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제 그르니에님의 글에 덧글을 달았는데, 어느새 게시물을 없애버리셨더군요. 때문에 제 덧글도 날아가 버렸는데,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본문 내용을 지우는 거야 본인의 자유이지만, 남들의 발언까지 지워버리는 것은 소통의 에티켓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행히 컴퓨터에 제가 썼던 글이 남아 있어 이것부터 옮겨 봅니다.

 

'단군은 신화가 아니라 인격체로서의 실존인물이다'라는 말이 더 신화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좀 재미있는 상황인 것이 그르니에님은

 

"단군은 실제인물이지 단지 신화가 아닙니다. 고대역사서는 은유와 상징을 연구해야지 직독직해하면 안되죠. 가령 웅녀는 곰을 토템으로 하던 민족의 수장을 상징하죠."

 

라고 하셨는데, 사실 한국 학계는 이미 단군신화를 그르니에님과 동일한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2009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나온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33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 신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것은 모든 신화에 공통되는 속성이기도 하다.

단군의 기록도 마찬가지로 청동기 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중략)...환웅 부족은 주위의 다른 부족을 통합하고 지배해 갔다. 곰을 숭배하는 부족은 환웅 부족과 연합하여 고조선을 형성하였으나,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은 연합에서 배제되었다. 단군은 제정 일치의 지배자로, 고조선의 성장과 더불어 주변의 부족을 통합하고......"

 

이즈음에서 도대체 그르니에님의 문제 의식이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제가 보기엔 그냥 허수아비 치기를 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국 사학계와 동북아역사재단은 단군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덕일 등 "환단고기"를 믿는 사람들의 괴이한 '단군상'을 믿지 않을 뿐이지요. '자기들이 믿는 형태의 단군'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한국 사학계와 동북아역사재단이 '단군 자체를 부정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기에 가까운 언술입니다.

 

이덕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자면 학계에서는 기본적으로 이 사람을 학자로 보지 않습니다. 학자들은 자기 전공 시대 외의 논문은 거의 쓰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사 전공자가 조선사 논문이나 책을 쓴다는 것은 거의 보기 힘든 일입니다. 자신의 전공이 아닌 분야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덕일이 쓰는 글을 보면 고대사부터 근대사까지 모두 건드립니다. 왜일까요, 이 사람이 천재라서? 그게 아니라 학자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책임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사람이 쓴 글들을 보면 오류투성이고, 본인의 망상=역사적 사실로 단정하여 서술하는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이덕일의 글이 재미있고 많이 읽히는 이유로는 그가 가지고 있는 문재(文材)도 인정해 줄 수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이 사람이 쓰는 글이 역사가 아니라 문학에 가깝기 때문일 것입니다. , 역사적 실체에 대한 논리적 접근과 복원이라기보다 이러한 역사면 좋겠다, 혹은 재미있겠다가 그의 기본적 태도입니다.

 

이덕일의 또 한 가지 세일즈 포인트는 쇼비니즘을 이용하여 텍스트 바깥의 비본질적인 것으로 텍스트의 가치를 높아 보이게 만드는 기법입니다. 자신은 우리나라의 진실한 역사를 발굴해 알리고 있는 외롭고 정의로운 투사로 묘사하고, ‘식민 사관에 물든 역사학계라는 거대 악을 상정하여 본인이 핍박받는 구도를 연출합니다. 이거 어디에서 많이 본 모습이지요? ‘충무로라는 거대 악을 상정하여 핍박받는 예술가로서 스스로를 포지션화한 심형래와 똑같습니다. , 이덕일은 역사학계의 심형래입니다.

 

이덕일은 그러다가 한중수교 이후에 중국에 왔다갔다하게 되니가 그쪽 중국 지역에서 엄청나게 많은 고조선 유물유적들이 쏟아져 나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건 그냥 자기 혼자 생각이지요. 유물들에 메이드 인 고조선이라고 써져 있는 게 아닙니다. 홍산 문화를 고조선의 문화라고 단정할 어떤 근거도 없습니다. 심지어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고조선의 지표라 언급되는 고인돌이나 비파형 동검, 미송리형 토기조차도 고조선의 독자적인 유물이라 보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이들 유물들의 중심 분포 범위가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문화적 지표인 유물만 가지고 고대 정치체의 영역을 단정한다든지 하는 것도 위험한 행위이고요. 그런데 이덕일은 이 무식할 정도로 위험한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행합니다.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느냐의 문제. 이미 수십 년 전에 다 정리된 내용입니다. 문헌적 연구가 미성숙하고, 고고학적 발굴이 거의 없었던 100년 전에는 있을 수 있는 논란이었지요. 광복 이후 평양 지역에서 발굴된 낙랑 유물만 해도 엄청난 수준입니다. 심지어 낙랑군의 25개 현별 호구조사 명부까지 확보해서 낙랑군의 기원전 인구까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게 현재 학계의 수준인데, 이덕일은 아직도 진도를 못 따라잡고 100년 전에 신채호가 했던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르니에님의 링크 내용을 보아도 제가 보기엔 동북아역사재단이 잘못한 건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동북아재단을 비난하는 이들이야말로 쇼비니즘에 발을 담그고 있는 정도를 벗어난 이들이라 여겨집니다. 그 가운데에 있는 이덕일이야 본인 장사에 도움이 되니까 저러는가보다 할 수 있겠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휘둘리는 사람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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