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2017)

2017.12.14 23:55

DJUNA 조회 수:11908


장준환의 [1987]은 익숙한 조폭영화처럼 시작합니다. 자기네들만의 비틀린 가치관을 가진 수상쩍고 폭력적인 남자들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단지 이 조폭들은 독재정권의 경찰이고 1987년 1월 14일, 그들은 대학생 한 명을 고문하다 죽였지요.

그 뒤에도 영화는 여전히 조폭영화 같습니다. 조폭스러운 남자가 하나 더 늘었어요. 이 남자는 당직검사이고 뜬금없이 시신 화장을 요청하는 경찰들이 영 재수가 없으며 얘들과 엮였다가 똥물 뒤집어 쓰는 것도 싫습니다. 여기서 조폭스러운 기싸움이 시작되는데, 검사에겐 무기가 하나 있습니다. 법대로 하는 거요,

이 조폭영화스러움은 그 뒤로 꽤 오래갑니다. 다양한 음영의 회색 남자들이 욕을 퍼붓고 폭력을 휘두르고 삿대질을 합니다. 모두 어느 정도 세력 싸움이죠. 하지만 일반적인 조폭영화와는 달리 이들의 암묵적인 규칙과 가치관은 이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정보가 바깥 세계로 흘러나오면서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남아있던 상식과 정의의 씨앗이 싹을 틔우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과 일치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최환이나 박처원과 같은 핵심인물들의 이름을 은근슬쩍 감추고 있는데, 이들이 어느 정도 허구화된 인물이란 뜻이겠죠. 다큐멘터리처럼 사실을 전달하는 대신 사실에 바탕을 둔 잘 흐르는 드라마를 만들려고 한 느낌이 강합니다. 사실보다는 메시지가 더 중요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하고.

소수의 남자들이 독점하고 있던 정보들이 세상으로 흘러나오면 보다 적극적인 허구가 추가됩니다. 김태리가 연기한 풋내기 대학생 연희는 6월 항쟁에 참여한 학생들과 시민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이 인물이 등장하면서 지금까지 구질구질했던 영화가 갑자기 천진난만하고 환해지지만 그게 오래갈 수는 없죠. 아무리 [써니] 나라에서 왔다고 해도 1987년에 대학에 들어온 학생이 현실에서 눈을 돌리기는 어려웠으니까요.

단지 영화는 여기서 무리수를 두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영화를 또다른 사건과 연결하려 하는데, 여기에 연희가 주인공인 청춘로맨스를 연결고리로 쓴 거죠. 이게 여러 가지로 신경 쓰입니다. 일단 비정치적인 여자대학생을 각성시키는 인물이 잘생긴 남자선배라는 게 너무 식상해요. 게다가 연희가 6월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대표로 선정되었다면 로맨스는 이 행동의 의미를 약화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은 최근에 나온 80년대 회고영화들 중 가장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민초'의 전형성에 빠진 캐릭터도 없고 (연희가 좀 위험하긴 했습니다) 고문치사사건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쉽게 정의내려지지 않는 수많은 캐릭터들에 의해 이어달리기처럼 진행되는 각본은 지루함없이 서스펜스가 넘칩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는 비교적 최근에 다시 거리로 나와 역사를 바꾼 사람들의 자부심이 느껴집니다. 영화가 기획되었을 때는 전혀 계획이 없었던 사건이었으니 처음 이들이 생각했던 영화는 지금의 영화와 의미가 많이 달랐겠지요.

단지 386 회고담은 한동안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87년의 대한민국과 2016년의 대한민국은 비슷하면서도 다르죠. 언제까지 80년대의 거울에 매달릴 수는 없어요. 21세기를 그 자체로 볼 때가 되지 않았나요. (17/12/14)

★★★

기타등등
후일담 자막은 아주 짧은데, 길면 우울해질 뻔했습니다. 예를 들어 박종철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박종운은 지금 뭐하고 있나, 담당검사들은 지금 뭐하고 있나, 그렇게 어렵게 쟁취한 첫 직선제 선거 때 이 나라 사람들은 누구를 대통령을 뽑았나. 기타등등 기타등등.


감독: 장준환, 배우: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박희순, 이희준, 박희순, 박경혜, 김의성, 김종수, 오달수, 고창석, 조우진, 문성근, 우현, 여진구, 강동원, 설경구, 다른 제목: 1987: When the Day Comes

IMDb http://www.imdb.com/title/tt6493286/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58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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