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4월이 채 지나지도 않았지만 제 마음 속 올해의 데뷔 시집은 이미 결정이 되었네요.

 

2009년 등단한 김상혁 시인의 첫 시집 『이 집에서 슬픔은 안된다』

 

시집으로 엮이기 이전부터 지면을 통해 발표되는 시들을 이따금 접하곤 했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요.

제가 이렇게저렇게 문학적 언어로 비평할 수준은 못 되고, 김행숙 시인의 추천사를 옮겨봅니다.

 

 

성(聖)과 성(性). 김상혁은 그 사이를 건너갈 영혼의 계단이나 구원의 사다리를 미적으로 건설하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고양되지도, 저 세계에서 이 세계로 버림받지도 않는다. 그것은 한 몸의 적나라한 문제이고, 온몸의 뜨거운 실재적인 사건이다. 그것은 김상혁의 시가 드러내는 ‘신앙의 체위’, 그것은 얼굴을 어둠에 묻은 ‘신앙의 후배위’로 엎드리며 일어선다. 그 동작에서 숭고와 비밀과 기쁨과 고통과 빛과 그늘이, 거대해지는 느낌과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 얽히며 전율한다. 신앙의 체위 안에서, ‘엎드리는’ 마조흐의 주체와 ‘일어서는’ 사드의 주체가 동시에 발생한다. 이상(李箱)이라는 미적 전통에서 작동하는 거울의 장치를, 그 거울의 도움과 간섭을 물리치면서, 그는 정신분석의 커튼을 찢고 몸의 무대를 드러낸다. 이 사람을 보라. 거울을 깨고 이 몸을 보라. 눈이 없는 뒤통수, 검은 물결 같은 머리카락, 한겨울의 계곡 같은 등짝, 바닥으로부터 환하게 떠오르는 엉덩이……. 울음을 틀어막듯이 엎드린 당신은 슬픔을 봉인한 몸, 이 몸에서 어떤 슬픔도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다.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 아, 아……. 슬픔을 누를수록 슬픔이 몰래 자라고, 비밀을 덮을수록 비밀이 몰래몰래 자라서, 어느덧 당신은 거대하다. 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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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

 

 

내가 죽도록 훔쳐보고 싶은 건 바로 나예요 자기 표정은 자신에게 가장 은밀해요 원치 않는 시점부터 나는 순차적으로 홀홀히 눌어붙어 있네요 아버지가 만삭 어머니 배를 차고 떠났을 때 난 그녀 뱃속에서 나도 모를 표정을 나도 몰래 지었을 거예요 어머니가 그런 아버지 코를 닮은 내 매부리코를 매일 들어 올려 돼지코를 만들 때도 그러다가 후레자식은 어쩔 수 없다며 왼손으로 내 머릴 후려칠 때도 나는 징그럽게 투명한 표정을 지었을 거예요 여자에게 술을 먹이고 나를 그녀 안으로 들이밀었을 때도 다음날 그 왼손잡이 여자에게 뺨을 맞았을 때도 내가 궁금해한 건 그 순간을 겪는 나의 표정이었어요 은밀하고 신비해요 모든 나를 아무리 잘게 잘라도 단면마다 다른 표정이 보일 테니 나를 훔쳐볼 수만 있다면 눈이 먼 피핑톰(peeping Tom)이 소돔 소금기둥이 돼도 좋아요 거기, 거울을 들이밀지 마세요 표정은 보려는 순간 간섭이 생겨요 맑게 훔쳐보지 않는 한

 

 

 

 

 

 

 

죽어가는 산드라

 

 

산드라는 자신이 더 살아야 할 이유를 떠올리며 버티고 있었다. 멍청한 의사. 그는 산드라가 애스배스카호로 봄 소풍을 떠나는 이웃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눈을 감을 수 있을 거라 장담했지. 지금은 막 겨울이 시작되었을 뿐인데.

 

그녀는 모친이 죽기 일 년 전부터, 병상 위 늙은이를 아이 취급했었다. 단지 엄마에게 죽음이 임박했다는 점 때문에. 지금 산드라는 남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절망적인 모욕감을 느낀다. 죽음의 고통으로 인한 귀 막힘이나 침 흘림이 병자의 정신까지 어린 애로 만들진 않는다는 거.

 

그녀는 남편의 방정맞은 웃음의 배후에는, 그것과 맞서는 슬픔이 자리 잡고 있음을 의심치 않았지만……

 

입 안과 콧구멍에 가득한 추위. 벽난로 옆에 앉아 , 귀여운 것!”을 연발하던 남편은 검붉은 기저귀를 들고 거실로 나갔다. 그는 지난 몇 달간 그런 일들을 해냈고 산드라에게는 꿈처럼 희미한 시간이었다. 남편이 밑을 닦을 때마다 그것을 느낄 수 있었으나 그 사실을 똑똑히 인식할 순 없었어. 굴러가는 단풍잎처럼 자기로부터 하체가 멀어지는 기분.

 

또렷한 정신이 얼마나 유지될지 불안했으므로. 최대한 많은 것들에 대하여 사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럼에도 산드라는 자신이 아까부터 같은 생각만을 반복하고 있음을 알았다. 남편. 남편이 끓이는 시럽의 냄새. 그와의 증오스러웠던 만찬들. 자부심, 가벼움을 가벼움으로 치부하지 않는 걸 지혜로움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과묵함을 증오하며 산드라는 계속 죽어 가고 있었다.

 

 

 

 

 

 

이사

 

일상 집들이 흔들리는 것을 봅니다

모든 가족에겐 아이가 필요합니다

엄마는 재혼을 포기하셨지요

집을 바꾸고 아빠를 바꾸는 일

뭐 대수라구요

낯선 장소가 그립습니다만 언제나처럼

다락방 하나 긴 마당 하나 그리고 공터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하나

다락방에는 가족들이 꺼리는 사진과 내가 있습니다

긴 마당에서는 밤마다 나무 사이로 자전거를 타야 하고요

공터는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피 묻은 아이들이 뛰어나오는 곳

이번 공터도 엄말 닮았어

나에게 짖던 강아지들은 쥐약을 먹고

놓아기른 병아리들은 식탁에 올랐습니다

곧 떠날 동네에는 작은 무덤이 남고 우리는 다른 집을 찾습니다

나무가 꺾인 자리

불모의 터에서는 왜 같은 냄새가 날까 이사 갈 때마다

내 살갗 위로 눈알이 하나씩 늘어야 합니다

가까이서 냄새를 맡는 건 천박한 짓이야

자꾸만 혀로 입술을 핥지 말래두?

버릇이 없어 나는 해변으로 자주 보내졌습니다

엄만 죽어서 인공위성이라도 될 테지요

가족들 무덤 위에 말뚝이라도 심어 두려구요

침구를 만들지 않는 일이 코 막고 연애를 하는 일이

뭐 대수랍니까 나는 안목이 재주를 초과하는걸요

낙서 같은 조감도는 묻어 두고 짐을 꾸립니다

손금이 복잡한 손은 깨지기 쉽습니다

 

 

 

 

 

 

 

사육제로 향하는 밤

 

꼬리를 갖고 싶은 아이들이 허리에 밧줄을 묶는다.

양탄자 위에서 하혈하는 개가 주인이 흘린 정육(精肉)을 핥는다.

여자들은 밤새 고깔을 다리며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

이불 속에서도 안 돼.

마을의 달빛 속엔 온통 팔짱을 끼고 걷는 연습하는 남녀들

이 성기는 만지지 않는다, 죽은 자를 슬퍼하는 자의

혹은 변소에 앉아 죽은 자에게 말을 거는 자의 오래된 곳에는 손대지 않는다.

숲의 어두움이 숲보다 커질 때

짐승을 태우는 연기에 짐승이 굶주릴 때

뾰족한 모자를 쓴 그림자들이 멀리 나무 사이로 나타난다, 모자를 벗어도 뾰족한 머리들이

서로의 정수리를 쓸어 준다. 손바닥에 피를 흘리며 딴 손금을 그으며

저 동네에 슬픔은 안 된다, 아침은 안 돼.

하루는 잠든 사내의 귓속에다

하루는 계집의 귓속에 속삭인다.

언젠가 자식들의 행렬은 숲을 가로질러...... 밝고 행복하기를...... 아이를 가지려고 서로의 귀에 속삭인다. 창밖에 속삭인다.

마을의 무수한 계절이 장례로 가득하다. 온통 기침과 연기 속에

아이들이 허리에 밧줄을 묶는다.

여자들이 고깔을 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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