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비평

2020.07.12 11:35

Sonny 조회 수:953

누군가 저에게 인상비평을 한다고 비판하더군요. 이 때 인상비평은 '논리적 근거없이 본인의 인상만을 가지고 부정확하게 결론을 내리는 행위'를 지칭하는 뜻 정도로 쓴 것 같습니다. 저는 이런 비판이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제가 영화 후기를 못올리는 이유는 인상비평을 쓰기 싫은 완벽주의가 가장 크기 때문입니다. 씬 대 씬으로 뭘 뜯어보고 분석해야 그것이 유효한 감상이 될 거라는, 정확성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저는 이 게시판에서 댓글을 가장 열심히 길게 쓰는 사람일텐데 (저는 그렇게 따박따박 따지고 쓰는 제가 가끔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저에게 인상비평을 한다고 일축할 수 있다는 것이 조금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를 비판할 때는 인상비평의 반대방향에서 이런 글을 이렇게 쓴 것은 구조적으로 어떻고 표현은 어떤 효과를 불러오는지 굉장히 세세하게 써놓았는데도요. 아마 그는 인상비평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인상비평이라고 상대의 평을 폄하할 때는 반드시 다른 비평의 관점을 빌려 해명 혹은 변호를 해야한다는 것을 그가 알았다면 다른 단어를 빌려 저를 비판하지 않았을지.


아마 그는 비평을 저자의 속마음 알아맞추기 정도로 상정해놓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속마음을 절대 알아맞출 수 없는 무엇이라 여기고 채점자의 입장에서 틀렸다는 오답채점을 하는 것이 그 인상비평을 부정할 수 있는 최종적 수단이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비평은 독심술이 아닙니다. 창작자는 자신의 작품을 온전히 통제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작품이 창작자를 지배하고 인도합니다. 비평은 작자의 의도를 추론하고, 작자의 의도와 작품이 잘 맞아떨어지는지를 생각하고, 작자의 의도를 뛰어넘는 작자의 무의식적 취향이나 가치관이 들어가있는지 통합하고, 작자의 의도나 무의식과 독립되어 존재하는 그 자체로서의 작품을 이해해보는 일일 것입니다. 말과 글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 모든 언어가 입장 표명이라든가 첨삭에 의해서 시시비비가 갈라진다면 "주어는 없습니다"같은 말이 유행어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일관적인 글이 왜 어떤 주제에서는 그 어조를 달리하고, 왜 어떤 사람들과는 입장을 달리하며, 왜 어떤 첨언은 꼭 들어가고 있는 것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인상비평일까요. 


어제 <시티 오브 갓>을 보고 왔습니다. 정성일 평론가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이번에도 다 못하고 영화의 배경이 되는 현실이 어떤지 주구장창 떠들다가 극장 직원에게 "제재"를 당해서 GV는 끝내 중지(?)되었습니다. 인상비평에 저렇게 격렬히 저항하는 사람을 보니 괜시리 유쾌해지고 하고 그렇더군요. 대충 뭉게는 게 잘 안되고 따지고 드는 게 습성인 인간들이 있나봅니다. 글이라는 것은 그런 사람들에게 걸려들기 좋은 먹잇감입니다. 생각과 태도는 단어와 문장에서 선명히 드러나는 증거니까요. 본인의 자아가 글에서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분들이 있다면 유념하셔야 합니다. 내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도 나를 들여다본다 이런 손발 오그라드는 어구가 아니더라도, 글과 말은 이 게시판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가장 분명하고 유일한 지표니까요. 이렇게 말하는 저도 오프라인에서 대화할 때는 "별로" 안그렇습니다만, 게시판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글을 쓰는 순간 우리 자신을 비평의 재료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4822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379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1731
112786 세종시로 수도를 옮기면 안 될까요 [4] 표정연습 2020.07.12 761
112785 고인에 대한 선택적 예의 [19] 머핀탑 2020.07.12 1554
112784 해외주식이 나에게 미친 영향 [12] S.S.S. 2020.07.12 889
112783 공소권 없음과 무죄 추정의 원칙과 죽음을 둘러싼 정치 사이 [7] 타락씨 2020.07.12 756
112782 성폭력에는 의적이 없습니다 [6] Sonny 2020.07.12 1008
112781 ‘권력형 성폭력 특별조사 위원회’에 대한 고민 [4] ssoboo 2020.07.12 722
112780 은행나무와 성인지감수성 사팍 2020.07.12 355
112779 [천기누설] 11화 - 윤석열의 복수혈전 -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왜냐하면 2020.07.12 379
112778 홍콩 갈 수 있을까 [6] 예상수 2020.07.12 589
» 인상비평 [2] Sonny 2020.07.12 953
112776 [넷플릭스바낭] 액션 스타 샤를리즈 테론의 '올드 가드'를 봤습니다 [22] 로이배티 2020.07.12 863
112775 정의당의 미래(from 김두일) [23] 사팍 2020.07.12 1016
112774 [아마존] 저스티파이드를 보고 있습니다 [13] 노리 2020.07.12 577
112773 죽음보다, 한 사람의 생존과 고통을 [10] Sonny 2020.07.11 1312
112772 죽음의 무도를 읽다가 [7] daviddain 2020.07.11 548
112771 맷데이먼 에밀리브런트 영화 컨트롤러에서 회장의 정체는 [1] 가끔영화 2020.07.11 816
112770 [넷플릭스바낭] 재밌게 봤지만 추천할 수 없는 드라마 '워리어 넌'을 봤습니다 [15] 로이배티 2020.07.11 1013
112769 [EBS1 영화] 장고 [16] underground 2020.07.11 544
112768 죽음, 죄, 장례, 조문 [21] 왜냐하면 2020.07.11 1184
112767 강남순 교수-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열광적 '순결주의'의 테러리즘> [10] 닉넴없음 2020.07.11 116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