 환기시킴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개개의 이야기에 거리를 두게 하거나 증인의 얼굴과 과거의 사건을 교차하여 그 감정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카메라의 움직임 및 인물의 움직임을 연결하거나 충돌시키며 만들어내는 대위법, 배우들의 다소 과장된(‘자연주의적’ 연기에 비해서) 연기 방식, 하나의 장면 전체를 아우르며 중심 멜로디를 반복/고조시켜가는 배경 음악의 사용 모두 영화가 멈춰 서서 말하기보다는 끊임없이 흘러갈 수 있게끔 시청각적인 리듬을 만드는 데에 복무하고 있고요. 문학작품을 각색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쇼몽〉은 문학적이라기보다는 음악적입니다.

특히 연기에 대해서는 좀 더 덧붙이고 싶습니다. 처음에 이 영화 속 미후네 토시로를 비롯한 연기자들의 연기를 본 서구 영화인들이 ‘일본인들은 저렇게 과장되게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가’하는 의문을 품기도 했다는데, (로저 에버트도 〈라쇼몽〉을 ‘위대한 영화’ 목록에 올려놓으면서 처음에 그런 생각을 했노라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는 영화에 소리가 등장하면서 영화 예술 전체가 점점 더 ‘사실성’을 강조하고, 연기 방식도 메소드 연기를 비롯하여 ‘자연주의적’인 연기를 지향해 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빠르게 무성영화의 유산, 혹은 ‘활동사진’으로서의 영화가 지닌 매력을 잊어버렸는지를 보여주는 예처럼 느껴집니다. 확실히 이 영화의 연기자들이 선보이는 연기는 눈썹 하나, 주름 하나를 꿈틀거리면서 매순간 내면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복합적인 감정을 다양한 각도로 내비치는 식의 연기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하나의 감정(그런데 이런 표현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요?)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언젠가 류승완 감독이 사용한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외면 연기’에 가깝지요. 얼굴 클로즈업 쇼트 하나씩을 떼어내서 밑에다가 ‘당황’, ‘분노’, ‘두려움’ 등등의 설명을 달아도 무방한 그런 연기 말입니다. 하지만 〈라쇼몽〉이 요구하는 연기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여인의 증언에서, 도적이 떠난 뒤 사무라이는 정절을 잃은 여인을 경멸하며 죽일 가치도 없다는 듯 대합니다. 영화는 이를 구구절절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무라이를 연기한 모리 마사유키가 그냥 차가운 경멸이 담긴 얼굴을 만들 뿐입니다. 흐느껴 울며 사무라이에게 매달리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경악하는 여인의 얼굴에서 컷하여 사무라이의 경멸 어린 얼굴 클로즈업으로 화면이 옮겨가는 순간, 관객은 아무런 설명 없이도 그의 감정과 그에 대한 여인의 충격을 체감할 수 있고, 이후 벌어지는 여인의 반응에 대한 이해는 그 한순간의 클로즈업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매순간순간의 감정이 명확히 드러나는 이야기가 전체 서사 구조 속에서 겹겹이 쌓이면서, 인물의 복합성을 서서히 드러냅니다. 〈라쇼몽〉에는 미후네 토시로나 시무라 타카시처럼 쿠로사와와 여러 번 작업한 대배우들이 출연하고 있습니다만 막상 이 영화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기는 배우는 여인 역을 맡은 쿄 마치코인데, 이것은 단순히 그녀가 연기를 가장 섬세하게 잘 해냈기 때문이 아니라, 인물의 깊이를 서사 구조에 의지해서 끌어내는 영화의 성격 때문입니다. 이미 언급한 바대로, 도적과 여인, 사무라이 사이의 갈등과 증언은 사회적 위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벌어지며, 이때의 사회적 위신이란 담대하고 명예로운 사나이와 순결하고 섬약한 여인을 기반으로 하는 고래의 가치관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관은 역설적으로 여인에게 가장 다양한 역할을 제공해줍니다. 도적과 사무라이가 나약한 내면을 감추고 사나이처럼 자기 포장하기애만 급급한 반면, 여인은 칼을 휘두르며 스스로를 보호할 줄 알고 또 순간의 열정에 몸을 내맡기기도 하는 강인한 인물이 되었다가, 정절을 잃고 흐느끼는 가녀린 인물로 변하기도 하고, 체면 살리기에 눈이 멀어 남편을 배신하는 악녀가 되는가 하면, 허세만 내세우는 사내들을 비웃는 비판자이자 모략꾼의 모습도 내비칩니다. 이런 면에서 아마 〈라쇼몽〉은 평생 무성(無性)적인 영화를 만든 쿠로사와의 전 경력 중에서 가장 여성주의적인 영화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표면상 여성이 주인공이지만 사실 주인공이 남자든 여자든 별 상관이 없는 〈내 청춘에 후회는 없다〉(わが青春に悔なし, 1946) 같은 영화와 비교해보세요.

또, 이 영화에서 배우들이 활발한 카메라와 과감한 편집만큼이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에는 영화적 테크닉이 현란해질수록 배우들이 육체를 이용해 연기를 펼칠 공간이 줄어드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만(이를테면 많은 사람들이 나름 괜찮았다고들 했던 〈G. I. 조: 코브라 출현〉(G. I. Joe: The Rise of Cobra, 2009)에서 이병헌의 연기를 봅시다. 그 영화는 지나치게 얼굴 클로즈업에만 의존하고 있으며 그나마 쇼트의 지속 시간이 너무 짧아서 연기를 선보일 공간이 거의 없습니다. 만화 같은 캐릭터라 어차피 연기할 것도 없다고요? 캐릭터가 얼마나 평면적인가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007 황금 총을 든 사나이〉(The Man with the Golden Gun, 1974)에서 크리스토퍼 리가 연기한 스카라망가도 따분할 정도로 평면적인 인물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 영화에서 리는 자신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손동작이나 걸음걸이 등 몸의 움직임을 통해서 이 젖꼭지 세 개 달린 과대망상가 악당을 근사하게 표현해 냅니다. 이건 이병헌과 크리스토퍼 리의 역량 차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담아내는 영화의 방식으로 인한 차이입니다.) 쿠로사와의 영화에서 배우들은 표정이나 대사처리 이상으로 화면의 어디에 서 있고 어느 방향을 바라보고 어느 쪽으로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신경을 써야하며, 그러한 움직임 자체가 인물을 표현해줍니다. 〈라쇼몽〉에서 이런 육체 연출의 가장 큰 수혜자는 물론 미후네 토시로입니다. 애초에 쿠로사와가 미후네를 그토록 아꼈던 이유가 바로 그 격렬하고 열정적인 움직임 때문이었다는데, 〈라쇼몽〉에서 그가 연기한 도적은 아마 미후네가 평생 연기한 온갖 배역 중에서도 특히 격렬한 인물일 것입니다. 몸을 긁어대고, 날벌레를 후려치고, 여인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비탈을 내달리는 동작 하나하나가 그의 험상궂은 얼굴 이상으로 도적의 성격을 제시합니다. 그 중에서도 도적과 사무라이의 결투 장면들은 경이롭습니다. 카메라는 두 사람을 멀찍이서 잡기보다는 간신히 화면 안에 다 들어갈 정도의 거리에서만 잡고,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활발히 이동합니다. 그러면서도 용케 항상 엄정한 구도를 유지하지요. 복잡한 감정을 얼굴을 통해 드러내는 연기에 비해 이쪽에서 저쪽으로 걸어가는 연기는 훨씬 쉬울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미후네와 모리 마사유키 두 사람이 그토록 빠르고 격렬하게 움직이고, 바로 그 움직임을 통해 캐릭터를 드러내는 ‘연기’를 펼치고, 그러면서도 타이밍을 잃지 않은 채 복잡한 동선을 따라가는 모습은 기가 막힙니다.

많은 쿠로사와 영화가 그렇듯, 〈라쇼몽〉의 대사는 직설적이고, 종종 주제를 직접 토로하는 듯합니다. 관객에 따라서 이를 교훈을 주고 싶어 안달이 난 노인네의 기우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1950년 당시 쿠로사와는 마흔 밖에 되지 않았으니 노인네라고 부르기는 좀 그렇습니다만. 대사를 통해 직접 정보를 전달하거나 주제를 발설하는 영화는 그런 것을 영화적으로 충분히 표현하지 못해서 언어에 의존한다는 평가를 받기 쉽습니다. 혹은 〈라쇼몽〉처럼 이미 영화적으로 충분히 표현을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또 말로 그것을 한 번 더 되풀이한다면 중언부언하는 영화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쿠로사와 영화가 다루는 영역은 대체로 한 등장인물의 인식 범위보다 더 넓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사건에 대해 의견을 정리하고, 그것을 토대로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해 판단을 내리지만 그것이 곧 영화 전체의 태도를 다 대변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고자 하는 최후의 결의는 영화가 제공하는 압도적인 절망감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고, 한 인물이 선의지를 실천하는 모습을 볼 때 관객은 역으로 그것의 어려움을 되새기게 됩니다. 층층이 쌓인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물든 다양한 비루함, 염치없음, 악의를 보아왔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마음을 돌려 선한 일을 행한다고 해서 갑작스레 ‘그래, 저런 사람들이 있으니 인간은 다 잘 될 거야.’식 낙관주의로 빠지는 관객은 없을 것입니다. 〈라쇼몽〉은 다만 세상의 풍경과, 그 안에서 선택을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들은 맹목적인 프로파간다의 선봉장들이 아니라, 사건의 의미를 분석하고, 망설이다가, 결단을 내리는, 삶의 의미 앞에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아마 〈라쇼몽〉이 관객을 향해 재촉하는 것이 있다면 관객 또한 그처럼 성실해지는 것, 함께 생각하고, 결단을 내려주는 것뿐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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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3 [영화] 고지라 마이너스 원 ゴジラ-1.0 (2023) [2] Q 2023.12.10 812
772 [드라마] 악귀 감동 2023.10.29 540
771 [드라마] 싸인 감동 2023.09.05 497
770 [영화] 독친 Toxic Parents (2023)- 이공삼오 2035 (2023) <부천영화제> [2] Q 2023.08.31 691
769 [드라마] 달의연인-보보경심 려 [2] 감동 2023.08.28 503
768 [영화] 인피니티 풀 Infinity Pool (2023) <부천영화제> (약도의 스포일러 있음) Q 2023.07.22 878
767 [영화] 네버 파인드 You'll Never Find Me, 아파트 N동 Bldg.N <부천영화제> Q 2023.07.09 636
766 [영화] 이블 데드 라이즈 Evil Dead Rise (2023) <부천영화제> [2] Q 2023.07.05 709
765 [영화] 드림 스캐너 Come True (2020) Q 2023.05.26 662
764 [영화] 2022년 최고의 블루 레이/4K UHD 블루레이 스무편 [2] Q 2023.03.05 1513
763 [드라마] 펜트하우스 감동 2023.01.13 744
762 [영화] 미래의 범죄 Crimes of the Future (2022) [3] Q 2022.12.27 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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