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르'를 봤습니다. 고통스러웠어요. 이 영화를 보는데 어디선가 본 기사들, 그리고 프랑스에 있을 당시 기사와 함께 화제가 됐던 'D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이 생각났어요. 그 책은 불치병에 걸린 아내에게 보낸 사랑의 편지들을 묶어서 낸 책으로, 유명한 철학자가 아내와 동반자살해서 꽤 화제가 되었죠. 프랑스에서는 물론, 여기에서도 그랬던 것 같아요.


 불과 얼마 전에 제자의 연주를 들으러 갔는데 돌아와서 바로 안느는 아프고 이내 몸에 마비가 옵니다. 쉽고 별 일 아니라는 수술이 잘못 되어 5%의 나쁜 확률에 걸립니다. 죽음은 안느의 말처럼, 인생이 너무 긴 것처럼 천천히 진행됩니다. 그러나 도둑처럼 갑자기 찾아오긴 해요. 깜짝 방문을 한 옛 제자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안느는 그 이야기를 하고 쉽지 않아 합니다. 다른 많은 것들에서도 그랬지만 이 노부부의 자존심을 짐작하게 했어요. 음악이 갑자기 끝나고(끊어지고) 모든 장면이 이상하게도 가차없이 잘려서 압박감이 상당했어요.


 집안에 두 번째 들어온 새를 잡을 때 많이 긴장했습니다. 아마도 바로 전에 안느가 죽었기 때문이겠지만 문을 잠궈 나가면서 새를 쫓는 장면에서 뭔가 끔찍한 걸 보게 될까봐 불안했습니다. 새는 공포스럽지만, 새를 잡는 것도 공포스럽습니다. 물론 인간에 비해 새가 작고 연약하긴 해요. 담요에 싸인 버둥거리는 새를 안고 있는 조르주의 모습은 슬펐습니다. 그리고 편지에 새를 잡았지만 풀어줬다고 씁니다. 자유롭게 해줬다고 쓰는 걸 보면서 저한테는 죽이려는 게 아니라 자유롭게 해주려고 했다고 다시 한번 말해주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요, 그걸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말하겠나요. 조르주가 안느에게 해준 게 그런 거죠.


 자식조차 도움이 안되는 고통스런 일상에서 도움은 받고 고맙다고 인사도 하지만 늘 어딘가 바쁘게 돌려보내고 둘이 남아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점차 고립되어가는 삶의 모습이 안쓰러웠습니다. 제 몸처럼 익숙한 사랑, 일 거라고 짐작되는 이의 고통조차 둘이 떠안을 수는 있지만 온전히 한 몸으로 느끼지는 못하는데 자식이야 자기 인생을 살아나가니 당연한 말이죠. 영화에서도 조르주가 그렇게 말하고요. 문은 열리고 사람들은 간혹 드나들지만 대부분 집안에 갇혀 생활하다가, 마침내 집이 관이 되어 영화가 끝나고 맨 처음의 문을 여는 장면이 생각났을 때 서로가 서로를 이끌어 자유롭게 해주는 사랑에 대해서, 끔찍하다고 말하면 안될 테니 고통스러웠다고만 하겠습니다. 안느가 인생이 길다고 말한 것처럼 인생은 아름답다고도 말했는데 그걸 동감하기엔 영화가 보여주는 현실이 당장 너무 무거웠어요. 어쩔 수가 없기 때문이죠. 거기엔 잘못된 선택이나 우연한 실수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불운이 섞였을 뿐 생로병사의 이야기니까요. 안느에게 들려주던 어린 시절의 캠핑 이야기에서 조르주가 엄마와 괴롭고 맘에 안 들면 별을 그려보내기로 했던 약속대로, 엽서에 별을 잔뜩 그려 보냈다고 했을 때 그 때 아주 잠깐 웃을 뻔 했어요. 괴로움조차 별을 잔뜩 그리는 걸로 나타낼 수 있다면 얼마나 귀엽고 예쁜가요. 적어도 사랑이 꽃도 되었다가 암담한 밤에 별처럼도 될 수 있으니 그래도 이건 사랑이야기야, 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래도 이 영화는 보지 말 걸 그랬다고 뒤늦게 후회를 했습니다.


 파리에서 아주 커다란 우박이 떨어지고 어두컴컴해지던 어느 오후, 가게의 차양 아래에서 우박을 피하던 노부부의 모습이 생각났어요. 눈에 담아두었던 풍경입니다. 사실 그들이 책상 앞에 나란히 앉은 아이들처럼 잘 어울리면서도 귀여운 느낌이 묻어나고 그러면서도 차양 아래 다소곳이 서 있는 모습이 기묘하게 우울해보이기도 하고 체념한 듯 보이기도 해서, 인상에 남았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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