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이야기했지만 애거서 크리스티는 그렇게까지 영화화하기 좋은 작가가 아닙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검찰측 증인]처럼 훌륭한 영화로 만들어진 원작이 있긴 하지만 그것들은 크리스티의 작품 중엔 좀 예외적이죠. 크리스티 탐정들은 몸 쓰는 걸 좋아하지 않고 수사 대부분은 용의자와의 문답으로 진행되잖아요. 시각적으로 단조로울 수밖에 없죠.

[오리엔트 특급 살인]도 그렇게까지 영화화하기 쉬운 소설은 아닙니다. 크리스티 소설 중에서도 어려운 쪽에 속한다고 할 수 있어요. 다른 소설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수사 과정에 숨통을 불어넣어 줄 로맨스나 유머를 넣을 공간이 존재하지만 눈사태에 길이 막힌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서는 그게 없습니다. 오로지 순수한 수사 과정만 남아있지요. 물론 책은 정말 재미있어요. 하지만 그건 놀라운 답과 그에 이르는 멋진 추론 과정을 가진 굉장히 재미있는 퍼즐로서 그렇습니다. 드라마로서는... 글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원작은 꾸준히 각색되고 있습니다. 내용보다는 책의 유명세와 오리엔트 특급이라는 이국적이고 사치스러운 배경, 온갖 스타 배우들을 총동원할 수 있는 설정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요.

케네스 브래나의 이번 영화는 심지어 이전에 나온 시드니 루멧의 영화보다 훨씬 호사스러운 영화입니다. 캐스팅의 화려함은 조금 부족할지 모르지만 온갖 이국적인 풍광들을 담은 70밀리 대작이죠. 하지만 그래도 문제점은 여전히 남습니다. 원작의 이야기를 바꿀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영화를 보면 각본가의 고민이 보입니다. 따뜻한 열차 안에서 통통하고 몸 쓰기 싫어하는 벨기에 탐정이 13명의 용의자를 심문하는 이야기에 어떻게든 액션을 넣고 배경을 바꾸어주려고 노력하는 티가 난다는 거죠. 용의자들은 크리스티의 원작이나 루멧의 영화에서보다 훨씬 폭력적인 사람들입니다. 누군가는 총을 쏘고 누군가는 달아나다 잡히고 누군가는 칼에 찔립니다. 다 원작에는 없었던 일이죠.

가장 큰 변화는 명탐정 프와로에게 주어집니다. 이 영화에서 브래나가 연기하는 네 갈래 콧수염을 기른 프와로는 실제 프와로보다 훨씬 액션 주인공입니다. 추운 데에도 잘 돌아다니고. 달아나는 용의자를 따라가 제압하고. 총기도 단번에 알아보고. 좀 셜록 홈즈화 되었어요, 도입부에 나오는 사건을 푸는 과정도 프와로 스타일보다는 홈즈 스타일에 가깝습니다. 오랜 크리스티 독자로서 전 이게 좀 불만이에요.

그래도 전체적인 그림을 보면 꽤 잘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루멧의 영화와도 다르고 이 정도면 크리스티 독자가 아닌 일반 관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는 되고 브래나도 자신의 프와로 역할을 즐기는 것 같고. 배우들도 잘 썼어요. 애버스놋을 흑인으로 만든 설정도 걱정했던 것보다 자연스러웠고 미셸 파이퍼의 허바드 부인 캐릭터 같은 건 루멧 영화의 로렌 바콜 버전보다 더 좋아요 . 끝없는 타협의 산물일 수밖에 없는 영화가 여기까지 왔다면 괜찮은 일을 한 거죠. 어차피 완벽함은 도달할 수 없는 목표였어요. (17/12/02)

★★★

기타등등
브래나의 다음 프와로 영화는 [나일 강의 죽음]이 될 거라고 하는군요. 영화 끝에 암시가 나오긴 합니다만.


감독: Kenneth Branagh, 배우: Kenneth Branagh, Daisy Ridley, Leslie Odom Jr., Tom Bateman, Manuel Garcia-Rulfo, Penélope Cruz, Josh Gad, Johnny Depp, Derek Jacobi, Sergei Polunin, Lucy Boynton, Marwan Kenzari, Michelle Pfeiffer, Judi Dench, Olivia Colman, Willem Dafoe

IMDb http://www.imdb.com/title/tt3402236/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54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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