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하기 싫어서 틈틈이 쓰다보니까 엄청 스압. 저처럼 일하기 싫어서 몸을 뒤트는 분들만 읽으시길. 


0. 약간 신기하게 잘못 온 카톡을 받고 여는 글입니다. 
(글쓰기 버튼을 누르면서 생각한 건데 그 잘못 보낸 카톡을 받았어야 할 원주인이나 발신자분이 듀게분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네요.) 

카톡 발신자는 모르는 분. 근데 메시지 내용을 읽어보면 
제 이름도 맞고, 전공도 맞아서 저한테 온 게 맞나 한참 들여다보고 생각을 더듬어보고 하다가  
아무래도 아닌 거 같아서 '잘못 보내신 거 같아요' 라고 했더니 정말 잘못 보내신 거더군요! 

근데 어떻게 이름이랑 전공이 같아 몰라뭐야무서워.. 
라고 생각했는데 돌아서서 다시 생각해보니 그렇기 때문에 그냥 전공무리의 누군가가  
연락처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생길 수 있었겠구나 했습니다. 이쪽은 오히려 납득 가능한 우연. 

물론 제 이름이 성이랑 합쳐지면 그렇게 흔한 이름은 아니고,  
전공무리 쪽에서도 제가 그렇게 중요한 인재가 못 되어서 아는 사람만 아는 무존재에다가  
가끔 이름 모를 선배님한테 단체문자 같은 거 오는 정도 밖에는 과생활도 안했는데 어쩌다 이런 일이?! 누가 내 번호를 (실수지만) 나 모르게 퍼뜨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분개할 정도로 잦은 일은 아니니까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1. 근데 진짜 모를 우연이 있었죠. 고등학교 때 친구A랑 아파트 놀이터에서 그네 타다가 (...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이여..) 
친구B에게 문자를 하던 중이었어요. 당시에 저는 알ㅋ이 없어서 아빠폰을 들고 나와서 아빠폰으로 친구한테 문자를 보내던 중이라, 문자 받는 친구 번호를 일일이 입력해야 했는데 
당시에 보내던 문자내용은 담임선생님이 득녀하신 내용.. 그 선생님은 딱봐도 딸바보상이다 이제 딸바보 예약이다 뭐 그런 내용이었는데 
제가 친구B의 번호를 누르다 하나를 틀리게 누른 거죠.  

돌아온 답장은 '잘못 보내신 거 같다, 근데 우리학교 영어선생님도 오늘 딸 태어났다고 자랑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신기하네요ㅋ' 라길래 
'어머 그러게요 XX고는 아니시죠?' 했는데 XX고 맞았......... 

심지어 저희학교는 신설교라 제가 속한 한 학년 밖에 없었거든요. 몰라뭐야무서워...  

그 친구랑은 결국 무슨 핑계였는진 몰라도 학교 후문에서 만나서 엄청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엄청 어색하게 얘기를 하고 제가 속한 동아리의 영상을 재밌게 봤다는 그 친구의 친구를 소개받고 하는 별의 별 일들이 있었지만  
그냥 그러고 흐지부지 연락하지 않는 사이가 됐던 기억이 나네요. 

요런 문자 잘못 보내기 우연은 생각보다 많은가봐요. 
이건 제가 들은 다른 얘기. 예전에 들은 거라 정확히는 기억 안 나서 틀릴 수도 있는데 듀게에서 제가 1번의 얘기를 했었을 때 누가 댓글로 말해주셨던 건지.. 
하여튼 문자를 잘못 보냈던가 전화를 잘못 걸었던가 했는데 알고보니 같은 아파트 같은 동 같은 라인의 다른 층 사람이었던 거! 
근데 나이도 동갑인가 그랬던 거! 이 경우도 뭔가 로맨스로 발전했으면 대단히 만화같은 이야기겠지만 그렇진 않았단 거! 


3. 최근에 겪은 다른 우연. 어제 카톡을 하다가 무심결에 프루스트라는 이름이 튀어나왔어요. 
그냥 흘러가면서 쓴 이름이지만 순간적으로 '아, 내가 그 책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한 게 몇 년인데 아직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빌려올 생각도 안했네' 
라는 생각 정도는 했거든요. (엊그제 도서관 가서도 한없이 가벼운 에세이집만 빌려왔어요 =.=)

근데 영화를 보러 들어갔더니 첫 시퀀스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프루스트로 처덕처덕한 영화지 뭡니까. 

저한테 있어서 마르셀 프루스트는 그냥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이고,  
'좋은 글이네요. 물론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같은 존재이지만.. 3년에 한 번 입에 담을까말까 할 정도로 희미한 연결고리를 가진 뭔가를 
하루에 두 번이나, 게다가 난데없이 조우하니까 신기하고 반갑더군요. 

※ 아래에는 <훌리오와 에밀리아>라는 영화의 내용설명 같은 게 있어요. 

제가 본 영화는 <훌리오와 에밀리아>라는 칠레 영화였는데, 첫 장면이 아마 강의실일 겁니다.  
'프루스트 읽어본 사람?' 이라는 교수의 질문에 강의실의 학생 몇 명이 손을 들고, 남자주인공 훌리오는 다른 학생들이 손드는 걸 눈치보다가  
덩달아 손을 들죠. 다음 장면에서 도서관에 간 주인공은 그 책을 대여해오구요. 

훌리오는 에밀리아와 둘이 있게 됐을 때 에밀리아는 훌리오에게 (대화를 하다가 그 책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아직까지 안 읽었어? (이번에 처음 읽는 거야?)' 라는 식으로 묻고, 훌리오는 막 얼버무려요. 
'아니 전부 읽긴 읽었는데 1권만 읽었어' 라는둥 횡설수설. 
훌리오는 역으로 에밀리아에게 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봤냐고 물어보고, 
에밀리아는 읽어봤다고 합니다. 훌리오는 약간 당황해서 반문하죠. 다 읽었다고? 에밀리아는 지난 여름 휴가 때 일곱 권 다 읽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8년 후의 시점, 혹은 위의 이야기가 소설이라고 가정했을 때 소설 밖의 시점에서  
'두 사람 다 분명히 프루스트를 읽어본 적 없을 거야' 라고 제3자가 말해요. 

다시 8년 전, 혹은 소설 속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위의 대화를 나눈 후 시간이 경과한 뒤입니다. 훌리오와 에밀리아는 동거중입니다. 
훌리오는 갑자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권을 사와요. 하루에 한 페이지씩 잠들기 전에 낭독하기로 합니다. 
그렇지만 결국 두 사람은 그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해요.  


쓰고보니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이라는 책이 생각나요. 재밌게 읽었던 책 중에 하나인데요. 
그 책의 예에도 꼭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나왔죠, 아마.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나 토마스 만의 [마의 산] 같은 책과 함께요. 
그렇게 생각하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저 책은 '정말 읽기 힘든 책', '읽고는 싶고 읽어야 할 것 같긴 한데 잘 안 읽히는 책'의 대명사격이 돼버렸나봐요. 

하지만 듀게에는 읽은 분들이 꽤 많으실 거 같고.. (그렇게 어려운 책도 아닌데요? 라는 댓글이 달릴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 
실제로 다시 시도해보면 별 게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은 들어요. 저도 고등학교 때 1권만 대출했다가 앞의 몇 페이지에서 늘 막혔던 기억은 있지만요.
영화에서 계속 반복되던 도입부, 그러니까 수학의 정석의 집합 같던 그 대목을 계속 듣다보니까 꼭 한 번 재도전하고 싶어졌어요. 

근데.. 감독은 이 책 읽었겠죠? :-b 


4. <훌리오와 에밀리아> 첫 장면을 묘사하다보니 떠오른 기억. 이것도 우연이라면 우연이에요. 
학교 처음 입학하고 전공수업시간에 대한 기억 중에 하나는, 
교수님이 홍상수 감독 얘기를 꺼내는데 (영화수업이었..) 학생들이 너무 해맑게 그게 뭥미.. 하는 표정으로 앉아있었어요.
 
약간 충격받은 교수님이 '홍상수가 누군지 아는 사람? ...아니 그럼 홍상수 영화 한 편이라도 본 사람?' 하고 손을 들게 하는데  
첫 번째 질문에 손 들었던 사람이 저 포함 세 명인가, 한 편이라도 본 사람은 저 포함 두 명이었는데 그 때 손을 들었던 나머지 한 명의 남자애도 저처럼 존재감 티미한 애였습니다ㅋ... 

제가 과동기들보다 나이가 한 살 많았는데, 그 친구도 한 살 많았죠. 그렇다고 해서 말을 섞거나 하는 일은 잘 없었어요. 
제가 좀 사교성제로에, 친화력 있거나 붙임성 있는 타입이 아니라서.. 딱봐도 걔도 그런 과 같았구요. 
솔직히 말하자면 안중에도 없는 동기였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입학초엔 멘붕이 와서 모든 일에 아웃오브안중 상태로 학교를 다녔습니다ㅋㅋ) 
하루는 전공 연강 수업이 있던 요일이었나.. 그랬을 거에요. 

극장에 영화를 보러갔는데 걔가 있는 거에요. 관객도 가뜩이나 몇 없었는데,  
영화는 심지어 왕빙의 <철서구>였어요. 런닝타임이 9시간이 넘는.. 

그 전에 따로 말도 나눠본 적 없는 사이인데 저도 모르게 너무너무 반가워서 '어?! 야 너 여기 왜있냐?! 수업은?!!' 하고 엄청 격하게 아는 척을 합니다.
서로 화들짝 놀라고 몇 마디 나누고는 (엄청 멀찍이 따로 앉아서) 영화를 봤어요. 중간중간에 인터미션이 30분씩 두 번인가 있었는데 그냥 전 혼자 끼니해결하러 가버림ㅋ....  
시간이 모자라서 인터미션 시작하자마자 뛰어나가서 후루룩 밥 먹고 다시 뛰어들어와서 보고 그랬어요. 

영화 다 끝나고 나서 걔랑 멋쩍게 마주쳐서 그 친구가 '근데 너 쉬는 시간에 어디갔었냐' 하는데  
아차, 보통의 사회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타이밍에 같이 빵이라도 먹자고 했었어야 되는 거였구나 그게 자연스러웠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ㅋㅎㅎㅎ

끝나고 극장근처를 한시간인가 뱅뱅 돌면서 그 친구 기숙사 통금시간 될 때까지 얘기를 했는데 
살아온 궤적이나 성격이 놀랍도록 비슷한 거에요. 귀찮은 거 싫어하고 약간 만성무기력같은 느낌에,
학교 1년 늦게 들어온 것도 '대학을 꼭 가야하는 걸까..'라는 남이 보기엔 소신있는 선택같아보이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그냥 나태하기 짝이없는 엄청 안이한 이유로 
1년을 잉여로 보냈던 것도 그렇고, 고3 때 유일하게 지원했던 다른 학교에 2차에서 떨어지고, 두 번째 쳤을 땐 1차에서 떨어져버려서 지금 이 학교에 왔다든가 하여튼 비슷한 구석이 많았어요. 

그 뒤로 별 교류는 없었죠. 가끔 다른 동기들이랑 이야기하다가 제가 무슨 말을 하고나면 '어? 누나! 누나가 한 그 말 XX형도 똑같이했었는데 ㅋㅋㅋ' 라고 할 때는
걔랑 정말 비슷한 사고를 하고 비슷한 인생 레파토리를 갖고 있단 생각은 했어요.
보통의 수순이라면 이성적 호감 같은 게 생길 타이밍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기엔 저랑 너무 징그럽게 비슷해서 ㅋㅋㅋ 
반갑고 신기한 감정 말곤 없었던 게 함정... 또르르... 
그리고 저도 휴학하고 걔도 휴학했어요. 그러고 얼마 안 돼서인가 시네마디지털영화제를 보러 서울에 갔어요.
저는 또 좋다고 과티 입고 상경을 했는데 (과에 대한 소속감이나 애교심은 없는데 과티가 예뻐서 그냥 과티만 좋아함) 극장 앞에서 그 친구랑 딱 마주쳤죠!
그 날도 압구정 CGV 근처를 좀 걸으면서 영화얘기하다가 헤어졌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네요ㅋ 
한 쪽이라도 좀 친화력이 있었으면 더 친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이 친구랑은 언젠가 또 우연히 만나서 싱겁게 얘기나눌 수 있을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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