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안 소설 (2012)

2013.09.20 00:41

DJUNA 조회 수:10788


신연식의 [러시안 소설]은 27년의 갭을 둔 두 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같은 인물들로 연결되어 있지만 배우와 스타일이 완전히 바뀌기 때문에 두 편의 독립적인 영화처럼 보입니다. 

1부는 신효라는 작가 지망생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분명한 시대 배경을 잡아내기는 어렵지만 보다보면 사람들이 글쓰기에 아직 컴퓨터를 쓰지 않았던 옛날이라는 게 보입니다. 80년대 중반 정도죠. 80년대는 여러 가지 면에서 튀는 시대였기 때문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시대배경을 잡아냈으면 좋았을 거 같은데, 이 영화는 거기까지 가지는 않습니다.

하여간 신효는 대학은 근처에도 못 가봤고 독서량도 적지만 당대의 최고 소설가 김기진의 책을 읽고 소설가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은 젊은이입니다. 할 이야기도 많고, 아이디어도 많지만 그에게 글을 쓰는 건 여전히 어려워요. 일단 글쓰기의 기본이 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신효는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게 만들어진 인물입니다. 예술가의 오만방자함과 가방줄 짧은 젊은이가 가질 법한 위축된 태도가 최악의 비율로 섞여있다고 할까요. 멀리서 보기엔 재미있는데, 솔직히 친구로 두고 싶은 사람은 아닙니다. 

신효는 김기진이 만든 '우연제'라는 작가들을 위한 작업실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납니다. 아버지에 대한 열등감을 갖고 있는 김기진의 아들 성환, 신효를 사랑하고 그의 재능을 믿는 대학생 재혜, 공장 노동자 출신의 성공적인 소설가인 경미. 

이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들려지기도 하고 그들이 쓴 소설의 텍스트를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되기도 합니다. 영화는 텍스트를 아주 큰 비중으로 다루어요. 소설의 문장들을 내레이션으로 읽는 동안 화면을 가득 채우는 자막을 띄우죠. 이러는 동안 소재로 삼고 있는 문학이라는 매체가 영화라는 매체와 충돌하고 섞이고 어우러지는 과정은 매력적입니다. 

첫 번째 영화는 신효가 약물중독으로 식물인간이 되면서 끝이 납니다. 그리고 27년 뒤에 신효가 의식을 회복하면서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여기서부터는 1부의 이야기를 대상으로 한 추리물이 됩니다. 신효는 깨어나고나니 20세기를 대표하는 거장이 되어 있습니다. 그의 소설들은 베스트셀러였고요. 처음에 그는 우쭐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출판된 책을 읽어보니 그의 모든 책들을 누군가가 완전히 고쳐썼어요. 그럼 누가 그랬을까. 이게 2부에서 해결할 문제입니다.

유감스럽게도 2부는 거의 모든 면에서 1부보다 못합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단점은 나이 든 신효가 젊은 신효만큼 잘 구축된 인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정부터 이상합니다. 생전에 단 한 권의 책도 출판하지 못한 젊은 작가가 깨어나서 자기가 위대한 작가 소리를 듣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하겠습니까? 자기 책을 확인할 겁니다. 하지만 나이 든 신효는 자기 책을 거들떠도 보지 않고 유명인사 행세를 하면서 자기 책에 대한 강의를 하고 다닙니다. 말이 안 되는 거죠. 나이 든 신효를 연기하는 김인수는 젊은 신효를 연기한 강신효보다 더 노련한 연기를 보여주지만 젊은 신효의 캐릭터와 잘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그냥 정상적으로 나이를 먹고 그러는 동안 젊은 사람들에게 선배 대접을 받아온 아저씨처럼 보여요.

나이 든 신효를 둘러싼 사람들도 1편만큼 재미있지는 않습니다. 가끔 나이 든 모습으로 등장하는 1편의 등장인물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전의 매력과 총기를 잃었고요. 있을 법한 일이죠. 하지만 그래도 재미가 없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2부의 미스터리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효의 글을 누가 고쳤는가?"는 그렇게 중요한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누가 고쳐썼어도 달라지는 건 없죠. 게다가 이건 흔히 있는 일입니다. 작가가 원고를 완성했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나는 건 아닙니다. 교정과 편집과 출판은 그렇게 가볍게 볼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에요. 그런데 영화는 이 중요한 작업을 무시해버리고 이를 추상화시키려고 합니다. 이건 그냥 먹히지 않습니다. 

차라리 미스터리를 빼고 작가와 편집자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지금의 미스터리 구조로는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그렇게 많지 않아요. 1부의 매력을 생각해보면 더욱 아쉽고요. (13/09/20)

★★★

기타등등
신연식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소설 제목들을 가지고 계속 영화를 만들 계획이라고 합니다. 첫 작품은 [조류인간]이라고 해요.


감독: 신연식, 배우: 강신효, 경성환, 이재혜, 이경미, 김인수, 김정석, 이빛나, 다른 제목: The Russian Novel

IMDb http://www.imdb.com/title/tt2526152/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9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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