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에 쓴 리뷰를 수정해서 올린 것입니다. 벌써 그게 3년 반 전 일이군요...

 

 

 

[밀크 오브 소로우]는 어느 정도의 사전 지식을 갖춘 후 봐야 됩니다. 왜냐면 영화 제목은 이야기 도중에 잠시만 설명될 따름이고, 영화는 별 설명 없이 간단한 설정 아래서 주인공들의 일상을 덤덤히 관조하는 접근방식을 상영 시간 내내 유지하거든요. 이는 담백하고 퍽퍽하기도 하지만 시간 낭비했다는 감은 들지 않고, 영화는 한 내성적인 주인공을 통해 사라지기는커녕 대물림된 과거의 상처를 조용히 전달합니다.

 

1980년부터 1992년까지 남미 페루에서는 Sendero Luminoso(영어로는 Shining Path입니다)라는 마오이스트 무장집단으로 인해 시작된 내란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 폭력의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고 이 분쟁은 나중엔 안데스 지역뿐만 아니라 수도 리마에까지 손을 뻗치기까지 했습니다. 그 와중에서 지금도 그곳 사람들이 언급하길 꺼려하는 일들이 자행되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민간인 여성들이 군인들에게 잔혹하게 집단강간 당하는 일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분쟁이나 다른 지역 분쟁들에서 보여 지듯이, 어느 분쟁에서나 그들과 미성년자들은 그 안에서 항상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란 건 늘 변함없지요.

 

본 영화 원제목 “La Teta asustada”은 직역하자면 겁먹은 젖가슴입니다. 군인들에게 강간당한 여성들의 트라우마가 모유를 통해 자식들에게 전달된다고 믿는 그곳 사람들은 그들 자녀들이 겁먹은 젖가슴이란 정신적 장애에 걸린다고 보는데, 우리나 영화에서 잠깐 등장하는 의사 선생님에게도 이런 믿음이 좀 황당하게 들리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떤 현상에 대해서 그들 나름대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보입니다. 자랄 때 부모가 인격형성에 중요 영향을 끼치기 마련인데 잊기 힘든 기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자식이 제대로 성장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요.

 

파우스타(매갈리 솔리에르)는 그런 슬픈 사례들 중 하나입니다. 그녀는 도입부에서 과거의 끔찍한 기억과 그에 대한 한을 조용하지만 판소리만큼이나 절절하게 노래로 늘어놓는 늙은 어머니와 함께 같이 살아왔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그녀는 혼자나 다름없는 신세가 됩니다. 결혼식 일을 먹고 사는 친절한 삼촌이 곁에 있기는 하지만 그와 그의 가족들 사이에서는 파우스타는 이방인과 다름없는 존재입니다. 겉은 무표정한 얼굴에 무덤덤하기 그지없지만 내면에는 늘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는 그녀는 어머니가 겪은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성기에다가 감자를 보호용으로 삽입하고 다니는데, 그 안에서 감자가 그냥 있을 리는 없습니다.

 

앞으로 자립해야 할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원했던 장소에 그녀의 시신을 가지고 가서 묻는 데에 돈이 필요하기도 하니, 파우스타는 아는 사람의 주선을 통해 한 큰 저택에서 하녀로 취직합니다. 안에서나 밖에서나 여전히 두려운 그녀는 일하는 동안 자신을 안정시키기 위해 늘 상 그랬던 것처럼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여주인은 그녀의 노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녀는 매일 아침마다 저택에 출근하는 정원사와 조금씩 친해져 가기도 하지요.

 

감독 클라우디아 로사는 일상의 흐름에 맞추어 영화를 전개시키면서 차분히 파우스타와 그녀의 세상을 지켜봅니다. 고정된 시선 혹은 눈길 끌지 않을 정도로 매끄러운 카메라 동작으로 중립적 입장에서 주인공들을 관찰하는 동안 그녀는 건조한 톤의 화면 안에서 아름다움과 유머를 놓치지 않습니다. 저 멀리 황량한 산들의 모습이 드리워진 가운데 판자촌들이 산기슭과 그 아래에 자리 잡은 모습은 단조롭고 쓸쓸하기도 하지만, 파우스타의 삼촌이 맡은 결혼식 행사들에는 흰 웨딩드레스뿐만 아니라 분홍색을 비롯한 밝은 색상들이 따라오기 마련이고 분위기는 가끔씩 흥겨워지기도 합니다.

 

그와 같이 삶은 계속 흘러간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동안 로사는 주연배우인 솔리에르를 통해 그 험한 시절을 굳이 화면에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 시절의 대물림 받은 상처를 진솔하게 전달합니다. 솔리에르는 끝없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오랫동안 가두어 둔 주인공으로써 적절한 연기를 선사하는데, 영화 거의 내내 그녀의 뚱한 얼굴은 닫힌 책이지만 남자들의 관심을 끌 정도로 매력적이고, 그녀의 감정은 대개 그녀가 속으로 혹은 입 밖으로 부르는 여러 노래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로사의 첫 영화 [Madeinusa]로 데뷔한 솔리에르는 가수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9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페루 영화로써 최초로 금곰상을 수상하기도 하면서 그에 이어 마찬가지로 최초로 2010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한 본 영화는 재미있기보다는 흥미롭다는 표현이 적절한 아트하우스 영화들에 속합니다. 주제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은 가운데 줄거리에 구속받지 않고 일상의 모습에 주목하는 가운데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을 유도하는 등 여러 면들이 전 마음에 들었지만, 상영 시간이 비교적 짧음에도 불구하고 그 퍽퍽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정신적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서 막 첫 걸음을 내딛게 된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로썬 그게 적절한 접근방식일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간에 영화 속의 그 단순소박한 아름다움은 쉽게 잊혀지는 게 아니고, 마지막 장면엔 희망이 보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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