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로메테우스

2012.08.30 09:07

menaceT 조회 수:2878

 

   일단 불만부터. 캐릭터들의 매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며(그런데 사실 ‘에일리언’에서도 승무원 캐릭터들은 거의 종이조각처럼 매력 없는 인간들이었다. 리플리가 그나마 선방했고 에일리언 캐릭터가 워낙 강렬해서 그렇지…), 개연성이 딸리거나 전개가 팍팍 튀는 부분들 분명 있고, 충분히 떡밥 회수를 못 해서 못 해서 약간 맥 빠지는 감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가 이토록 까일 만한 영화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시각적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영화라는 것만큼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비주얼이 다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비록 이 영화 내에서 모든 전후 상황이 설명되진 않을지언정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주제 자체는 이 영화 한 편으로 나름의 완결성을 지니며, ...그 주제도 결코 빈약하다 할 수 없다.이 영화를 이야기하는 데 앞서 이 영화의 제목과도 연관되어 있는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티탄 족인 프로메테우스가 인간들을 위해 불을 전달해 주었고, 올림포스 신 제우스가 그 벌로 프로메테우스를 묶어둔 채 그로 하여금 영원히 간을 쪼아 먹히도록 하였으며, 인간들에게는 판도라의 상자를 통해 재앙을 내렸다는 이야기. 비록 티탄 족과 올림포스 신이라는 차이는 있으나, 어쨌든 이 신화 속 절대자는 인간들에게 불이라는 선물도, 판도라의 상자라는 재앙도 주었다. 한 편,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준 대신 본인은 영원한 고통에 놓이게 되었고, 프로메테우스의 간은 영원히 재생과 소멸을 반복하게 되었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신이 준 불과 판도라의 상자, 프로메테우스의 자비와 희생, 프로메테우스의 간의 재생과 소멸, 이처럼 삶의 모티브와 죽음의 모티브가 연결되는 와중에 삶과 죽음의 수평적 관계가 드러난다는 점이 그 중 한 가지이다. 나머지 한 가지는, 조물주에게서 피조물에게로 불이라는 힘이 수직적으로 이동한다는 점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큰 틀에 있어서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영화 첫 장면에서 한 엔지니어가 자신의 희생을 담보로 인류에 불을 전달한 프로메테우스처럼, 검은 물질을 삼켜 스스로를 해함으로써 지구에 생명을 싹 틔운다. 영화 후반에 이르면 우리는 다른 엔지니어들이 마치 제우스가 판도라의 상자를 인간에게 내렸듯, 검은 물질들을 담은 항아리(판도라의 상자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를 잔뜩 실은 채 인류를 멸하기 위해 지구로 향하려 했음을 알게 된다. 영화는 이처럼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차용하되, 신화 속에서 드러나는 삶과 죽음의 관계를 수직적, 수평적으로 확장시키려 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검은 물질’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자. 이 검은 물질은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의 ‘불’의 역할과 ‘판도라의 상자’의 역할을 겸하고 있다. 엔지니어가 지구에 생명을 줄 때도 검은 물질을 사용하고, 다른 엔지니어들이 지구의 생명을 멸하려고 계획할 때도 검은 물질을 사용하고자 한다. 그 안에 이미 삶과 죽음을 모두 함축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검은 물질이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삶과 죽음을 수평적으로 두었던 것의 연장선 상에 있는 상징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기존의 프로메테우스 신화의 ‘불’과 달리, 이 영화의 검은 물질은 불을 꺼뜨리는, 불에 상반되는 에너지인 ‘물’에 반응한다. 바로 이 지점이,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언급됐던 삶과 죽음의 수평적 관계를 이 영화가 동적으로 확장시켜 나가는 부분이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불’은 곧 긍정적 모티브요, ‘삶’의 모티브이다. 바이럴 마케팅 용으로 피터 웨이랜드가 TED 강연을 하는 영상이 나온 바 있는데, 그 영상에서 웨이랜드는 프로메테우스가 인류에 전해준 ‘불’이 인류 최초의 기술이었다며 그로부터 이어져 온 인류의 기술 발전사를 읊다가, 그 끝에 인간의 로봇 창조를 언급한다. 즉, 그 역시 ‘불’을 ‘창조와 생명’의 에너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검은 물질을 통해 ‘물’이 등장함으로써 이것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영화 첫 장면, 엔지니어는 폭포 옆에서 검은 물질을 들이키고 물에 빠져 분해되어 지구에 생명을 태동시킨다. 여기서는 ‘물’이 곧 ‘생명’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듯 피터 웨이랜드의 말에 따르면 ‘불’이 곧 인류의 역사에서 ‘창조와 생명’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를 꺼뜨리는 ‘물’은 ‘죽음’이 되는 것인가? 실제로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물’에 반응하는 검은 물질이 인간에 악영향을 끼치는 장면들이 나오고, 이에 따라 ‘물’이 곧 ‘죽음’이 되는 이미지의 전복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뒤에 감염된 할로웨이와 파이필드가 화염 방사기에 죽음을 맞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다시 ‘불’이 ‘죽음’의 역할을 맡는 전복이 일어난다. 그 이후에 검은 물질을 실은 우주선이 지구로 날아가 인류를 멸하려 했음이 드러나면 또다시 ‘물’이 ‘죽음’으로 연결되는 전환이 이루어지고, 프로메테우스의 충돌과 우주선의 추락 장면에선 다시 ‘불’이 ‘파괴’, ‘죽음’의 모티브가 된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 검은 물질이 ‘물’에 반응한다는 점 때문에 ‘물’과 ‘불’이라는 상반되는 요소 사이에서 끊임없이 ‘삶’과 ‘죽음’의 모티브의 전복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는 이 영화가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삶과 죽음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삶과 죽음이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반복되는 일종의 순환 관계로 그려내려 함을 잘 보여준다.

 

  이 영화가 그려내는 삶과 죽음의 순환은 영화 속 창조에서도 드러난다.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옮겨온 맨 첫 장면에서 엔지니어의 죽음이 지구 생명의 창조로 이어지는 부분이 단적인 예이다. 영화 후반부 쇼가 엔지니어들이 왜 인간을 멸하려 한 것이냐고 묻자 데이빗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는 기존의 생명의 죽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즉, 죽음과 창조의 관계는 순환적이라는 것이다. 그 창조에 사용되는 검은 물질이 작용하는 방식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지렁이가 검은 물질에 반응하여 태어난 듯한 기괴한 생명체의 탄생은 밀번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파이필드는 죽었다가 변형 생명체로 되살아나더니 다른 인간들을 죽이려 한다. 감염된 할로웨이와 쇼의 섹스는 불임이었던 쇼 안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데(생명), 만약 쇼가 제왕절개를 하지 않았다면 다른 예로 추정컨대 이 생명체는 쇼의 몸을 뚫고 나오며 쇼를 죽게 했을 것이다(죽음). 결국 그 괴물은 제왕절개를 통해 쇼를 죽이지 않고 나온 대신 엔지니어를 죽이는 동시에 자신도 죽게 되며(죽음), 이는 엔지니어 몸 속에서 또 다른 새 생명체가 튀어나오는 것으로 이어진다(생명). 그 밖에도 영원한 삶을 부탁하고자 엔지니어를 찾았던 웨이랜드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나, 파이필드와 밀번이 서쪽에 ‘생명체’가 감지된다는 말을 듣고 그 쪽으로 가면 ‘죽을’ 것이라며 동쪽으로 가서 다른 ‘생명체’를 만나고 ‘죽는’ 것처럼 삶과 죽음이 역전되는 장면들을 그 외에도 더러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상으로 영화가 신경 써서 다루는 것은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이다.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는 불이 조물주에게서 피조물로 옮겨 간다. 그리고 피터 웨이랜드는 이 불이 인류의 로봇 창조로 이어졌다고 말한다(위에서 언급했던 바이럴 마케팅 영상에서 피터 웨이랜드는 로봇의 창조를 언급하고는 인간이 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피조물이었던 인간이 불의 힘을 빌어 조물주의 위치에 섬으로써 불의 수직적 이동이 반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 내에서 이는 엔지니어-인간-로봇의 수직적 관계로 드러난다. 제우스가 불이 인간에게 전달됨으로써 인간들이 신의 권능을 넘보게 되었다며 그것을 경계해 판도라의 상자를 내린 것처럼, 이 영화 속에서도 수직적 관계 상에서 위쪽에 선 존재는 그 아래에 선 존재들이 창조의 힘을 가질 것을 경계한다. 지구로 가서 인간을 멸하려다 사고로 계획이 중지되어 수면 상태에 빠졌던 엔지니어는, 인간들을 막상 대면하게 되자 잠시 경계를 푸는가 싶더니 데이빗의 머리에 손을 얹은 뒤엔 분노에 사로잡혀 인간들을 죽이기 시작하는데, 이는 데이빗이 인간의 피조물임을 알게 된 뒤 인간들이 그들의 권능에 도전했다고 여겨서가 아닌가 싶다. 한 편, 인간들 역시 계속해서 데이빗이 ‘피조물’의 위치에 있음을 상기시키려 한다. 웨이랜드는 데이빗에게 영혼이 없음을 강조하며, 프로메테우스 호의 사람들도 데이빗은 감정이 없으므로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 같은 경계에도 불구하고 불의 수직적 이동의 반복은 멈추지 않는다.

 

  위에서 말했듯 이 영화는 검은 물질, 즉, ‘물’을 ‘불’의 반대편에 위치시킴으로써 물과 불 모두에 ‘창조와 생명’의 이미지와 ‘파괴와 죽음’의 이미지를 함께 부여한 바 있다. 따라서 불 혹은 검은 물질이 조물주에게서 피조물에게로 이동했다는 것은 곧 창조와 파괴의 힘 모두가 피조물에게로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인간이 조물주로부터 피조물을 창조하고 파괴할 힘 모두를 물려받았다는 것은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해 보이며, 이를 드러내듯 영화 내에서도 비커스가 데이빗에게 전기회로를 끊어 버리겠다며 협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수직적으로 이동된 불 또는 검은 물질의 ‘파괴적 힘’은 결코 아래 쪽으로만 작용하지 않으며, 이 방향을 역전시키는 것이 바로 인간의 불로 탄생한 데이빗이다. 데이빗은 아래 쪽으로는 창조를, 위 쪽으로는 파괴를 시도하며 이 영화 속 수직적 관계에 파란을 일으키는 인물이다.

 

  영화 초반, 데이빗은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한 장면에 나오는 대사를 반복해서 왼다. 성냥불을 맨손으로 끄는 비법은 그것에 데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대사이다. ‘불을 끈다’, 프로메테우스의 불에서부터 로봇 창조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조물주의 위치에 두게 한 기술이 ‘불’에 기초한다는 피터 웨이랜드의 말을 상기해 보면, 데이빗의 그 대사는 꽤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데이빗은 할로웨이와의 대화에서는 ‘인간의 모든 것을 다 닮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고, 쇼와의 대화에서는 ‘누구든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그는 인간의 일부분을 꺼리는가 하면 인간의 죽음을 원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미 프로메테우스에 승선하기 전에 한 인간을 죽인 바 있다. 그 희생양이 바로 비커스이다. 지구에 남아 경영권 다툼을 하는 대신 프로메테우스에 승선한 데서, 캡틴이 ‘당신 로봇이냐’고 묻자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이겠다는 이유로 그와 섹스를 하는 데서, 또 팀원들에게 연구에 성과가 될 만한 것을 발견하면 자신에게 우선 보고하라고 말하는 데서 우리는 그녀가 로봇인 데이빗에게 열등감, 혐오, 경쟁심 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그것이 웨이랜드가 그녀보다 데이빗을 더 아끼기 때문이라는 것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데이빗은 웨이랜드의 실제 딸인 비커스의 존재를 누르고 실제 피가 섞이지 않았음에도 그의 충실한 아들 노릇을 함으로써 비커스란 인간을 죽인 셈이다(영화 내에서 비커스가 너무 하는 일이 없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애초에 비커스의 존재 의의 자체가 웨이랜드-데이빗-비커스로 이어지는 관계에서 데이빗이 인간을 대하는 방식을 강조하는 데 있기 때문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데이빗은 조사 중에도 목표 달성만을 위해 팀원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일도 서슴없이 행하며, 엔지니어가 인간을 죽이려 함을 알고도 태연하며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기도 한다.

 

  한 편, 그는 검은 물질이 담긴 항아리 하나를 몰래 빼돌려 할로웨이를 감염시키는데, 그를 감염시키기 직전에 데이빗은 할로웨이에게 ‘목표를 위해선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느냐’고 일부러 묻는다. 할로웨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데이빗은 검은 물질을 탄 술을 그에게 먹인다. 그 이전에 ‘작은 시작을 통해 큰 일을 이룬다’는 뉘앙스의 혼잣말을 한 점이나, 또한 쇼가 할로웨이와의 섹스 후 괴물을 임신한 것을 알고서도 괴물을 적출하지 않고 그녀를 그대로 잠재워 지구까지 데려가려 한 점으로도 보아, 그의 진정한 목표는 애초부터 웨이랜드를 조물주와 대면시키는 것이 아니라 검은 물질을 이용해 그 역시 조물주의 위치에 서는 것(그와 더불어 자신의 조물주인 인간이란 존재를 지우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쇼는 간신히 제왕절개에 성공하지만 그 괴물은 결국 살아남아 엔지니어의 몸을 통해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 이 지점에 이르면, 데이빗이 검은 물질을 이용해 조물주의 위치에 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 그의 피조물까지도 수직적 관계 상으로 훨씬 위에 위치한 엔지니어를 희생양 삼아 또 다른 피조물을 낳게 되어, 데이빗의 작은 시도가 조물주와 피조물로 이어지는 수직적 관계를 통째로 혼란에 빠뜨리는 엄청난 결과를 목도하게 된다.

 

  영화는 결말부에 이르러, 이러한 조물주와 피조물 관계를 더욱 확장시킨다. 쇼는 영화 처음부터 계속해서 기독교의 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데, 데이빗이 엿본 꿈에 따르면 이는 아버지의 영향이다. 그녀는 그 믿음 자체가 인류의 창조의 비밀을 찾는 동력이 된 듯 보이며, 때문에 심지어 엔지니어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영화 중반부에 이런 질문을 던진다. 엔지니어들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그 엔지니어들은 누가 창조했는가?(엔지니어의 머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머리가 터져버리자 데이빗은 ‘불멸은 아니군.’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데이빗 역시 그보다 더 상위의 존재를 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말부에 이르면, 그녀는 지구로 향하는 대신 엔지니어보다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창조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엔지니어들의 행성으로 향한다. 영화는 이를 통해 수직적 단계를 위쪽으로 더욱 확장시킨 것이다. 이 때 데이빗이 쇼와 동행하게 되는데 이것 역시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영화 마지막 부분에 쇼의 생존을 계속 확인하려고도 하고, 엔지니어가 쇼를 죽이러 가고 있음을 경고하기도 하더니, 그녀에게 자신을 데리고 다른 엔지니어 우주선을 타고 갈 것을 제안한다. 이는 단순히 그 곳을 벗어나기 위함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가 조물주의 위치에 서고자 함을, 또 이미 할로웨이를 통해 한 번의 성공을 겪었음을, 또한 그들이 탄 엔지니어의 우주선엔 역시 검은 물질들이 존재함을 고려할 때, 그가 또 다시 다른 생명체들을 검은 물질에 감염시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함으로써 다시금 조물주의 위치에 설 기회를 노리고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로써 영화는 데이빗의 영향으로 조물주와 피조물 간의 수직적 관계가 더욱 혼란스러운 미궁에 빠질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프로메테우스 신화 속 불을 물과 결부시켜 ‘창조와 생명의 힘’이자 ‘파괴와 죽음의 힘’으로 변환시키는 동시에 그 영향이 상하 양방향으로 모두 일어날 수 있게 함으로써, 신화 속 신-인간 간 수직적 관계를, 미지의 존재로부터 한 단계 혹은 수많은 단계를 거쳐서 엔지니어로 이어지고, 나아가 인간, 로봇을 거치더니, 거기서 인간 혹은 엔지니어 혹은 다른 생명체를 거치며 순환과 확장을 임의적으로 반복하는 양상으로 심화시켰다. 즉, 삶과 죽음이 조물주와 피조물이라는 수직적 관계 하에서 무한히 확장과 순환을 임의 반복하며 이어진다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차용, 변형시킴으로써 삶과 죽음이 수평적으로 또 수직적으로 미궁을 그려내며 반복되는 양상을 그려내고자 했다. 이는 곧 영화가 그려내는 우주 공간, 끝없는 죽음의 공간 너머 어딘가의 생명을 가정하게 되는 미지 그 자체의 우주와 어우러져 인간이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결코 온전한 해답을 얻어낼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그려낸다. 이러한 삶과 죽음의 미궁 같은 구조 속에서, 자신의 조물주를 찾아내 죽음을 정복하겠다는 웨이랜드의 모습은 더없이 우스꽝스러워지는 반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지속적으로 조물주와 피조물의 수직적 관계를 어그러뜨리며 삶과 죽음의 불가해함을 더욱 강조시키는 데이빗의 행동은 그 섬뜩함을 더하게 되고,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믿음을 바탕으로 그 끝에 영영 다다르지 못할 수도 있음을 가정하고서도 결코 자신의 뿌리에 대한 추적을 끝내지 않겠다는 쇼의 결단은 한없이 숭고해진다. 검은 물질, 엔지니어의 창조자, 그들이 겪은 사고 등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의문들과 함께 데이빗과 쇼의 이후 이야기들을 속편이 풀어내 주어도 좋겠지만, 이 영화 한 편으로도 이미 삶과 죽음의 순환성과 불가해함, 그 속의 인간 군상들의 어리석음 혹은 숭고함 등에 대해서 나름의 완결성을 가지고 충분히 이야기를 풀어냈다고 할 수 있다. 이 주제를 가지고 더 이야기를 풀어낸다면 오히려 동어 반복이 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나의 신화로부터 이야기를 확장시켜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나아가 이를 SF 장르 영화에 이식시켜 놀라운 비주얼로 구현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군데군데 꽤 아쉬움이 묻어나는 영화이긴 하나, 노장 리들리 스콧이 자신이 30여 년 전에 잠시 머물렀던 그 세계로 돌아가 그간 수많은 영화 작업으로 농익은 솜씨를 펼치며 현재의 그에 어울리는 묵직한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그 자체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제 가치를 다 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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