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스터

2013.07.13 10:28

menaceT 조회 수:4084


The Master (2012) 

 

7월 11일, CGV 압구정. 

 

(스포일러 있음)

 

  영화는 화면 전면을 가득 메우는 물의 이미지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물이 아니다. 그곳은 배가 지나가는 자리이며, 그 흔적을 따라 포말이 부서지고 있다. 그리고 이때 그 물을 바라보고 있는 카메라의 시선은 배의 후미에서 바라보는 시선임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다. ‘배’의 존재를 전제하는 ‘물’의 모습, 영화는 이 장면을 영화 전체를 통틀어 세 번에 걸쳐 보여준다. 어쩌면 이 세 번의 사인을 통해 우리는 영화를 3부로 나누고, 이를 통해 영화의 핵심에 다다를 수 있을지 모른다.

 

  1부의 시작을 알리는 물의 이미지가 화면 전면을 채우는 장면 이후에는 군모를 쓴 채 배에 앉아있는 프레디 퀠의 얼굴이 화면에 보인다. 첫 장면의 물의 이미지는 ‘배’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은 전제되어 있던 ‘배’의 존재를 전면으로 끌어와 그 ‘배’ 위의 프레디 퀠이란 인물을 조명하는 동시에 다시 ‘전쟁’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런데 그 다음 일련의 장면들에서는 프레디 퀠이 다른 전우들로부터 괴리됨을 알 수 있다. 동료들이 해변에서 레슬링을 하며 노는 동안 프레디는 야자수를 따고 자신만의 술을 제조한다. 또한 그는 사면발니와 성기에 관한 농담을 하더니, 전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래 여인의 나체에 대고 섹스를 하는 시늉을 하다가 홀로 바다 쪽으로 가 자위를 한다. 승전의 소식이 들려오는 와중에도 그는 자신의 술을 제조하기 위한 재료를 구하는 데 열중하고, 그 다음 장면에서는 카메라 가까이 높은 곳에 드러누워 있는 프레디를 향해 저 멀리 아래 쪽에 서 있는 자들이 무언가를 집어 던지고 있다. ‘전쟁 이후의 삶’ 운운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군인들의 면면을 보여주는 장면에서도 프레디의 얼굴은 배제되어 있다. 다만 그 다음 장면에서 프레디가 홀로 로르샤흐 테스트를 받는 모습이 이어질 뿐이다. 그는 테스트 상의 모든 그림들을 남성 혹은 여성의 성기에 관한 것들로 해석한다. 한 편, 그 뒤 상관과의 인터뷰에서는 프레디가 ‘야뇨 증상’을 겪고 있으며, ‘아는 여자 동생’의 편지를 받고 향수병에 눈물을 흘렸으며, ‘어머니’의 꿈을 꾸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프레디가 ‘전쟁 이후의 삶’을 꾸리기 이전의 이 장면들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배 위에서 전쟁을 겪었으나, 같이 전쟁을 겪은 전우들과 한 덩어리인 동시에 그들로부터 괴리되어 있다. 또한 그는 배변 문제를 겪고(이후에도 그는 방귀를 뀌어대거나 상대방의 얼굴에 방귀를 뀌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항문기적 특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여체 및 성기에 집착하고(남근기적 특징), 술을 만들기 위해 이 액체 저 액체들을 모두 입에 대고 삼키는 등(또한 그는 모래 여체의 유두를 빨고 후에 그 모래 가슴 옆에 눕기도 한다. 이는 구강기적 특징에 해당한다.), 사회에 편입되기 이전(외부의 무리에 관심을 가지는 잠복기에 들어서기 이전)의 미성숙한 유아적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다. 한 편, 그의 인생에는 두 명의 여성, ‘아는 여자 동생’, ‘어머니’가 존재했고, 현재 그 두 여성은 모두 그에게 부재한 상태이며, 아마도 이것이 전쟁의 경험과 맞물리며 그의 미성숙 상태로의 퇴화를 촉진시켰으리라.

 

  이러한 상태에서 프레디는 전쟁 이후의 삶으로 백화점 사진사로서의 삶을 택한다. 그가 찍는 이들의 모습은 대부분 남편, 아내, 부부, 자녀들 등 ‘가족’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영화가 이를 제시하는 데 있어서, 사진 촬영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을 보여줄 때는 카메라가 곧 프레디의 시점이 되어 이들을 바라보지만, 다시 프레디를 보여주고자 할 때는 카메라가 곧 사진 촬영 대상의 시점이 되어 프레디를 바라본다. , ‘가족’을 전제로 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과 프레디의 세계를 완전히 분리해 두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된 상관과의 인터뷰 장면에서 어머니의 꿈 이야기를 하는 부분을 상기해 보자. 상관은 맨 처음 이를 표현하는 데 있어 ‘vis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프레디는 이를 ‘dream’이라 수정한다. 그에게 있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이 함께 테이블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웃는 모습은 자신의 현실과 연결되어 있는 ‘vision’이 아닌 현실과 명백히 분리되어 있는 ‘dream’이며, 곧 그에게 그러한 온전한 가족의 모습은 자신의 현실과 분리되어 있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다. 이 점이 그가 사진 촬영을 하는 장면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나는 셈이다.

 

  그는 백화점에서 한 여자와 교류를 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이 교류는 ‘어머니’의 부재, 그리고 이를 대체할 수도 있었을 편지 속 ‘아는 여자 동생’의 부재를 다시 대체하며 그에게 여태껏 부재해 있던 ‘가족’을 선사하고 그를 구원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딘가 그를 닮아 있다. 그녀는 백화점 안을 돌아다니며 옷을 판매하는데, (자막으로는 계속 $49.99라고 나오긴 하지만) 계속해서 $49.99, $49.94, $49.95 등으로 가격을 다르게 말한다. 이는, 전쟁이 끝나고 배에서 내린 프레디가 새로이 마주하게 된 전후의 불확실한 삶 그 자체를 닮아 있다(그녀가 백화점 안을 돌며 옷을 파는 롱테이크 장면이 후에 프레디가 손님과 난동을 벌이는 롱테이크 장면과 맞물리며 다시 한 번 유사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프레디는 자신처럼 어딘가 결핍된 혹은 불안정한 듯 보이는 그녀에게서 전쟁 이후 자기 자신의 불확실한 생 그 자체를 보고 동질감을 느낀 듯 자신이 만든 술을 나누어 마시더니, 나아가 그녀가 자신의 결핍을 해소할 수 있으리란 것을 확인 받으려는 듯 그녀의 여체, 그 중에서도 (모래 여체의 가슴을 탐했듯) 그녀의 가슴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가 여태껏 자신의 결핍을 잊으려 의존해 왔을 술 때문에 그는 자신의 데이트를 망치고, 그는 이러한 분노를 ‘아내를 위해 사진을 찍으려 하는’ 손님에게 표출한다.

 

  그 뒤 그는 살리나스에서 밭일을 하지만, 이곳에서도 자신이 만든 술을 마신 노인의 건강에 문제가 생겨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이때 그가 독을 탔다고 몰아세우는 목소리는 여성으로부터 나오고, 이에 따라 그를 남성들이 육체적으로 위협하며 쫓아내는데, 이로써 그는 또 한 번 남녀가 결합된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 ‘가족의 부재’, ‘여성의 부재’를 다시 한 번 실감케 된다.

 

  이제 그가 향하는 곳은 다시 ‘물 위의 배’이다. 프레디가 랭커스터의 배를 발견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프레디와 배에 번갈아 가며 초점을 맞추는 방식으로 둘의 관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프레디는 해군 출신으로 배 위에서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이 맡은 바의 임무가 있었으므로, 배 위에서라면 자신의 존재가 ‘여성의 부재’ 혹은 ‘가족의 부재’로 위협받는 일이 없었으리라. 더불어 그가 기억하는 ‘물 위의 배’는 어디까지나 남성들만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프레디가 배에 몰래 탄 뒤 카메라가 배가 떠나는 모습을 응시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그 배 위에선 남녀가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으며, 아니나 다를까, 후에 프레디는 다시 한 번 배 위에서 난동을 부린 것으로 드러난다. 아마 이는 또다시 여성의 부재를 확인한 데서 오는 분노 탓이었을 것이다.

 

  랭커스터의 배 위에서 프레디는 잠에서 깨자마자 여성의 안내에 이끌려 남성인 랭커스터와 조우하게 되고, 그 뒤엔 랭커스터의 딸의 결혼식을 보게 되고 랭커스터의 아내와 아들 역시 만나게 된다. 더 이상 배 위에서도 그는 자신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더 도망칠 곳도 없는 그는 그곳에 머물되, 자신을 괴롭히는 그 ‘부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동물의 세계의 일원으로부터 벗어나고 감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자’고 말하는 랭커스터의 연설 녹음을 청취하고 있는 여성에게 섹스를 권유하는 쪽지를 보내는가 하면 랭커스터의 요구에 힘입어 술 제조에 더욱 열을 올리기도 한다.

 

  그러던 와중에 랭커스터의 제안에 따라 프레디는 처음으로 ‘코즈’의 ‘프로세싱’을 시도하게 된다. 이 프로세싱을 통해 우리는 여태껏 유추해 오기만 했던 프레디의 과거에 대해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 죽었고, 그의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갇혀 있다. 그러나 현재 프레디는 ‘술’과 ‘정신병’을 모두 품고 있으며 그러한 자신에 혐오감마저 가지고 있다. 그녀는 편지 속 ‘아는 여자 동생’인 도리스를 사실 사랑하고 있지만, 그녀에게 다시 돌아가겠다고 말해놓고서도 전쟁이 끝난 뒤 돌아가지 못했다. 과거 회상 장면으로 유추하건대, 알코올 중독 증상이나 정신병(그리고 이로 인한 미성숙으로의 퇴행 증상까지도) 모두 전쟁을 겪으며 떠안게 된 것이며 이 때문에 도리스를 찾아갈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회상 장면에서 도리스는 ‘난 내 어머니에 대해 확신하고, 아버지에 대해 확신하며, 이제 당신에 대해 굉장히 굉장히 확신을 갖고 싶다’고 노래한다. 프레디는 아버지가 죽었으므로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고, 어머니 역시 정신병원에 갇힌 존재이므로 어머니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가 알던 또 다른 여성인 버사 고모는 근친상간이라는 좋지 않은 기억의 대상이다. 이를 모두 대체할 수 있는 도리스야말로, 프레디에게는 다른 모두에 대해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확신을 가지고픈, 그에게 유일하게 안정을 줄 수 있는 존재였으리라. 그러나 이제 그에겐 그녀마저 부재하기에 그는 짐승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의 회상이 끝나는 시점에 영화의 시작을 알렸던 포말이 부서지는 물의 이미지가 다시 한 번 화면을 채운다. 이는 프레디가 회상의 말미 부분에 올라타게 된 상하이 행 군함을 전제하는 동시에, 현재 상황에서 그와 랭커스터가 함께 프로세싱을 진행하고 있는 랭커스터의 배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 맨 처음에는 그 이미지가 '전쟁' 중의 '', 그리고 그 위의 프레디의 모습으로 이어졌다면, 이제는 그 이미지가 프로세싱이 끝난 뒤 '전후' '', 그리고 그 위의 프레디와 랭커스터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과거를 다시 한 번 직면하는 경험을 한 프레디는 새로운 인생의 희망을 랭커스터라는 마스터에게서 보게 되고, 랭커스터와 자신의 술을 나눈다. 이제 그는 결혼식 이후 랭커스터가 연설한 바와 같이 용의 형상을 한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법의 올가미로 정복할 수도 있으리라. 2부는 바로 여기서, 희망의 실마리를 발견한 자리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1부의 물의 이미지가 배로 옮겨간 뒤 얼마 되지 않아 프레디가 배에서 내려 전쟁 이후의 삶을 준비해야 했던 것처럼, 2부의 시작을 알리는 물의 이미지가 다시 배로 옮겨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프레디와 랭커스터도 뭍에 내려 새 삶을 준비해야 한다.

 

  랭커스터의 아내 페기는 프레디에게, 육지에서는 늘 랭커스터를 향한 세간의 공격이 쏟아지기 때문에 물 위에서 랭커스터가 글을 쓰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 바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2부 내내 랭커스터는 육지에서 수많은 공격에 직면하게 된다. 뉴욕에서는 과학을 들먹이며 코즈의 교리에 반박하는 존 모어라는 인물을 맞닥뜨리게 되며, 필라델피아에서는 돈을 빼돌린 죄목으로 체포되기도 한다. 한 편, 코즈의 교리 아래 공고한 듯 보였던 랭커스터의 가족들도 프레디 퀠이라는 이방인의 등장과 육지에의 상륙 이후 조금씩 빈 틈을 보이기 시작한다. 랭커스터의 사위는 뉴욕에서 프레디가 존 모어를 폭행하는 현장에 동행함으로써 인간의 감정이 날것으로 표출되는 폭력 앞에 그대로 노출되는가 하면, 랭커스터의 딸은 필라델피아에서 프레디를 성적으로 유혹하며, 랭커스터의 아들은 역시 필라델피아에서 프레디에게 자신이 코즈의 교리를 믿지 않음을 대수롭지 않게 터놓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랭커스터 본인은 어떠한가? 그 역시 뭍에 올라온 이후, 감정을 다스릴 것을 주문하는 코즈의 교리와 달리 뉴욕에서는 존 모어의 반박에 쉽게 흥분해 욕설을 내뱉는가 하면, 필라델피아에서는 여성 신자들과 묘하게 성적인 분위기를 품은 눈짓 혹은 몸짓을 주고 받기까지 한다. 그런데 필라델피아에서의 그의 감정에 휘둘리는 내면을 가장 깊숙이 간파해 내는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프레디이다. 술기운에 취한 프레디의 눈에 랭커스터와 그 주변의 여성 신자들은 신봉받는 남성 교주와 알몸의 여성들로, 하나같이 짐승이나 다름없는 육욕의 노예의 형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 즈음에서 우리는 1부와 2부의 대칭적인 관계 하에서 프레디와 랭커스터 역시 대칭 관계에 놓여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부는 물에 떠 있는 배 위의 프레디의 모습에서 시작해 그가 배에서 내려 새 삶을 시작하려 하는 순간부터 그의 병리적 증상들이 본격적으로 터져 나오는 과정을 보여준 바 있다. 2부는 똑같이 물에 떠 있는 배 위에서 프레디와 마주하고 있는 랭커스터의 모습에서 시작해 그가 배에서 내려 육지에 오른 뒤 그가 도전을 받고 그와 그의 집단이 서서히 약점을 노출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1부에서 프레디의 병리적 증상이 백화점과 살리나스라는 두 공간을 거치며 드러났던 것처럼, 2부에서 랭커스터와 그의 집단의 약점 역시 뉴욕과 필라델피아라는 두 공간을 경유하며 드러난다. 이처럼 닮아 있는 1부와 2부의 관계 하에서, 1부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프레디와 2부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지는 랭커스터가 마치 닮은 꼴처럼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 두 남자는 각기 자신의 불완전함을 감추고 생을 버텨내기 위해 자신만의 무기들을 하나씩 개발해 냈다. 프레디는 끝없이 새로운 재료들을 섞어가며 나름의 연구를 거쳐 독에 가까운 술을 매번 새롭게 만들어 내고, 랭커스터는 연설과 글을 통해 코즈라는 이름의 교리를 만들어 냈다. 1부와 2부가 맞닿는 지점, , 프레디로 대표되는 이야기 덩어리와 랭커스터로 대표되는 이야기 덩어리가 맞닿는 바로 그 지점에서 두 인물은 서로가 인생을 버텨 내기 위해 개발해 낸 무기들을 공유한다. 프레디는 랭커스터의 코즈 교리에 따른 프로세싱을 경험하고, 랭커스터는 프레디와 함께 프레디가 개발해낸 을 들이킨다.

 

  이때 우리는 프레디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1부의 시작 시점이 전쟁 중이었고, 랭커스터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2부의 시작 시점이 전후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프레디는 상하이로 향하는 배에 오르기 전까지는 술에 집착하지 않았으나 전쟁으로 인해 그의 트라우마가 본격화되는 시점에서부터 기괴한 재료들을 사용해 술을 만들어 온 것으로 추정된다. , 프레디의 무기인 전쟁 중의 생을 견뎌내기 위한 무기였다. 그렇다면 랭커스터의 무기인 코즈는 어떠한가? 랭커스터는 프레디의 프로세싱 과정의 막바지에 프레디에게 공산주의 모임에 가입되어 있는지, 외계로부터의 침략을 두려워하는지를 묻더니 프레디가 양쪽 모두를 부정하자 프레디를 가장 용감한 사람이라 말한다. 또한 뉴욕에서 존 모어와 설전을 벌일 때는 코즈를 통해 핵으로부터의 위험도 막을 수 있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간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던 시점, 세상은 평화를 말하는 동시에 핵의 공포에 떨었고 또한 본격적인 사상 대립에 열을 올리며 점차 냉전으로 치달아 갔다. 전쟁은 끝났으나 공산주의, 외계인, 핵 등 그 어떤 형태로든 또 다시 위협이 닥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던 불확실성 그 자체의 시대. 랭커스터는 바로 그러한 전후의 공포에 맞서고 생을 견뎌내기 위해 코즈를 만들어낸 것이다('코즈(Cause)'라는 이름에도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을 물리치기 위해 현재의 불확실함을 과거로 거슬러가 그 '원인'을 밝힘으로써 그것을 분명히 인지할 수 있는 무언가로 대체하고자 하는 랭커스터의 열망이 녹아 있다.).

 

  그러나 1부에서 본 바와 같이 백화점과 살리나스에서 프레디의 증상이 본격적으로 터져 나온 원인은 모두 이었다. 사실 그의 아버지의 죽음이 말해주듯 '술'은 애초부터 프레디에게 무기인 동시에 함정이었고 프레디 역시 이를 알고 있었으나 그는 전쟁의 영향 및 끝없이 그를 위협해 오는 트라우마 탓에 이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프레디는 트라우마를 잊기 위해 자신이 만들어낸 무기 그 자체에 압도되어 더욱더 자신을 트라우마의 한복판으로 몰아간 셈이다. 바로 그 꼴 그대로 2부의 랭커스터 역시 자신이 만들어낸 무기에 압도당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다만 1부의 프레디가 에 압도당할 때마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여성의 부재를 재확인하고 몰락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2부의 랭커스터는 바로 현재, 전 아내와 현 아내 페기, 딸을 비롯해 수많은 여성들에 둘러싸여 여성에 압도당하는 형상으로 자신이 빼 들었던 무기에 압도당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위에서 언급한, 프레디가 여성의 나체에 둘러싸인 랭커스터의 환영을 보는 바로 그 장면에서 프레디는 랭커스터의 그러한 현 상태를 꿰뚫어본 것이다. 1부에서 랭커스터가 자신의 무기인 코즈의 프로세싱을 통해 프레디가 술에 압도당하는 증상의 근원을 꿰뚫어 보았던 것처럼, 2부의 그 장면에서 프레디는 자신의 무기인 을 통해 랭커스터가 자신의 무기인 코즈와 이를 통해 구축한 여성의 집단들에 압도당하는 현 상태를 파악한다.

 

  프레디가 그렇게 랭커스터의 환부를 꿰뚫어보는 동안, 유일하게 페기만이 무언가 간파했다는 듯 프레디를 마주 본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페기는 여성들에 압도되어 발기되어 있는 랭커스터의 성기를 자극해 사정시킨다. 이로써 페기는 랭커스터에 대한 자신의 우위를 재확인하는 동시에, 프레디가 랭커스터의 현 상태를 꿰뚫어 볼 수 있도록 했던 이라는 무기를 프레디와 랭커스터 자신에게서 떼어 놓고 프레디를 랭커스터의 무기인 코즈 아래 굴복시킬 것을 랭커스터에게 요구한다.  

 

  사실 페기야말로 랭커스터가 자신의 무기에 압도되어 있음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인물이다. 랭커스터의 사위가 폭력의 현장에 노출되고, 랭커스터의 딸이 프레디의 성적 매력에 굴복하고, 랭커스터의 아들이 코즈에 의심을 품은 반면, 페기는 단 한 번도 코즈의 교리로부터 흔들리지 않는다. 그녀는 뉴욕에서 랭커스터가 흥분함으로써 존 모어에게 약점을 노출하자, 랭커스터에게 더 이상 세상의 공격에 대해 방어만 하지 말고 공격을 해야 한다며 강경하게 말하는가 하면, 필라델피아에서 랭커스터가 성적 흥분 앞에 나약해진 상태에서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랭커스터를 사정시키며 그가 코즈를 위해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에 대해 마치 어머니처럼 꾸짖고 조언한다. , 그녀는 코즈를 만들어낸 랭커스터 그 자신보다 더욱 코즈에 신실해져 이제는 오히려 그녀가 코즈의 마스터인 랭커스터의 믿음을 유지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랭커스터가 코즈의 교리를 설교 혹은 글로 풀어낼 때마다 늘 그의 주변에 머무르며, 화면 상에서도 그 존재감을 거침없이 내뿜는다.

 

  그녀는 랭커스터에게 있어 아내인 동시에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고(이는 랭커스터가 프로세싱 장면에서 프레디에게 페기를 언급할 때 쓰는 칭호인 Master Peggy에서도 살짝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두 여성상은 곧바로 프레디가 갈구하나 결여하고 있는 두 여인, 어머니도리스와 통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프레디가 랭커스터와 코즈 신도들의 현 상태를 꿰뚫어 보는 장면에서조차 독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른 여성들은 대부분 가슴 혹은 성기를 드러내고 있는 반면, 페기는 자연스레 가슴과 성기 모두가 드러날 수 있는 각도로 화면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팔로 가슴을 다리로 성기를 가리고 있으며, 생명을 잉태한 부른 배만이 제대로 드러나 보인다(생명을 잉태한 배만이 드러나 보인다는 점에서 또다시 그녀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속성이 엿보인다.). 그녀만이 유일하게 프레디의 시선으로부터 여체를 사수하고 있다. 나아가 그녀는 오히려 프레디를 뚫어져라 응시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여하튼 이처럼 랭커스터가 자신의 불완전함을 노출해 보일수록 프레디는 점점 더 불안해진다. 1부 내내 그는 자신이 개발해 낸 무기인 술이 오히려 자신을 압도하며 트라우마의 한복판으로 몰고 가는 상황을 겪은 바 있다. 그 막바지에 이르러 다시 배에 뛰어든 그가 마주한 것이 랭커스터와 코즈였고, 프로세싱 과정은 프레디가 코즈에 힘입어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구원되리라는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그는 마지막 희망을 위해 코즈와 랭커스터가 육지의 위협에 놓일 때마다 이에 과격하게 반응한다. 뉴욕에서 존 모어에 의해 코즈가 위협받자, 그는 랭커스터의 사위를 이끌고 존 모어의 방으로 찾아가 그를 폭행한다. 또한 필라델피아에서 술기운에 취해 랭커스터의 현 상황에 대한 비전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랭커스터의 아들이 코즈에 대한 불신을 보이자 그를 무력으로 위협하고, 랭커스터를 체포하려는 경찰들까지 때려눕히려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랭커스터는 결국 체포되고, 이에 또 한 번 좌절을 겪은 프레디는 자신의 옆방에 갇힌 채 또 다시 코즈의 교리를 설파하려 드는 랭커스터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 이때 랭커스터는 프레디를 사랑하고 감싸줄 사람은 이제 자신 밖에 없다고 소리치는데, 이는 차라리 프레디에게 자신을 떠나지 말라 애원하는 목소리로 들린다. 자신을 압도하는 여성들, 특히 페기가 부재해 있는 그 자리에서 랭커스터는 마음껏 욕설을 내뱉고 아무렇지 않게 소변을 보는 등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까발려 보이는데, 딱 그 연장선 상에서 프레디를 갈구하는 자기 자신을 내비쳐 보인 것이다. 랭커스터는 감옥에서 풀려난 뒤 가족들과 갖는 식사 자리에서 모두가 프레디를 비난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프레디를 감싸며 자신의 집단 안에 두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페기와 그 외 자신의 가족들을 설득해 프레디를 제 옆에 두기 위해, 랭커스터는 다시 돌아온 프레디를 본격적으로 코즈의 집단 안에 포섭시키려는 훈련을 시작한다. 그러나 페기가 프레디로 하여금 자신의 눈 색깔을 검은색으로 바꾸게 하는 수준까지 훈련을 이끌어가는 반면, 랭커스터는 프레디가 아직 벽을 벽으로밖에 인지하지 못하는 수준(프레디 스스로도 훈련이 다 되었다고 납득할 수 없는 수준)에서 훈련을 종료시켜 버린다. 랭커스터는 프레디가 자신의 집단 안에 남아있되 그가 완전히 코즈 아래 종속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 것 같다. 식사 시간에 그가 말한, 여기서 프레디를 포기하면 코즈가 실패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에 프레디를 내칠 수 없다는 것도 허울뿐인 변명 혹은 부수적인 이유에 불과한 듯 보인다. 그렇다면 랭커스터에게 프레디는 과연 무엇일까?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은 결말부에 이르러서야 알 수 있을 것이다.

 

  프레디의 훈련이 끝나자, 피닉스 총회를 앞두고 랭커스터는 프레디를 데리고 자신의 두 번째 책을 위한 미출간 원고를 찾으러 어느 협곡으로 향한다. 육지는 공격이 많아 물 위에서야 비로소 랭커스터가 집중해 글을 쓸 수 있다던 페기의 말에 따르면, 코즈의 교리의 또 다른 핵심을 담고 있을 그의 미출간 원고가 육지 중의 육지인 협곡이란 공간에 묻혀 있다는 것이 어딘가 미심쩍어 보인다. 심지어 그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다른 신자도 아닌, 훈련조차 미완성 상태에서 끝낸 프레디(그는 랭커스터의 사위와 함께 길거리 홍보를 나설 때에도 무신경하게 랭커스터의 사위의 말들을 반복할 뿐으로, 여전히 코즈에 대한 신실함을 얻지 못한 상태이다.)와 그 길을 동행했으니 더더욱 미심쩍다. 그리고 이 이상한 흐름은 피닉스 총회에서도 지속된다. 랭커스터는 피닉스에서의 연설 자리에서, 사람의 몸으로 살아가기 위한 비법이 웃음에 있다고 말한다. 이전에 그는 웃음은 동물의 소리라고 언급한 바 있고, 사람은 동물들보다 우월하므로 동물의 세계의 일원이 아님을 인지하며 감정을 억제해야 함을 설파한 바 있다. 2권이 나온 시점에서 급작스레 그의 교리가 정반대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필라델피아에서 그를 반긴 바 있는 신실한 신도인 헬렌마저도 프로세싱에 있어 기억이란 단어가 상상으로 대체됨으로써 교리의 핵심이 변질되었음을 지적하는데, 이러한 지적 앞에 랭커스터는 결국 또 다시 흥분하며 자신의 믿음의 나약함을 드러내 보이고 만다. 그의 두 번째 책 제목인 쪼개진 칼처럼, 랭커스터의 무기인 코즈는 그렇게 균열이 나 버린 것이다.

 

  프레디는 랭커스터의 두 번째 책을 비난하는 신도 한 명을 폭행함으로써 마지막 발악을 해 보지만, 그 역시 랭커스터와 코즈가 자신의 희망이 될 수 없음을 인지하게 된 듯 보인다. 벌판에서 일정 지점을 찍고 모터사이클로 달려갔다 오자는 랭커스터의 제안에, 프레디는 랭커스터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모터사이클을 타고 그대로 랭커스터를 떠나 버린다(이때 프레디에 앞서 랭커스터가 자신이 택한 지점으로 달려 나갈 때 영화는 질주하는 랭커스터의 모습과 환호하는 그의 딸의 모습을 번갈아 가며 제시하는데, 이는 그 질주가 랭커스터가 여성의 형상을 하고 있는, 자신을 압박해 오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리란 묘한 희망을 제시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랭커스터는 자신이 택한 지점을 돌아 다시 자신의 집단에게로 돌아온다. 그의 질주를 가까이서 요란하게 보여준 것과는 달리 그가 돌아오는 모습은 멀찍이서 조그마한 형상으로 그려내는데, 랭커스터가 절대 스스로의 힘으로는 현재 자신의 상황을 바꿀 수 없으리라는 허탈감과 조소가 그 연출 안에 배어 있는 것만 같다.). 그런 그가 향한 곳은 바로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여인, 도리스가 살던 집이다. 그는 자신이 한 때 마스터로 대하던, 자신의 희망과도 같았던 랭커스터가 프로세싱을 통해 직면케 했던 바로 그 과거에 자기 스스로 직면해 보임으로써 자신의 트라우마를 이겨내 볼 심산이었으리라(그러한 그의 심정을 드러내듯, 프로세싱에서는 화면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걸어가 도리스의 집에 다다랐던 것과는 달리, 이 장면에서는 프레디가 화면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걸어가 도리스의 집에 이르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너무 늦게 돌아왔다는 것과 도리스가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해 영화 배우의 이름과 같은 도리스 데이가 되었다는 것만을 깨닫게 될 뿐이었다.

 

  배우의 이름을 가지게 된 자신의 옛 사랑을 추억이라도 하듯 그는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또 다시 실감케 된 여성의 부재라는 트라우마를 그는 그렇게 환상으로 달래려 한다. 이때 랭커스터에게서 전화가 온다. 자신을 갈구하는 랭커스터의 목소리 하필이면 그때 프레디가 보던 영화에서 흘러나오는 대사는 프레디에게 '선장은 배를 떠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 한 번 빠지게 된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희망처럼 내려온, 한 때 (은유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그의 선장이었던 랭커스터의 목소리에프레디는 그가 있는 영국으로 가기 위해 다시 한 번 배에 오른다. 그리고 이때, 2부의 끝이자 에필로그로서의 3부의 시작을 알리는 바로 그 물의 이미지가 또 다시 화면을 채운다.

 

  1부가 배에서 내린 프레디가 일련의 사건으로 큰 좌절을 겪고 그 좌절의 끝에서 다시 배에 올라 랭커스터가 프레디의 마지막 희망처럼 등장할 때 끝을 맺었다면, 2부는 배에서 내린 랭커스터의 좌절이 곧 그를 희망처럼 여기던, 그래서 그와 함께 다시 배에서 내렸던 프레디의 좌절로, 다시 그에 뒤이은 또 한 번의 실패로 이어지고, 두 인물이 서로를 갈구하며 또 한 번 배에 오르는 지점에서 끝을 맺는다. 1, 2부가 모두 시작 지점에서 를 보여주고 그 배에서 내려 새 삶으로 향하는 연결고리를 분명히 제시했던 반면, 3부는 연결고리를 모두 생략한 채 바로 육지의 장면만을 제시한다. 이제 그들은 배 위에서 휴식할 새도 없이 바로 또 다른 위협적인 삶의 현장으로 내던져지는 것이다.

 

  영화는 프레디가 랭커스터의 학교에 처음 도착하는 씬에서는 프레디가 카메라로부터 먼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다가오게 하고, 그 뒤 프레디가 랭커스터의 아들의 인도를 받아 랭커스터의 방으로 향하는 씬에서는 프레디가 하교길의 아이들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카메라를 등지고 점점 더 멀어지게 함으로써, 그 짧은 순간 동안 의도적으로 프레디의 마지막 행보에 불안감을 더한다. 랭커스터는 이번에도 그의 희망이 될 수 없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그 두 씬의 접합에 맴돌고 있다. 그렇게 도달한 랭커스터의 방, 여전히 랭커스터의 곁에는 어머니처럼 페기가 머무르고 있다. 그녀는 프레디를 한참 비난하다 그가 나아질 시도조차 않는다며 자리를 뜬다. 그 뒤 랭커스터는 처음에는 페기의 말을 반복하는 듯하나 곧 프레디가 자신의 곁에 머물렀으면 하는 바를 내비친다.

 

  이때 그는 프레디에게 어떤 마스터도 섬기지 않고 사는 법을 알려달라며 아마도 프레디가 그 첫 번째 사람이리라고 말한다. 그렇다. 랭커스터의 눈에는 자신의 코즈로 포섭할 수 없는, 아니, 감히 그러려고 온전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짐승과도 같았던 프레디야말로 마스터 없이 살 수 있는 존재처럼 보였던 것이다. 전후의 온갖 두려움에 사로잡혀 코즈라는 허울로 맞서야 했던, 그러나 곧 그 허울에조차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비록 과거의 트라우마에 얽혀 있지만 랭커스터 자신을 억누르는 여성의 형상으로 대표되는 그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듯 보이는, 자신의 감정을 있는 대로 표출하는 데 있어서 거리낄 것이 없으며 이라는 황홀한 무기로 대표되는,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세상 앞에서 불확실성 그 자체로 자신을 무장한 듯 보이는, 자신의 무기인 코즈마저도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 같은 강력하면서도 불가사의한 존재인 프레디 퀠이야말로 그 어떠한 마스터도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며 랭커스터 자신의 현재를 타개할 수 있는 마스터처럼 보였을 것이다. 랭커스터가 자신의 두 번째 책을 내는 시점에 이르러 웃음을 긍정하고 이성의 산물인 기억 대신 감각의 산물인 상상을 긍정하는 등의 변화를 보인 것 역시, 감정을 표출하는 프레디 퀠의 영향이었음이 비로소 명확해진다. 페기의 충고와는 정반대로 랭커스터는 자신의 마스터 프레디 앞에서 자신의 무기인 코즈를 내동댕이치고 그의 앞에 굴복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랭커스터는 프레디에게 자신의 곁에 남아줄 것을 간청하듯 자신과 함께 배를 타자는 노랫말의 곡을 부른다.

 

  하지만 이는 프레디가 다시 한 번 배를 타고 랭커스터에게 향한 목적과는 정반대되는 상황이다. 프레디 역시 자신의 나약함을 너무 잘 알고 있으며, 랭커스터의 육지에서의 행보를 보고 크게 실망한 뒤에 시행했던, 자기 스스로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려고 했던 시도조차 실패한 바 있다. 그런 그가 과연 랭커스터가 생각하는 마스터이자 어떤 마스터도 섬기지 않고 사는 법을 깨달은 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노래를 부르는 랭커스터의 모습에 연민에 가까운 눈물을 흘린 뒤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는 다시 예전처럼 술을 마시다 눈에 띈 여성과 섹스를 한다. 다시 술에 잔뜩 취해 버린다는 점에서 그는 자신의 무기인 술에 압도당하는 자기 자신의 나약함을 또 다시 드러내고 있다. 한 편, 유달리 여체, 그 중에서도 가슴에 집착하던 그가 가슴이 부각되는 체형의 여성과, 그것도 '여성 상위'로 섹스를 한다는 점에서는 그의 미성숙한 모습과 함께 '여성의 형상'의 압박에 짓눌려 버린 랭커스터의 나약함마저 함께 품고 있는 듯 보인다. 그는 섹스 도중 랭커스터가 프로세싱 도중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주워 섬기며 여자에게 읊는다. 그는 자신이 한 때 마스터로 여겼던 인물이 실상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 불과했음을 알았음에도, 그 죽어버린 마스터의 말들을 그대로 읊는 (동시에 여성의 형상 아래 짓눌려 버린, 그 죽어버린 마스터의 실패의 형상까지 그대로 쫓아가는) 완벽한 퇴행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결국 그도 어떤 마스터도 섬기지 않고는 생을 버텨낼 수 없는 한 명의 인간에 불과하다. 어머니의 부재도리스의 부재, 그것이 다시 마스터의 부재로 이어져 이제 프레디는 죽은 마스터의 텅 빈 젖을 빠는 어린아이의 형상이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는 것처럼, 그 다음 장면이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1부 초반부에 등장한 바 있는, 모래의 여성 나체의 젖가슴 옆에 프레디가 눕는 장면이다. 코즈의 영향 아래서 잠깐이나마 희망을 봤던 순간조차 지워지고, 그는 또 다시 자신에게 부재한 여성을 그리며 아기마냥 여성의 가슴을 탐한다. 마치 자신을 괴롭히던 불안을 잊을 수 있던 배 위로 다시 뛰어들 듯 그는 차라리 어미의 자궁 안으로 돌아가고 싶은 아이가 되었다. 다시 처음으로의 회귀.

 

  폴 토마스 앤더슨은 대칭적인 1부와 2부를 통해 전쟁으로 증폭된 과거의 트라우마와 전후의 불확실성에 따른 공포에 시달리는 두 명의 인물이 절망과 불안 속에 서로에게서 희망을 보고 서로의 인생에 얽혀 드는 과정을 제시한 뒤, 에필로그에서 불완전한 두 인간이 끝내 실패하고 퇴행하고 마는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낯선 삶을 맞닥뜨려야 했던 당대의 불안감을 훌륭하게 표현해 낸다. 그리고 이는 비단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시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삶에서의 불안을 예시적으로 풀어낸 것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탁월한 서사 구조와 매 장면이 끓어오르는 에너지로 충만케 한 촬영 및 연출(특히 프로세싱 시퀀스나 프레디가 훈련을 받는 시퀀스에서는 관객이 그야말로 화면에 잡아 먹혀 덩달아 그 과정을 따라가는 듯한 착각까지 받게 할 지경이다.), 와킨 피닉스와 필립 시모어 호프먼, 에이미 애덤스 등의 감탄마저 나올 법한 연기, 신경을 자극하는 조니 그린우드의 오리지널 스코어와 외면의 풍요로움을 뽐내는 듯 은근히 내면의 애수를 담아내는 기존 곡들의 절묘한 배치, 이 모든 것들을 갖추고 있다. 아무 것도 종잡을 수 없는 삶 속에서 우리는 모두 어떤 해답을, 마스터를 갈구하지만 그 시도는 끝없는 실패와 퇴행으로 귀결되리라는 암울한 비전이, 이 완벽하게 통제되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매 장면 에너지가 넘쳐 금방이라도 폭발해 버릴 듯한 기묘한 걸작 안에서 그 역설을 더하며 더욱 불안하게 꿈틀거린다. 우리는 그 앞에서 마치 마스터를 경배하듯 그저 감탄하거나 혹은 무력하게 스스로에게 물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불안한 생은 이제 어디로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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