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어떤 영화동호회들이 핫한지 잘모르겠지만 예전에 호러영화 동호회들이 제법 흥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찾아보면 몇몇 커뮤니티들이 있는걸로 압니다만 지금의 분위기는 어떨런지 잘모르겠군요.


90년대 PC통신 시절부터 나우누리의 고블린이나 하이텔의 호러동(정확한 이름은 기억이 안남)같은 곳부터 90년대말~2000년대초 본격적으로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보급되면서 호러존, 호러피아, 호러타임즈 등 여러 호러영화 동호회들이 생겨났고 그 중 호러존은 호러익스프레스를 거쳐

지금의 익스트림무비가 된걸로 알고 있습니다. 참고로 호러타임즈는 폐쇄되었다가 얼마전에 다시 문을 열었더군요.


특히 2000년대 초반은 인터넷을 통해 검열과 통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문화적인 해금을 맛보게 해주었고 초창기 인터넷 문화의 시류였던 '엽기'라는 코드와도

맞물려서 많은 사람들이 호러영화에 큰 관심을 가졌던 시기였기도 했죠. 대형 호러영화 커뮤니티 사이트 뿐만 아니라 소규모 개인 사이트부터 포탈의 카페에서도

이런 저런 작은 호러영화관련 동호회들이 많이 생겨났었죠.


90년대까지는 검열 때문에 어지간한 R등급 액션영화도 가위질버전으로 봐야했기에 이런 동호회를 통해 무삭제, 말그대로 원본의 영화를 접한다는것 자체가

매우 큰 자극이자 해방감을 안겨주었죠. 90년대에도 PC통신을 통해 암암리에 해외의 무삭제 레이저디스크나 VHS를 복제해서 파는 업자들이나 매니아들을 통해

무삭제 소스들이 유통이 되었지만 이를 접할 수 있는 사람들도 매우 소수였거든요. 참고로 저도 이때 클락워크 오렌지, 스크림, 데드얼라이브, 샤이닝같은 영화들을

이런 업자들을 통해 구입했던 기억이 납니다. 불과 20년전에는 이런 영화들을 합법적으로 구할수가 없었단 얘기죠. 아니면 삭제판을 비디오가게 발품을 팔던가...  -_-;


비단 호러영화뿐 아니라 90년대 영화잡지들을 통해 전설처럼 접했던 소위 컬트영화들, 금지된 영화들을 실물로 만나게 해준 것도 호러영화동호회였습니다.

살로 혹은 소돔의 120일, 감각의 제국(일본영화의 해금으로 인해 당시 기준으로 국제영화제 수상작이라는 이유로 정식 개봉 및 2차 매체 출시라는 기염을 토함, 물론 난도질판),

알렉스 콕스, 조도로프스키, 듀상 마카베예프의 영화들, 핑크 플라밍고 등등 많은 영화들이 동호회 회원들의 통해 밀거래?되었습니다.

PC통신의 삐짜테잎 판매업자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인터넷으로 넘어오더군요.


또 한가지 빼먹을 수 없는게 고전 한국공포영화에 대한 발굴이죠. 김기영부터 박윤교 등 과거 한국 공포영화, 스릴러등 장르영화의 아카이브 역할 또한 호러영화동호회들이 했습니다.

저도 이때 지역에 오래된 비디오가게들을 뒤져서 숨어있던 보석같은 작품들을 발굴하는 쾌감을 느끼기도 했죠. 거금을 들여 레이저디스크플레이어도 구입, 일본의 괴수영화들이나

일본에서 출시된 무삭제 버전들을 구해서 보는데 요긴하게 썼습니다. 물론 VHS로 떠서 공유하는것도 잊지않았죠.


무튼 당시에 동호회에서 상영회를 하면 많게는 50명 정도 인원이 모인적도 있습니다. 저는 지방 동호회였는데 서울쪽은 더 성황이었다고 하구요.

큰 동호회에서는 지방 동호회가 따로 있어서 상영회도 따로 하고 서로 정모를 통해 교류도 하는 방식으로 운영이 되었습니다.

영화벙개도 자주 있고 뒷풀이 형식으로 술자리도 하다보니 자연스레 개인 친분도 생기고 그랬었죠. 회원들의 직군도 다양해서

모 영화감독은 자신의 신작이 검열로 인해 무삭제 개봉, 출시가 어려워지자 동호회에서 직접 뜬 무삭제판을 상영회에서 걸어버린

전설적인 사건도 있습니다. 아마 한국영화 최초의 본격 고어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인데 일본에서 DVD가 출시는 되었다던데 무삭제인지는 모르겠군요.


다만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 이런저런 잡음도 따라오게 마련인데 호러영화동호회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게 '무삭제판 영화 소스'인데

이걸 동호회 회원들끼리 공유하는것을 운영진들이 썩 달갑게 여기지 않았죠. 특히 동호회 운영진 내부에서 구한 소스를 일반회원에게

대여해서 빌려보고 복사하는 행위는 아주 금기시되었습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자면 애초에 불접자료가지고 무슨 유세냐 할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엔 운영진 측에서 이런 영화 소스들을 독점함으로서 계속해서 회원들을 끌어모으는

동력으로 삼고 이로인해 일종의 갑질?도 가능하기에 그랬던게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저 역시 이런 부분이 좀 껄끄러워서 동호회를 나온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회원들끼리 자기네 소스 돌려보는것도 터치를 하니 도저히 계속 있기가 힘들더군요.


그나마 이런 행위로 그다지 오래가지는 못한게 검열도 완화되고 DVD의 등장으로 2차 매체 시장도 나름 활발해져서 국내에서도 슬슬 무삭제로 영화가 출시되거나

아마존같은 해외 쇼핑몰을 통해 아예 무삭제 원판 DVD를 직접 주문하기도 쉬워진 시대가 온것이죠. 그러다 웹하드의 시대가 오면서 이때를 기점으로 기존의

아날로그?식 동호회들은 많이 사멸되다시피합니다.


웹하드라는 강력한 아카이브를 통해 무삭제 영화들을 직접 다운로드 받아서 보는 시대가 온것이죠. 이때는 호러영화뿐만 아니라 일본의 핑크영화, 고전액션영화, 홍콩의 고전무협물, 괴수물

등등 정말 다양한 영화들이 속속 올라오고 동호회를 통해 한글자막까지 유통이 되더군요. 그래도 상영회도 하는 곳은 하는것 같던데 예전처럼

무삭제판 가지고 갑질하는 그런 분위기는 없었을거라 생각이 듭니다. 웹하드 쪽 동호회는 저도 온라인만 활동했었거든요.


이때를 기점으로 호러영화, 컬트영화에 대한 환상같은것도 많이 사라졌다고 봅니다. 그전엔 단순한 영화가 아닌 금지된 것을 체험한다는 일종의 해방감이 컷고 그 영화들을 신격화하는

시선도 있었다면 이후의 세대들은 자신들에게 딱히 히스토리가 없는 작품들이니 그냥 하나의 영화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더군요. 객관적으로요.

 

같은 맥락에서 보자면 일본 애니메이션들도 그런 경향이 좀 있습니다. 금지되어있었기 때문에 갈망이 컸고 그 갈망만큼 보상받으려는 심리. 지금은 일본 애니메이션 자체도 전성기에 비해 쇠락한 느낌이지만

지금의 시선으로 과거 열광했던 작품들을 보자면 '이 작품이 당시에는 그렇게 대단했었나?'하는 의문이 드는 작품들도 많습니다. 물론 여전히 대단한 작품들도 있지만.

애니메이션 동호회도 잠깐 몸담았지만 여긴 호러영화동호회 보다 더 심한 소위 오리지날 덕후들이 모인곳이라 버티기 여간 힘든게 아니더군요. 그놈의 주류, 비주류 드립은 어디나가 똑같았지만.


그렇게 동호회 생활을 떠나서 지금은 혼자 조용히 즐기는게 편하네요. 영화 커뮤니티 가보면 해외 블루레이나 고전 영화 소개해주시는 분들을 접하는데 어떤 분들은 딱봐도

내공이 장난아닌 분명 예전에 동호회에서 활동했구나하는 확신이 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 글보면 반갑더군요. 여전히 왕성하게 취미 즐기는게 부럽기도 하구요. 

전 요즘은 해외쇼핑몰에 블루레이 주문한게 언제인지, 크라이테리온에서 신작이 뭐가 나오는지 잘 기억도 안납니다. DVD 시절에는 해외 호러영화, 장르영화 전문 출시사들

신작들 땡기는거 있음 안빠지고 주문하고 북미 미출시나 북미보다 좋은 판본이라면 일본이나 유럽쪽에서 주문해서 모으고 그랬는데 요즘은 블루레이 출시사들 어디가 어딘지도

잘모르겠네요.    


다만 당시 동호회 회장인지 운영진인지 했던 말이 기억에 남네요.


'우리나라는 이런 문화활동에 너무 인색하다. 북미나 일본같은 구매력을 갖춘 팬덤층이 없다. 그러니 이런 장르들이 활성화가 안된다. 검열이 없어지는 만큼 팬들의 수준도 올라가야한다' 는 식의

얘기였는데 요즘 각종 대충문화의 팬덤을 본다면 음........그래도 호러라는 장르로 한정한다면 아직도 국내에선 좀 낮설게 다가오는건 여전한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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