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올해의 영화 - <서스페리아>

2019.12.31 21:30

Sonny 조회 수:634

https://youtu.be/BTZl9KMjbrU


사실 올해는 영화를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원래도 이런 리스트 만드는 걸 좀 창피해하긴 하는데 이건 무슨 공신력을 노리고 쓰는 게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쓰는 거라 덜 민망하네요. 루카 구아다니뇨의 <서스페리아>는 올 한해 제게 가장 아름다운 영화적 체험이었습니다. 제가 이 영화만큼 의미와 아름다움을 반복해서 곱씹고 치열하게 봤던 영화가 또 없었어요.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 영감을 일깨우는 경험을 하는 것도 오랜만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 <서스페리아>의 원작을 보고 감상을 남기고, 리메이크작 <서스페리아>를 보고, 이해가 잘 안되서 한번 더 보고, 나중에 또 보고. 사실 아직도 정리하지 못한 게 많습니다만 이 영화의 어지간한 것들은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톰 요크가 작사작곡하고 부른 Suspirium은 특히나 올 한해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입니다. 이 스코어가 울려퍼지면서 시작되는 영화의 오프닝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진혼곡처럼 이 노래가 울려퍼지고 수지의 어머니가 반송장 상태로 누워있는 장면을 보면 이 영화의 시작이 죽음이라는 점에서 러닝타임 내내 죽음을 탐구하고 추구할 것이라는 강한 예감을 줍니다. 사람들은 아름답게 춤을 추고 기괴하게 죽어갑니다. 죽지 못한 자의 회한은 계속해서 발레리나가 터닝을 하듯 헤맵니다. 피가 터지는 그 피날레 씬에서 톰 요크의 목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다정합니다. 우리가 죽음이라는 현상을 이렇게 애수가 맺힌 안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영화라는 매체 덕에 가능한 건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의 여성주의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동진 평론가의 말을 빌리면 History를 Herstory로 바꾸려 한 주제의 변주를 곱씹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작인 <서스페리아>는 무해해보이는 외지인 여자가 정신없이 쫓기고 불안해하는 영화입니다. 거기서 여자들의 시체는 아주 예술적으로 난도질을 당합니다. 그 어떤 스토리도 없는 이 원작을 가지고 루카 구아다니뇨는 "마녀"라는 존재가 역사 안에서 어떻게 세대간의 이동을 하는지 서사로 만들어냈습니다. 도망치는 여자가 있고, 벌을 주는 여자가 있고, 타락한 가운데 권좌를 지키는 여자가 있고, 피투성이 죽음의 평화를 손수 내리는 여자가 있습니다. 적군파를 비롯한 급진적 좌파의 항쟁이 서서히 저물어가는 가운데, 싸우는 것도 실패한 것도 모두 여자라는 성별로 비유를 하며 그것을 춤으로 번역한 루카의 도전에 경의를 표합니다. 마녀는 무엇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늙고 사악한 권력자일 수 있고 혹은 그 모두를 뒤집어 엎을 변혁의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남자들은 차마 끼지 못하는 이 판에서 마녀들이 춤을 추고 고통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광경은 그 자체로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움직이는 것이 소리와 결합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영화의 미적 효용이라고 할 때, <서스페리아>만큼 이를 전위적이고 도발적으로 이뤄낸 영화도 또 없을 것입니다. Volk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의 그 기괴함은, 스크린 바깥의 평이한 기준으로 감히 평가할 수 없는 생명력이 꿈틀댔습니다. 그 어떤 부드러움이나 아리따움의 개념도 거부한 채 신경질적으로 긁어대는 춤의 향연은 몇번을 봐도 압도적입니다. 춤을 추는 여자들은 어떤 존재들입니까? 이들은 악하고 힘이 넘치며 수상쩍기 짝이 없는 위험한 존재들입니다. 그 춤은 우리가 마땅히 몰라야 할 비밀을 주문처럼 고백하는 도발적인 풍경입니다. 마녀들은 사람을 죽이고 속이고 있다는, 마력의 작용과 반작용이 눈 앞에서 벌어져도 지하의 실상을 모르는 우매한 대중은 그걸 그저 춤이라고만 받아들입니다. 진실은 그보다 훨씬 끔찍한 것인데도요.


한편으로 <서스페리아>는 애틋한 로맨스입니다. 그것은 이루지 못하고 지키지 못한 연인을 기리는 오랜 세월의 일기장이며, 역사 앞에서 개개인의 최후가 어떻게 의미를 불어넣는지 체험하는 개인주의의 장이기도 합니다. 역사는 왜 아프고 잔인한가요.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저 생명이 아니라 누군가의 연인이고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억은 사라지지만 기록만큼은 의미를 잃고서도 흔적을 유지합니다. 차가운 겨울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무심하게 시간이 흐르고 후에 노의사가 살았던 집의 벽을 비춰줄 때, 연인의 이름을 이니셜로 새겼던 자국은 계속 남아있습니다. 그 상처를 관객인 우리가 시간을 통달해 발견합니다. 무덤의 비석같기도 한 그 벽돌은 시간이 흐른 후에도 남아서 망각에 저항합니다. 


듀나님은 이 영화가 취향이 갈릴 거라고 경고했죠. 저에게는 아주 딱 맞는 영화였습니다. 루카 구아다니뇨의 전작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그렇게 좋은지 몰랐지만, <서스페리아>만큼은 전적으로 좋아할 수 밖에 없습니다. 2019년에는 어떤 영화를 봤냐고 질문을 받으면, 저는 이 영화를 가장 먼저 대답하고 선명하게 기억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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