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능적인 시들.

2013.01.23 11:55

어떤밤 조회 수:2176

   

오늘도  눈이 내렸다가, 비가 내렸다가 할 모양이네요..

 

 

학창시절  눈을 다룬 시구 중  가장 좋아했던 것은
김광균의 '설야'에 등장하는  '먼데 여인의 옷벗는 소리'라는 구절이에요.

부드러운 실크가 아니라, 사락사락 소리가 나는
다소 빳빳한 질감의 모시천 일 것 같은 느낌.
 
새햐얗고 속이 비치는 그러면서도 꼿꼿한 한복속곳을
천천히 스르륵 벗는 정경이 연상되는데 

한번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질감 때문에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새하얗고 둥그런 어깨가 드러날 것 같았어요.

이렇게 관능적이고 우아하게 싸락눈의 여운을 표현할 수 있다니 싶어서 감탄이 나왔습니다. ㅎ
 
 

 

 


이것과 비슷한 느낌의 시는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인데
 '세상 같은건 더러워서 버리는' 초연한 마음에
눈이 푹푹 쌓인,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에서

나와 나타샤는 사랑을 하고,

흰 당나귀는 좋아서 응앙응앙 우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어요.
어느새 벌써 고조곤히 와 내 속에 와 속삭이는 나타샤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렇게 눈과 나타샤를 연결짓다 보면, 생각나는 시는
박정대의 '그 깃발, 서럽게 펄럭이는'입니다.

 

이 시는 강신주님의 소개로 처음 읽었어요.

읊다보면 한여름의 작열하는 태양이 떠오르는데
옥타비오 바스-옥탑 위의 빤스로 이어지는 언어유희도 재밌고
옥탑방 위의 빨래줄에 속옷을 너는 날씬한 긴머리의 여자가 떠올라서

묘하게 에로틱해요. :)
 
건조한 표백제 냄새와 빨래를 털 때 튀는 작은 물방울들.
새하얀 메리야스와 조찰한 팬티들.

끈적이는 바람과 혹서 속에 내리쬐는 햇빛들..이

옥타비오 바스가 글을 쓰고 있었을 멕시코의 한 지역을 생각나게도 합니다.
 


 
젊은 시절 옥탑방 위에서 매혹적인 여인과 사랑을 나누었던 시인의 기억이
창 건너 옥탑방을 바라보며 다시 떠오르게 된 것인데
이제는 그런 행위들이 주책맞은 금기가 된 중년의 나이에
희미해져버린 청춘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시인의 말처럼 서럽네요.
 

시인처럼 중년의 나이가 되었을 때 다시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져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5239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379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2296
126071 [왓챠바낭] 전 이런 거 딱 싫어하는데요. '헌터 헌터' 잡담입니다 [4] new 로이배티 2024.04.25 146
126070 에피소드 #86 [2] update Lunagazer 2024.04.25 37
126069 프레임드 #776 [2] update Lunagazer 2024.04.25 36
126068 ‘미친년’ vs ‘개저씨들‘ soboo 2024.04.25 407
126067 Shohei Ohtani 'Grateful' for Dodgers for Showing Support Amid Ippei Mizuhara Probe update daviddain 2024.04.25 33
126066 오아시스 Be Here Now를 듣다가 catgotmy 2024.04.25 64
126065 하이에나같은 인터넷의 익명성을 생각해본다 [1] 상수 2024.04.25 207
126064 민희진 사태, 창조성의 자본주의적 환산 [8] update Sonny 2024.04.25 662
126063 3일째 먹고 있는 늦은 아침 daviddain 2024.04.25 95
126062 치어리더 이주은 catgotmy 2024.04.25 165
126061 범죄도시4...망쳐버린 김치찌개(스포일러) 여은성 2024.04.25 290
126060 다코타 패닝 더 위처스, 난 엄청 창의적인 휴머니스트 뱀파이어가 될 거야(...), 악마와의 토크쇼 예고편 [3] 상수 2024.04.25 159
126059 요즘 듣는 걸그룹 노래 둘 상수 2024.04.24 148
126058 범도4 불호 후기 유스포 라인하르트012 2024.04.24 197
126057 오펜하이머 (2023) catgotmy 2024.04.24 83
126056 프레임드 #775 [2] Lunagazer 2024.04.24 29
126055 커피를 열흘 정도 먹어본 결과 [1] catgotmy 2024.04.24 182
126054 [넷플릭스바낭] 몸이 배배 꼬이는 3시간 30분. '베이비 레인디어' 잡담입니다 [6] 로이배티 2024.04.24 321
126053 프렝키 더 용 오퍼를 받을 바르셀로나 daviddain 2024.04.24 42
126052 넷플릭스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 감상 [6] 영화처럼 2024.04.24 216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