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 소설

2012.11.18 22:23

ML 조회 수:4416

스포일러 있습니다.

 

 

주인공 엘리슨 오스왈트는 소설 쓰는 일로 아내와 두 아이를 먹여 살리는 가장입니다.십년 전 출판한 켄터키 블러드가 흥행에 성공하면서 돈도 벌고 방송 출연까지 했지만,후속작들에 대한 독자들 반응은 그저 그런 모양입니다.그런 그가,재기를 꿈꾸며 온 가족을 이끌고 일가족 중 네 명이 사망하고 한 명은 실종된 폐가로 이사를 옵니다.경찰이 포기한 살인 사건을 스스로 조사해 실화소설로 옮겨 켄터키 블러드의 영광을 되찾을 계획인거죠.

 

이사 첫날,그는 다락방에서 전에 살던 사람이 놓고 간 것으로 보이는 상자 하나를 발견합니다.그리고 그 상자 안엔 놀랍게도 수 세대에 걸친 일가족 연쇄살인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들어 있네요.즉시 경찰에 신고하려던 그는 애초에 이사온 목적을 떠올리며 직접 사건 조사에 나섭니다.

 

영화 〈살인 소설〉은 추리물이자 공포물입니다.미제의 살인 사건을 조사한다는 점에서 추리물이고,추리 과정에서 주인공이 겪는 온갖 괴이한 상황들은 다 공포 영화의 도구들이죠.전 지금 추리물로서의 〈살인 소설〉과 공포 영화로서의 그것을 구분해 이야기하려 합니다.공포물로서의 〈살인 소설〉은 대단히 성공적이지만,추리물로서는 심각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거든요.

 

먼저 공포물로서의 〈살인 소설〉부터 살펴보죠.영화가 관객을 겁주기 위해 만든 장치들은 어느 것 하나 뺄 것 없이 모두 효과적입니다.무서우라고 넣은 장면들이 정말 다 무섭단 얘깁니다.이들의 장기는 다락방에서 발견된 동영상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방식에서 특히 빛을 발합니다.앨리슨이 보는 살인 동영상엔 사람이 산채로 불타 죽거나 잔디깎기에 머리통이 날아가는 장면 따위가 담겨 있습니다.그런데 영화가 이 동영상을 앨리슨의 시선을 넘어 관객에게 전달할때엔 그 수위를 고의적으로 한 단계 낮추고 있습니다.효과음 따위로 관객을 자극하거나 훼손되는 신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대신,영상의 소리를 삭제하고 잔인한 장면에선 고개를 돌려버리는 식이죠.결국 피해자들 입에서 터져 나왔어야 할 비명은 고스란히 관객의 몫이 되고,신체가 훼손되기 직전 겁에 질린 피해자들의 표정은 그대로 관객의 표정이 됩니다.선혈이 낭자하는 것보다 훨씬 공포스러운 겁니다.

 

가학적인 쾌감에 대한 이야기도 해야겠군요.극단적인 장면에서 고개를 돌리는 연출은 앨리슨이 보는 동영상을 더 무섭게 느껴지도록 하는 효과도 있지만,죄책감을 일정량 덜어 해당 영상을 간접적으로 목격하는 관객으로 하여금 가학적인 쾌감을 느끼도록 하는 효과도 있습니다.공포심과 쾌감이 뒤섞이면 남는 건 결국 묘한 불쾌감이죠.네,국내에 〈살인 소설〉이란 제목으로 개봉한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이 바로 sinister,‘불쾌감’입니다.글 쓰다 미쳐가는 가장의 이야기란 점에서 〈샤이닝〉과 닮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평론가들이 여기저기 보이는데요,전 불쾌감이라는 감정에 주목하고 또 그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동영상’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여러차례 리메이크된 일본 영화 〈링〉이 떠올랐습니다.영상 속 인물이 갑자기 튀어나오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서늘하면서도 끈적거리는 질감 만큼은 〈링〉의 그것을 능가하더군요.

 

주인공이 살인 사건의 전말을 추리하기 위한 증거로 동영상 자료를 획득한 덕에,영화는 극의 구조적으로도 이득을 봅니다.제대로 된 ‘이야기’가 나오기 전 공포스런 시각적 자료부터 마구 풀어버릴 수 있게 되는 거죠.영화 〈살인 소설〉에서는 보통 공포영화의 절정부에나 한 번 나옴직한 장면이 첫장면부터 쏟아집니다.무서운 장면 기대한 관객들은 예열 단계도 없이 쏟아지는 살생과 비명의 향연이 무척 즐거웠을 겁니다.

 

자,이렇게 주인공에게 주어진 증거를 줄줄이 나열하는 도입부를 지나,조각난 증거들을 재편집하는 영화의 중반 단계에 이르면 공포는 점점 더해집니다.실마리를 풀면 풀수록 나오는 건 범인의 정체나 범행의 동기가 아니라,‘다음 희생자는 나’라는 끔찍한 현실이거든요.더 무서운 건,다음 희생자가 나와 내 가족임이 분명함에도 점점 더 벗어나기 힘들어지는 주인공의 심리 상태입니다.영화는‘가장’으로서 돈을 벌고,‘위치’를 지켜야 하는 이타적인 의무감이 각각 ‘물욕’과 ‘명예욕’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으로 변하고,이런 본능적 욕망이 주인공의 병리적 심리 상태와 맞물려 급기야 광기에 이르고 마는 과정을 대단히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습니다.결국 늪에 빠진 들짐승처럼 허우적거리다 그 집을 나올 결심을 하지만,늪에서 나오기 위해 잡은 구원의 손길이 결국 덫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영화의 후반부는 그야말로 비명밭이죠.

 

하지만 그렇게 한시간 삼십분 가까이 ‘무서운 동영상’을 보며 추리해서 나온 결론이 결국 ‘초자연현상’이라는 결말에 이르면 관객은 무척이나 맥이 빠집니다.‘추리’란 게 뭡니까.논리 따져가며 이치와 인과를 따지는 것 아니겠습니까.‘초자연’은 뭔가요.논리적으로 설명이 안되는,인과관계를 설명하기 힘든 걸 얘기하는 거잖아요.두시간동안 그렇게 고생해 앞뒤 따지려 애를 썼더니 나온 결말이 고작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니,추리물로서는 해도 너무한 결말인 겁니다.


그러나 영화의 비중이 ‘추리’보다는 ‘공포’에 더 쏠려있는 덕에,전반적인 완성도는 준수한 편입니다.사건을 추리하는 주인공이 경찰이 아닌 소설가이다보니,당연히 범인 검거보다 ‘이야기’와 ‘분위기’가 더 중요시되고,그로 인해 추리물로서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이죠.완벽한 영화는 아니지만,적어도 무서운 것 보러 온 관객들을 만족시켜줄만한 요소들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홍주희 번역이 왠일로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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