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순 교수의 글...

2020.07.13 22:38

SykesWylde 조회 수:1214

https://www.facebook.com/kangnamsoon/posts/3973175506044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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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애도'와 '위험한 애도' 사이에서>

1. 우리의 말과 글에는 무수한 개념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소통과 이해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동일한 개념을 쓴다고 그 개념에 대한 이해도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간혹 들리는 큰 매장의 한인 슈퍼마켓에 가면 입구에서 “예수 믿으세요?”라고 물으면서 나에게 ‘전도’하려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이럴 경우 나의 답은 짦은 "예'이다. 서로 시간낭비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 질문을 하는 사람과 내가 진지하게 소통하고자 한다면, 답하기 전에 나는 그 질문자에게 먼저 두 가지를 물어야 한다. 첫째, 당신이 생각하는 ‘예수’는 누구인가; 둘째, 당신이 생각하는 ‘믿는다’는 무엇인가. 많은 이들에게 ‘예수’는 축복(특히 물질적 축복)을 주고 사후에 천당 가게 하는 존재이다. 또한 ‘믿는다’는 것은 교회에 등록하여 ‘정식 교인’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모두 동의할 수 없는 이해이다. 따라서 ‘예수 믿는가’라는 질문에 ‘예/아니오’라고 단순하게 답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고, 종종 위험하기까지 하다. 가장 기본적인 개념의 이해에서 상이한 이해를 하기에, 누군가와 글/말을 통한 소통을 진정으로 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이 쓰는 중요한 개념이 상대방과 유사한 것인지 아닌지를 살피고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어야 한다. ‘질문에 다시 질문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2. 사람이 자신과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때 진정한 소통에 가장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은, 바로 동일한 개념에 대하여 상이한 이해를 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 그 의미의 상이성은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 사람의 말/글이 나오게 된 구체적인 정황이나 개념이해와는 상관없이 ‘탈정황화’되어서 정작 그 말/글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과는 상관없이 자의적 해석과 단순한 왜곡으로 ‘소비’시켜버린다. 동일한 글에 대하여 완전히 상충적인 해석이 등장하고, 상이한 기능을 하게 되는 이유이다. 특정 개념을 사용할 때 이미 그 사람의 가치관, 세계관 등에 따라서 그 개념에 대한 이해가 자동적으로 구성된다. 한 사람의 읽기, 쓰기, 해석하기가 언제나 이미 ‘자서전적’인 이유이다. 쓰여진 글에는 저자의 직접적 현존이 부재하기에 오역에 노출된다고 본 소크라테스는 ‘글쓰기(writing)’에 대하여 회의적이었기에, 자신 스스로는 쓰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말하기’ 역시 글쓰기와 동일한 방식으로 청자의 왜곡된 해석과 오독에 이미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소크라테스는 보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3. 자크 데리다는 이 세계에는 두 개의 개념이 존재한다고 한다. 하나는 ‘인용부호가 없는 개념,’ 또 다른 하나는 ‘인용부호가 있는 개념’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상속받는다는 것 (to exist is to inherit)" 이라고 하면서, 상속(inheritance)은 '주어진 것(given)'이 아닌 '과제(task)'라고 말한다. 인용부호가 없는 개념을 상속받은 사람의 과제란, 그 개념에서 소중한 것은 물론 그 개념이 사용되어오면서 놓치고 있는 것을 찾아내어 그 개념의 의미를 심오화하는 인용부호속의 개념’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이다. 데리다는 우리가 유산으로 물려받은 개념/실천을 마주하면서 그 상속받은 개념들 속에서 긍정해야 하는 것, 문제제기해야 하는 것, 그리고 새롭게 부각시키고 확장해야 하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 ‘상속자’로서의 우리의 과제라고 보는 것이다. 데리다가 치열하게 상속자로서의 과제를 수행하는 것의 자취는 그가 개입하는 무수한 개념들속에서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고 자명하게 안다고 생각하는 개념들이 그의 손을 거치면, 새로운 세계를 품고 있는 개념으로 재탄생한다. 그 예(example)의 리스트는 애도-“애도,” 환대-“환대,” 용서-“용서,” 선물-“선물,” 우정-“우정,” 미소-“미소,” 동물-“동물” 등 한도 없이 길어진다.

4.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사유 주체(the thinking subject)’ 의 부각은 중요하다. 그러나 인간이 ‘함께 존재’라는 차원을 결여한다. 이 데카르트적 인간이해의 한계를 넘어서서, “나는 애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라는 “애도 주체(mourning subject)”로서의 데리다의 선언은 내게 매우 중요하다. 인간이 ‘사유 주체’만이 아니라 ‘상호연결성의 주체 (the subject of co-existence)’라는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의 차원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데리다의 인간이해는 나의 사유와 실천세계에 매우 중요한 토대가 되어왔다. 내가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알리즘 등과 같은 현대 담론/운동에 개입하는 것은 인간의 ‘상호존재성의 의미’를 다층적으로 확인해주는 이론이며 실천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 이론들이 나와 다른 입장을 정죄하고 파괴하는 ‘무기’가 아니라, 인간됨을 상실하지 않는 평등과 정의 확장의 ‘도구(tool)’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내가 언제나 강조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이 어떠한 주제든 나의 글/말/운동의 출발점을 구성한다.

5. 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애도와 “애도”라는 두 개념의 차이를 스스로 속에 구성하고 있는가. 이러한 근원적인 물음을 우리 각자는 자신의 정황에서 씨름해야 한다. 나는 오직 고유명사로서의 나, '강남순'이 생각하는 “애도”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진정한 애도’와 ‘위험한 애도’가 있다고 본다. 세월호 사건이든 최근 죽음을 택한 한 공인에 대하여서든 ‘애도’한다고 했을 때, 그 ‘애도’라는 개념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이해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보는 ‘위험한 애도’가 지닌 세 가지 특성은 첫째, 애도 대상에 대한 ‘이상화(idealization),’ 둘째, 낭만화(romanticization); 셋째, 내면화 (internalization)이다.

1) ‘이상화’란 그 인물이 한 공인으로 이루어 온 업적이나 한 인간으로 걸어 온 자취를 모두 가장 최고의 것으로 올려놓고서, 누구도 접근 할 수 없는 존재로 승격시키는 것이다. 
2) ‘낭만화’란 ‘밝고 좋은 것(bright side)’만을 부각시킬 뿐, 인간에게 모두 있을 수 있는 ‘어둡고 문제적인 것(dark side)’은 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3) ‘내면화’란 그 죽음이 살아남은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를 보지 않고, 그 죽음 자체를 하나의 ‘실존적 늪’으로 기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무기력감, 낭패감, 냉소성으로 둘려쌓인 그 ‘실존적 늪’에 침잠하는 방식의 애도는 ‘위험한 애도’이다.

최근 ‘박원순 서울 시장’의 죽음과 관련한 나의 애도에 관한 글에서 내가 생각하는 ‘애도’의 의미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내가 거부하는 이러한 ‘위험한 애도’의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는 것을 본다. 소크라테스의 망령(specter)이 나의 곁에 서서, '그래서 내가 쓰기를 거부한 것이오' 하며 미소짓고 있는 것 같다.

6.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애도’는 무엇인가. 우선 ‘위험한 애도’의 세 요소를 넘어서는 과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첫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대체불가능한 생명의 상실에 대한 아픔으로부터 진정한 애도는 시작된다. 둘째, 그렇다고 해서 그 ‘애도하기’가 그 인물에 대한 ‘이상화,’ ‘낭만화’를 하면서 그 죽음을 ‘냉소성, 낭패감, 무기력감의 늪’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한 인간으로서 그가 해 온 일들의 의미를 되짚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공인으로 또는 한 개별인간으로서 다층적 한계와 잘못을 할 수 있는 사람임을 보면서, 그 한계와 과실을 책임적으로 비판적 조명을 하는 것이다. 셋째, 그가 공인으로서 가졌던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가치들’이 있다면, 그 가치들은 무엇이었으며, 그 가치들의 구체적 실천에 대하여 남아있는 ‘내가’' 나의 삶의 정황에서 할 수 있는 또는 해야 하는 과제는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인용부호속의 “애도,” ‘진정한 애도’이다. 그렇기에 애도하는 대상과 ‘함께 (with)’만이 아니라, 그 사람을 비판적으로 ‘넘어서고 문제제기하는(beyond/against)’의 접근이 요청되는 것이다.

7. 데리다는 2004년 10월 9일 죽었다. 데리다가 죽은 후 신문들에 쏟아진 ‘부고’는 참으로 상충적이었다. 그 당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실은 데리다를 ‘우리 시대의 지성 세계에서 주요인물 중의 한 명’이라고 표현하였다. 영국 <가디언 (Guardian)>신문이나 미국의 <고등교육저널(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은 데리다에 대한 심오하고 포괄적인 매우 긍정적 서술을 한 부고를 내었다. 반면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은 10월 10일, 작가인 조나단 캔델 (Jonathan Kandell)이 쓴 “자크 데리다, 난해한 이론가,74세에 파리에서 죽다 (Jacques Derrida, Abstruse Theorist, Dies in Paris at 74)”라는 제목의 매우 부정적인 부고를 냈다. 캔델은 이 부고에서 데리다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부고는 ‘해체(deconstruction)’개념을 ‘진리와 의미에 대한 공격’이라고 규정하면서 폄하했다. 이 노골적인 부정적 부고 기사에 많은 학자, 건축가, 예술가, 음악가, 작가 등 300여 명이 서명을 하여 뉴욕타임즈에 문제제기하는 글을 보냈다. 데리다를 그렇게 무책임하게 ‘비난’하는 것은 마치 “아인슈타인,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중요한 사상가들을 부적격한 학자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문제제기의 글을, 뉴욕타임즈 지는 2004년 10월 12일에 실었다. 이 반박문에는 부정적 평가를 하는 사람들이 애초에 데리다의 글들을 제대로 읽지도 않았거나, 읽었다해도 이미 자신 속에 고착된 해석적 렌즈를 가지고 의도적 폄하를 하는 것이 문제라고 강조한다. 즉 한 인물에 대한 ‘상이한 해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의도적 왜곡, 자의적인 무책임한 해석, 정치화된 폄하가 문제라는 것이다.

8. 내가 감동깊게 마주한 어떤 사람의 ‘애도하기’ 방식이 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애도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나는 이 철학자로부터 확인하게 되었다. 데리다는 2004년 10월 9일 죽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란 무엇인가. 자명한 것 같은 ‘애도하기’가 사실상 전혀 자명하지 않다. 션 가스톤 (Sean Gaston)은 데리다의 죽음 후 데리다의 ‘애도하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했다. 후에 책으로 출판된 그의 ‘애도하기’ 방식은 2004년 10월 12일부터 12월 17일까지 2달에 걸쳐서 데리다의 작업, 사상, 삶의 자취에 대한 자신의 성찰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52편의 글이 되었다. 책의 제목은 <자크 데리다에 대한 불가능한 애도 (The Impossible Mourning of Jacques Derrida>이다 (이 책의 목차를 아래에 사진으로 나눈다). 가스톤의 ‘애도하기’ 방식에서 나타난 그의 글들은 참으로 다양하게, 심오하게, 복합적인 모습으로 ‘애도하기’가 ‘가능/불가능’하다는 것을 내게 감동적으로 일깨워주었다.


9. 이렇듯 한 죽음에 관한 ‘애도하기’란 다양한 모습을 지닌다. 그렇기에 나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방식의 애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애도하기’ 역시 ‘자서전적’이기 때문이다. 살아감이란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죽음들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 각자는 예외 없이 ‘죽음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나’는 < 애도-“애도” >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기만의 방식을 타자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의 애도하기를 품고서, 각자가 지속적으로 씨름해야 할 개인적/ 사회정치적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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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에서 좋은 글을 보게되어 공유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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