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사에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좀비들이 등장한 건 1968년이었습니다. 조지 A.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시조였죠. 그 전까지 좀비라고 하면 부두교 마법사들이 죽은 자들을 살려 만든 노예를 의미했습니다. 지금 좀비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로메로 영화에 나오는 사람 생살을 뜯어먹는 썩어가는 시체들을 떠돌립니다. 로메로는 첫 3부작 영화에서 좀비라는 단어를 단 한 번, 그것도 비유적으로 썼을 뿐인데요. 언어의 변화 방향이라는 게 이렇게 예측하기 어려워요.

1985년, 변종 좀비가 출현합니다. 국내에서는 [바탈리언]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댄 오배논의 [The Return Of The Living Dead]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 실화라고 주장하며 시작하는 블랙 코미디인데, 이 영화의 좀비들은 느릿느릿 걷는 로메로의 좀비보다 훨씬 빨리 달려요. 그리고 [28일 후...], [시체들의 새벽]의 리메이크인 [새벽의 저주]가 나오면서부터 좀비들은 미친 것처럼 질주하고, 이들은 느린 좀비들이 살던 자리를 차지합니다. 여전히 느린 좀비야 말로 진짜라고 생각하는 골수팬들이 있지만 세상이 빠른 좀비를 원한다면 그것도 어쩔 수 없지요. 그렇다고 아직 느린 좀비가 전멸한 건 아닙니다. 호주 좀비 코미디 [리틀 몬스터]를 보면 작전에 파견된 군인들이 “빠른 좀비야? 느린 좀비야?”라고 확인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영화에서는 느린 좀비였어요.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을 지키는 두 어른들이 주인공이었으니 빠른 좀비였다면 곤란했겠지요.

TvN [드라마 스테이지 2021]의 이번 주 에피소드인 [산부인과로 가는 길 (극본 이하니, 연출 김양희)]에 나오는 좀비는 느린 좀비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느린 좀비가 아니면 성립될 수가 없어요. 박하선이 연기하는 주인공 화영은 느린 좀비보다 더 느리게 걸을 수 밖에 없는 임산부입니다. 당연히 아파트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좀비 사태가 터지기 직전에 이미 밖으로 나와 버렸고 입구는 수위 좀비가 막고 있어요. 어떻게든 좀비들을 뚫고 남편 회사가 있는 건물 7층에 있는 산부인과로 가서 아기를 낳아야 합니다.

정통 좀비물의 맛이 강하게 나는 작품입니다. 피투성이 살인과 신체 손상 묘사는 최소한으로 줄였어요. 아무래도 텔레비전 단막극이니까요. 하지만 느릿느릿 다가오는 좀비들로 만들어내는 서스펜스는 빠른 좀비들에게 쫓기며 느끼는 자극적인 공포와는 다른 멋이 있습니다. 빠른 좀비물이 카체이스라면, 느린 좀비물은 잠수함전에 가깝달까요. 이런 설정에서 임산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속도만 보았을 때도 정말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로메로 이후 나온 중요한 좀비 영화들은 대부분 정치적이었습니다. 아니, 정치성이야 말로 좀비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파 좀비물인 [산부인과로 가는 길]도 예외는 아닙니다. 임산부 주인공이 단지 속도 때문에 뽑혔을 리는 없어요. 선명하고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있습니다. 임산부, 노약자, 장애인의 이동권이지요. 아직도 일상처럼 벌어지는 임산부 좌석을 둘러싼 소동을 떠올려 보세요. 지난 2월에도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회원들이 지하철 4호선에서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했다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대한민국은 결코 ‘느리게 걷는 사람들’에게 친절한 곳이 아닙니다. 시설은 불편하고 사람들은 냉정하며 종종 잔인합니다. 정치인들은 이들의 요구를 기념 사진 찍는 배경으로만 이용하고요.

그리 멀지 않은 건물 7층에 있는 산부인과로 가는 여정은 화영에게 위험한 여정을 넘어선 장엄한 오디세이입니다. 좀비 역병이 돌고 있으니 느리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바깥은 위험했겠지만, 화영에게 언달아 닥치는 위험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느리게 걷는 사람들은 가장 먼저 희생자가 되고, 느리다는 이유로 좀비로 몰려 차별 받습니다. 재난이 터지자 사람들은 더 노골적이 되고 속내를 감추지 않아요. 이 지옥에서 좀비들은 그냥 거들 뿐이예요. 좀비 역병 전, 아니, 임신 전에도 화영 주변 세상은 화영에게 호의적이 아니었어요. 여자 화장실은 좀비들이 들어오기 전애 불안한 곳이었습니다. 막판에 억울해하며 징징거리는 군인 캐릭터는 너무나도 익숙한 존재인데, 이 인간은 차라리 좀비일 때가 견딜만 합니다.

이 상황에서도 [산부인과로 가는 길]은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낙천주의를 과장하는 것도 아니예요. 화영은 7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누군가는 억울함에 혼자 미쳐 떨며 폭력적이 되지만, 길가다 만난 프레시 매니저(aka. 야쿠르트 아줌마)와 병원 간호사처럼 곤경에 빠진 화영을 아무 조건 없이 돕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배분은 적절한 동시에 익숙하기 짝이 없어서 거의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의미가 있는 건 이 드라마가 (좀비를 곁들여) 현실 세계를 그럴싸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게 아니라 그 지옥 속에서 의미있는 결과를 내는 사람들이 후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억울함에 치여 발악하는 대신 이웃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세상을 더 낫게 만듭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린 스스로가 만든 지옥에 갇힐 뿐이지요. (21/04/02)

기타등등
1. 박하선의 이전 출연작 [산후조리원]이 궁금해졌습니다. 1회는 보긴 했는데, 그 뒤로 연결해서 볼 시간이 안 났어요.

2. 요새 관객들은 더 이상 느린 좀비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요. 심지어 배우들도 신선하다고 그러네.


극본: 이하니, 연출: 김양희, 배우: 박하선, 배윤경, 김재화, 다른 제목: On the Way to the Gynecologist

Hancinema https://www.hancinema.net/korean_drama_Drama_Stage_2021_-_On_the_Way_to_the_Gynecologist.php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