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넷플릭스에서 연속극 라이프를 봤습니다. 미생을 끝까지 보지 못했던 저는 이 드라마가 미생보다 훨씬 현실적이라고 느꼈어요. 미생처럼 과장된 캐릭터들이 연일 사내 징계위원회에나 회부될 일들을 대기업에서 막장으로 저지르고 다니는데 아무도 말을 안하고, 주변에서 지켜보는 사람들 조차도 항의 한 마디 하지 않는 게 정말 현실적일까 생각이 들었거든요. 끝까지 보지 못한 이유는 속이 천불이 나서예요. 

라이프의 등장인물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어보였습니다. 제가 의사들 사회는 잘 모르지만 배경이 병원이 아니고 일반 회사로 가져온다고 해도 있을 법한 얘기예요. 이동욱 같은 인물이 적어도 한 명 정도는 있겠죠. 모두가 조금씩 비열하지만 또 그들 모두가 완전히 경우없는 사람들은 아닌 정말 평범하고 평범한 사람들로 가득한 곳이요. 그래서,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항공의 사주 갑질 비리가 터져나왔을 때 오히려 더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더랬습니다. 대체 저지경이 될 때까지 노조는 뭘 한거야? 그리고 대체 언제부터 저랬던거야? .. 


2. 한글날을 맞이하여 저도 한글에 대한 발표를 했어요. 특별히 자원해서. 이 분야는 특히 IT쪽을 부각시키면 저희 회사처럼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많은 경우 흥미를 끌기에 좋은 주제이기에 적극 이용해보기로 했지요. 한글은 키보드를 어떻게 입력하는가? 전화기 문자 입력은? 타자기는? 등등의 주제를 미끼로 던진다면요. 문제는 이 발표를 하기위해 저도 공부를 해야했는데 그 과정에서 세종이 얼마나 천재적이었는지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초성', '중성', '종성' 같은 한글을 설명할 때 필요한 용어들을 영어로 옮기기 위해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언어학적 자료를 참고해야 했는데요, 그에 상응하는 언어학적 단어가 그대로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현대 언어학 음운론에서 쓰이는 용어들이죠. 한글이야 원래 구조가 초성, 중성, 종성이니 이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해당 용어의 영어 버전인 'onset','nucleus','coda'는 언어학적 전문용어라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쓰는 단어가 아니죠. 로마자의 사용이 우리말처럼 음절기준으로 적용하는 문자가 아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학에서는 소리의 기준을 음절로, 음절은 각 음소로 분류를 하고 있었습니다. 세종은 15세기에 이미 그것을 정확하게 분석해서 글자를 만들었어요. 심지어 모음으로 시작하는 음절에 음가가 없는 'ㅇ'을 앞자리에 넣는 것과 비슷한 용어가 있었습니다. 'null onset'이라고. 정확하게  null onset은 onset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 (보통 onset은 자음으로 시작하므로) 을 말하지만 어쨌든 세종은  null onset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던 거죠. 그리고 한글은 그 체계위에 만들어진거고요. 


3.  유튜브에 숱한 외국인들의 한국 생활에 대한 비디오들이 돌아다니는데요. 그 중에 한결같이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게 '안전'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안전은 주로 소지품의 안전에 대한 것으로 '내 물건을 훔치려는 사람들이 없다. 얼마나 놀라운 사회인가?' 이런 것인데요. 심지어 카페 테이블에 노트북, 휴대폰, 지갑등을 놔두고 나갔다가 와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다. 오오 개쩌는 한국 사람들이야... 이런 반응이예요. 

물론 한국이 항상 지금처럼 안전했던 것 아니죠. 제가 기억할 수 있는 시대만 해도 한국 소매치기들 기술이 예술이여서 가방 속 주머니를 찢고 지갑을 빼가도 아무런 느낌도 없다고들 했는데요. 

제 생각에 지금과 같은 사회가 된 것은 CCTV의 공로가 크지 않나 싶습니다. 어디나 카메라가 있으니 뭘 훔쳐가도 곧 찾아낼테니 말이죠. 굳이 실패할 일을 수고할 이유가 없죠. 두 번째는 집단에 대한 신뢰감인 것 같아요. 어떻게보면 오지랖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요. 그 오지랖이 명절에 '결혼은 안 하니?' 이런 걸로 나타나면 무지 짜증나고 생판 모르는 낯선 어른이 한 여름에 '아기 감기 걸리겠다. 왜 이렇게 얇게 입혔냐?'할 때도 짜증나는데 카페에 노트북 같은 걸 두고 화장실에 갈 때는 '저렇게 지켜보고 있는 눈이 많은데 설마 뭘 훔치겠어?' 라는 오지랖에 기댄 신뢰가 아닌가 합니다. 뭐 이건 그냥 제 생각일수도 있지만요. 제가 카페에서 소지품을 테이블에 놔 두고 어딜 갔다온다면 그런 생각으로 안심하고 다녀올 것 같거든요. 이 두가지가 아닌 다른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4. 욱일기이야기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일본의 2차대전에 대한 전쟁범죄는 거의 잊혀지고 희석되어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정치인이나 역사학자, 지역전문가들이라면 모를까 일반 사람들의 지식은 거의 전무한 수준입니다. 하지만 원자폭탄의 희생으로 인해 2차대전 최대의 피해자 국가라는 인식은 엄청 강합니다. 당연히 욱일기에 대한 인식도 없고요. 유니온 잭이 팝 컬쳐로 소비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소비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걸 그냥 포기하고 받아들여야할까요? 그게 사실 훨씬 현실적이기는 합니다. 


그렇다면 서구 사회가 2차대전, 특히 태평양 전쟁을 조명할 필요가 있을 때 일본의 군국주의를 상징하는 것으로는 무엇을 사용할까요? 예, 그것도 욱일기입니다. 제가 책을 한권 샀는데 2차대전의 1급 전범들이 어떻게 면죄부를 받고 처벌을 피해나갔는가에 대한 탐사저널리즘 이야기인데요. 책표지가 욱일기로 되어 있습니다. 제 직장동료 중 2차대전때 일본이 호주 본토를 침략했을 때 할아버지가 참전했던 사람이 있는데 신문에 욱일기 휘날리고 들어오는 해상 자위대 군함 사진을 보고 '할아버지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시겠네' 라고 경악을 했습니다. 아는 사람들은 안다는 얘깁니다. 욱일기가 군국주의의 상징이라는걸요. 이럴 때는 우리도 '하나만 해라'고 지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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