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것

2019.09.16 04:03

어디로갈까 조회 수:1047

(아래 두 분의 글 -  모 님의 원글과 제 글에 달린 댓글에 필받아 써봅니다. 잠이  2시간 일찍 깨기도 했어요.)
------

<가족>은 무겁습니다. 그 속엔 지나치게 많은 삶이 담겨 있기 때문이죠. <가족>이라는 삶의 방식을 어떤 의미로 감지하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든가, 행복 혹은 불행으로 감지하기 위해서는- <가족> 속에서 진행되는 것들을 몇 백배, 몇 천배로 희석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중딩 때, 어머니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가 뭔지 아니?"
- 글쎄, 그게 뭘까요?
"그건 지구가 도는 소리란다."
- 지구가 도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지구가 도는 소리는 너무 커서 아무도 못 듣는 거란다."

볕이 맑았던 날이었어요. 어머니는 마당이 내다보이는 거실 창가에 앉아서 피로한 듯, 내면의 무언가를 응시하며 조용히 저 질문을 하셨습니다. 가족 중 한사람이 구속돼 있어서 당시 어머니는 언제나 긴장이 서린 침묵을 몸에 감고 있었죠. 어머니가 말한 '너무 커서 못듣는 소리'란 운명에 대한 은유이기도 한데, 지금 저는 그것을 <가족>과 연관해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지구가 도는 소리는 너무 커서 아무도 듣지 못한단다."
가족도 너무 큰 소리죠. 그래서 그 소리도 들을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듣는 소리는 문을 여닫는 소리, 웃음과 한숨 소리, 발자국 소리, 그리고 무심히 혹은 긴장하여 나누는 말소리뿐이에요. 그 모든 사소하고 작은 소리들이 너무 커서 들을 수 없는 저 거대한 소리로서의 <가족>에서 흘러나오고 그것으로 흘러듭니다.

귀에 들리는 저 작은 소리들이 간간이 멈추는 시간에, 우리는 너무 커서 들리지 않는 소리인 <가족>의 밖에 서서 가족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생각조차 실은 여전히 가족이라는 근원의 미세하고 작은 표정일 뿐이지 않을까요.

십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저께 저는 마당의 평상에 앉아 다시 어머니와 얘기를 나눴습니다. 어머니는 자식들과 남편이 던지는 여러 문제에 대해 얘기하셨고, 저는 다정한 마음으로 미소를 띄고 어머니의 얘기를 들었어요. 제가 짓던 담담한 미소는 솔직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그렇지 않을 대화의 가능성을 한사코 거부하기 위한 단호한 방어벽이기도 했음을 고백합니다.

어머니는 말씀하셨어요. "가정사의 구체적인 세부들을 타인에게 전달할 때는 항상 그 위에 무엇인지가 덧씌워지고 덧씌어져."
그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실한 마음으로 어머니는 부정해보고 싶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 마음이 生의 윤곽을 만드는 것이죠.
세상에 절대적인 해석이나 근원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그렇지 않다는 듯, '중심과 근원'을 고집하며 사는 마음이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그건 어머니(를 포함한 모든 기혼자)가 절실하게 고집하는 노선인 것 같아요.

비혼자로서의 제겐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남편/아내와 공동의 생활을 엮는 일들이 일종의 추락이며 망각이며 몰락으로 여겨집니다. - -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것과 같은 추락이며, 무언가에 도취하여 자신과 세상을 잊는 듯한 망각이고, 그 누구도 면제받을 수 없는 늙어감으로서의 몰락이라는 의미 - 이니 짱돌 내려놓으세요~ -_-

아, 그래 라는 긍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리라는 끄덕임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추락과 망각과 몰락의 장소이기에 가족이란 형이상학적인 무엇이 됩니다. 이런 질서 안에서 가족의 한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에게 품을 수 있는 궁극적인 태도와 정서는 아무리 사려깊다 해도 '연민'인 것 같아요. 그러나 그것을 결코 표현하지는 말라!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188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754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190
126048 요즘 본 영화들에 대한 짧은 잡담... new 조성용 2024.04.23 26
126047 잡담) 특별한 날이었는데 어느 사이 흐릿해져 버린 날 new 김전일 2024.04.23 28
126046 구로사와 기요시 신작 클라우드, 김태용 원더랜드 예고편 [2] new 상수 2024.04.23 114
126045 혜리 kFC 광고 new catgotmy 2024.04.23 109
126044 부끄러운 이야기 [2] update DAIN 2024.04.23 241
126043 [티빙바낭] 뻔한데 의외로 알차고 괜찮습니다. '신체모음.zip' 잡담 [1] update 로이배티 2024.04.23 189
126042 원래 안 보려다가 급속도로.. 라인하르트012 2024.04.22 176
126041 프레임드 #773 [4] Lunagazer 2024.04.22 47
126040 민희진 대표님... 왜그랬어요 ㅠㅠ [6] update Sonny 2024.04.22 788
126039 미니언즈 (2015) catgotmy 2024.04.22 69
126038 칸타타 콘트라베이스 스위트 아몬드, 라떼 catgotmy 2024.04.22 71
126037 최근 읽는 책들의 흐름. [6] update 잔인한오후 2024.04.22 307
126036 듀게 오픈채팅방 멤버 모집 물휴지 2024.04.22 32
126035 눈물의 여왕 13화?를 보고(스포) [2] update 상수 2024.04.21 290
126034 [왓차바낭] 선후배 망작 호러 두 편, '찍히면 죽는다', '페어게임' 잡담입니다 [7] update 로이배티 2024.04.21 227
126033 프레임드 #772 [4] Lunagazer 2024.04.21 41
126032 LG 우승 잔치는 이제 끝났다… 3년 뒤가 걱정이다, 구단도 냉정하게 보고 간다 [5] daviddain 2024.04.21 196
126031 [넷플릭스] ‘베이비 레인디어’ 굉장하네요 [9] Gervais 2024.04.21 911
126030 [왓챠바낭] 다시 봐도 충격적일까 궁금했습니다. '성스러운 피' 잡담 [4] 로이배티 2024.04.20 648
126029 프레임드 #771 [2] Lunagazer 2024.04.20 32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