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는 밤 - 내게 무해한 사람 중

2019.07.10 13:52

Sonny 조회 수:681

소설의 시간인 이 자매가 재회한 시간은 끽해야 하룻밤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둘이 함께 보내는 현재진행형 시간은 말미에나 조금 나옵니다. 만나기 전까지, 만나고 나서 잠드는 순간까지 윤희는 계속해서 주희와의 과거를 곱씹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윤희는 주희와 함께 있는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만나고나서야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전까지는 그리워하지도 그리워 할 이유도 알지 못한 채로 살아왔다는 것처럼요. 가족이라는 혈연관계도 늘 생동하는 애정을 보장하지는 않는 거겠죠.

왜 그랬을까. 윤희의 회상 대부분은 동생 주희에게 따뜻하지 못했던 자신을 자책하는 내용입니다. 임신부터 했다던 동생을 창피하게 여기고 식당에서 크게 싸웠던 기억이 수면 위로 가장 먼저 올라옵니다. 자신의 가치관과 너무 다른 삶을 사는 동생에게 윤희는 화가 났었습니다. 그래도 응원해줬더라면. 걱정하는 만큼 보듬어줬더라면. 맞아요. 주희는 좀 깝깝한 사람이죠. 굳이 성실하게 사는 윤희의 눈을 빌리지 않아도. 그래도 판단하기 전에 이해해줬더라면 어땠을까.

페이스북 메시지에서 사진으로밖에 못본 조카를 이제는 영영 볼 길이 없습니다. 이혼 후 남편 집에서 아예 주희의 자식을 뺏어가싶이 해서 보여주지 않으니까요. 이 횡포가 과연 나쁜 남편 개인 때문인지 묻게 됩니다. 여자는 애를 낳고 결국 핏줄은 아버지 꺼라는, "어미와 아버지"의 역할 구분을 자연스레 나누는 가부장제에 슬쩍 시선을 돌리게 됩니다. 헤어져있는 이 모자는 어떻게 될까요. 지금 당장은 주희 자신의 앞날을 챙기는 것만 해도 정신이 없습니다. 사대 보험은 꿈도 못꾸고 어렵게 하루를 꾸려가는 게 주희의 삶이니까요. 그리고 많은 여자들이 결국 선택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어머니로 힘들게 살아가는 주희를 보며 윤희는 자신들의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우리들을 이뻐해주셨는데. 그리고 어머니 역시 고단하게 살았었다고. 남들은 아주 대장님이라고들 추켜세우지만, 주희와 윤희는 매일밤 술을 마시고 쓰러지다싶이 자는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어여쁜 새끼들을 보듬어주기 위해서는 어머니 역시 아주 많은 고생을 했을 거라고. 그래도 그립습니다. 이제는 하나뿐인 자매 관계도 거의 쪼개졌고 그렇지 않았던 과거로 거슬러가면 결국 둘을 묶는 건 어머니였으니까.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도 윤희는 주희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운동회 때 어른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던 주희를 사정없이 나무라기만 했죠. 어머니는 운동회에 같이 오지도, 김밥을 싸주지도 못했습니다. 어머니의 부재를 달래는 방법은 그저 자매별로 달랐던 건지도 모르는데. 혼이 난 주희는 그래도 윤희한테 매달립니다. 그래도 언니는 나 미워하지 말라고. 계속 같이 놀자고. 그 때 윤희는 주희를 안아줬던가요. 외로움을 참는 사람은 외로움을 참지 못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후에 학교를 대충 다니고 점점 날라리로 사는 주희에게 윤희는 완전 학을 뗍니다. 어머니가 죽은 이후 두 자매는 어머니의 빈 자리를 같이 포개서 앉지 못합니다.

외로웠을 순간들, 차마 부르지 못했던 순간들, 그 시간들을 거쳐 자매는 어색하게나마 함께 술을 마시고 같은 잠자리에 눕습니다. 주희는 말합니다. 그래도 언니에게 속으로 가장 말을 많이 걸었다고. 윤희는 속으로 대답합니다. 너가 날 부르지 못했을 시간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지. 밤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둘이 좁혀야 할 세월은 깊고 크지만, 미워하고 멀어졌던 시간은 결국 흘러갈 것입니다. 둘은 같은 딸이고 삶의 방식에 상관없이 외로울 수 밖에 없으니까요. 한 쪽은 찾고 한 쪽은 품어줄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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