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코 샤넬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이름을 묶어서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전 얀 쿠넹의 [샤넬과 스트라빈스키]가 나오기 전까지 그런 건 상상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둘이 아는 사이일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좁은 동네였으니까요. 하지만 애인 사이라?


조금 검색을 해봤는데, 스트라빈스키는 이들의 관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고, 코코 샤넬은 말년에 이들이 애인 사이였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한 적 있는 모양인데, 스트라빈스키의 주변 사람들은 여기에 회의적인 모양이에요. 제 생각엔 둘이 정말로 그런 사이였다고 해도 그리 진지한 관계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원작소설을 쓴 크리스 그린홀즈가 여기에 대해 얼마나 확신하는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하여간 그가 쓴 이야기가 대부분 자신의 상상력에 바탕을 둔 허구인 건 분명합니다.


영화에 따르면 코코 샤넬은 악명높은 1913년 [봄의 제전] 초연 때 관객으로 왔다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에 주목하고, 1920년에 그를 다시 만나 후원자/연인이 됩니다. 스트라빈스키의 아내 카테리나는 둘 사이를 눈치채고 괴로워하다가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고, 그 이후 샤넬과 스트라빈스키의 관계도 붕괴되지요.


차갑기 짝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두 주인공이 홀딱 벗고 뒹군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늘 열정적이라는 법은 없지요. 저에겐 이들의 관계가 애정보다는 암묵적 계약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적어도 스트라빈스키는 공짜로 남의 집에 들어와 있으니 집주인에게 최소한의 봉사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영화는 이들을 깊이 이해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들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습니다. 짐작은 가지만 정답은 없죠. 오히려 이해하기 쉽고 공감되는 인물은 스트라빈스키의 아내 카테리나입니다. 배우로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도 카테리나를 연기한 엘레나 모로조바고요.


영화의 가치는 대부분 표면에 몰려 있습니다. 아름다운 재료들을 가지고 정교한 장식물처럼 만든 영화죠. 샤넬을 연기한 안나 무글라시스가 샤넬 모델이고, 칼 라거펠트의 지원을 전적으로 받은 영화이기 때문에 종종 패션 홍보물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코코 샤넬이 영화의 시각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있다면, 스트라빈스키는 청각을 맡습니다. 가브리엘 야레의 영화음악도 나쁘지 않지만, 영화 전체를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으로 채웠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전 언제나 그가 훌륭한 영화음악을 작곡했다고 생각했죠.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초반에 나오는 [봄의 제전] 초연 시퀀스입니다. 이 장면은 거의 완벽한 시간여행과 같습니다. 코코 샤넬이 관객 중의 한 명이었다는 것만 빼고요. 타임머신을 살 돈이 없는 우리 같은 가난한 중생들을 위한 무료 서비스지요. 샤넬이 샤넬 넘버 5.를 만드는 장면은 이보다는 덜 재미있지만 그래도 있으니 좋더라고요.


기둥이 되어야 할 연애담이 미스터리와 냉담함 속에 숨어 있는 터라, 영화는 끝맺음을 하는 데 애를 먹습니다. 얀 쿠넹이 택한 건 초현실적인 도피입니다. 영화의 결말은 거의 큐브릭이에요. 보다보면 어딘가에 모놀리스가 떠돌고 있을 것 같습니다. 재미있긴 합니다만, 과연 둘의 이야기가 이렇게 우주로 날아가버릴  정도이긴 했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11/08/19)


★★★


기타등등

1. 미켈슨의 러시아어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2. 카테리나가 샤넬과 맞장 뜨는 장면은 인상적이지만, 이런 건 샤넬 대신 남편의 진짜 애인이었던 베라 드 보세에게 해야 했을 것 같지 않습니까.

 

감독: Jan Kounen, 배우: Anna Mouglalis, Mads Mikkelsen, Elena Morozova, Natacha Lindinger, Grigori Manoukov, Clara Guelblum, Sophie Hasson


IMDb http://www.imdb.com/title/tt1023441/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53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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