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레 & 어머니 글4

2018.06.12 13:38

sublime 조회 수:593

국가적 중대사와 연이은 거대담론에

개인적인 관심도 물론이거니와 신경을 쓰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직업적 연관성으로

흥미롭지만.. 피로도가 쌓이는 것도 사실이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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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글 이후,  <지난 번 글 : 어머니 글2 후기 & 어머니 글3 http://www.djuna.kr/xe/board/13433712>

어머니의 안면근육 문제로 폴라포님께서 말씀주신 덕분에 정확한 진단을 위해 병원에 다녀왔습니다만,

병원에서는 수술도 불가하다고 이야기를 하셔서...

나름 부산에서는 유명한 곳에 다녀왔는데 ...어머니께서 낙심하셨을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담담하시더군요.

마음 편하게 가지고 너무 신경쓰지 않으면서 한번 또 기다려보자. 하시는데 걱정은 걱정입니다..

마음써 주신 분 모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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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대로>


가스 불 위에 얹어 놓은 빨래가 힘차게 끓어 넘친다. 발뒤꿈치를 들고 뛰어갔지만 깔끔하고 착실한 아래층 할머니는 운동은 밖에서 해야지하신다.

이럴 때마다 나는 시골 가서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마당 한 평 없는 칸막이 집마다 구멍구멍 드나드는 도시생활을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밤이면 피자와 치킨을 싣고 빠르게 움직이는 오토바이의 굉음, 위층 아저씨 술 한잔에 계단이 무너질까 두려운 발소리까지도 피하고 싶었다.

 

많은 욕심은 없었다. 비바람만 막을 수 있다면, 벌레만 막을 수 있다면 나는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아들 둘 결혼시키고 퇴직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이라도 다독여 주었다.

 

그 꿈이 이루어지는 2001년 여름쯤,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을 찾아들었을 때, 오랫동안 묵혀 둔 듯 한 땅은 나무가 자라 숲이 되어 경계가 어딘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밭 둘레를 안고 흐르는 작은 개울이 갈대 뿌리를 물고 소곤소곤 흐르는 그 물 하나만 보고 그 자리에서 잔금까지 치러버렸다. 땅은 내가 찾는 게 아니고 땅이 주인을 찾는다는 말이 맞는 듯하다.

누구 눈에도 띄지 않고 나를 기다려 준 땅이 고마웠다. 되도록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작은 농막을 지었다.

조금은 불편한 점이 있어도 소꿉 살이 하듯 물가에 앉아 쌀을 씻고 나물을 씻어 밥을 지었다. 양지바른 곳에 빨랫줄을 걸어 놓으면 백옥같은 빨래가 바람에 펄럭이며 서그덕 서그덕 소리를 한다.

 

다녀가는 친구들이 불편하지 않으냐고 한다. 생각해보면 그 동안 살아오면서 많이도 사고 많이도 버렸다. 이제는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가진 것에만 맞추어 살고 싶다.

무엇 때문에라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디에도 메이고 싶지 않다. 남의 눈도, 보이고 싶은 것도. 이제는 살아온 날보다 남은 날이 적기에 하나하나 버려 가면서 살고 싶다.

닦고 문지르고 하지 않아도 되는 가볍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만 가지고 살아보자는 생각이다.

 

나무들을 뽑아내고 일군 밭 가에 줄지은 산뽕나무 오디 한 주먹 입에 넣으면 입 안에 숨어 있던 혀가 짙은 보라색 물을 들이고 내민다.

으름꽃이 필 때면 그 향이 너무 좋아 하루에도 몇 번씩 넝쿨 울을 친 길 옆에 서서 살며시 눈을 감는다. 이다음 어디를 가든 으름나무 한 그루는 꼭 심어야지 마음속으로 다짐도 해 본다.

까만 점박이 속살을 내밀고 주렁주렁 열릴 때면 다래 넝쿨이 길을 막는다. 하늘 높이 솟은 돌배나무에 바람이 스치면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에 놀란 새들의 날갯짓이 바쁘다.

개울가 맑은 물은 가재들의 놀이터가 되어 작은 돌멩이 하나 들어 올리면 꼬리를 숨기고 뒷걸음친다.

 

그렇게 깨끗하고 조용한 골짜기가 몇 년 사이에 산허리가 잘려 흙살을 드러내더니 한 집, 두 집 들어와 이제는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

골짜기에 내려앉은 달빛에 산고양이 다니던 오솔길도 시멘트를 덧씌워 자동차가 오르내린다. 이슬에 옷이 젖도록 음악을 듣던 마당엔 가로등이 별빛을 숨겨버렸다.

 

이곳을 떠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하루를 부르는 듯 새들이 지저귀고 간밤에 내려앉은 게으른 안개는 산을 못다 오르고 골에 머문다.

소쩍새 밤새워 울어도 좋아 떠날 수가 없다. 가을이 감나무 잎에 주황색으로 색칠한다. 키 큰 나무는 키 큰 대로, 땅에 눌러앉은 야생화는 길옆 그 자리에.

그냥 그대로 두고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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