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낭) 동호회

2015.10.20 11:35

로치 조회 수:2113

※ 주의: 군대 얘기 다수 포함.



자전거 동호회에 들지 않겠냐는 말을 들었어요. 역시, 가을 코트와 진으로 감추었는데도 제 야성적인 허벅지의 매력은 감출 수가 없나봐요. 저는 크로스로 카메라를 맨 채, 삼각형 프레임을 한 작고 귀여운 스트라이다에 올라 강변을 씽씽 달리고, 한강변에 산책 나온 뭇 여성들이 바람에 날려 흩뿌려진 저의 페로몬에 자지러지는 흐믓한 광경을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가입을 권한 분께서 얘기한 자전거 동호회란 그런 게 아니더라고요. 민망한 쫄쫄이 바지를 입고, 선수용 자전거로 양수리를 달리는 고행길이었습니다. 게다가 "최소한 이것" 이라고 찍어 준 자전거는 가격이 백만 원이 넘는 고가. 이것저것 몽땅 고가. 문득 의구심이 들었죠. 이 자는 혹시 남이 좋게 되는 모습을 봄으로서, 이미 좋게 된 자신의 처지를 보상 받으려 하는 건 아닐까?  


저는 자전거를 군대에서 배웠습니다. 원래 차를 몰고 다녔는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게 되자 고개 두개를 넘어 문서수발을 하러 다니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었어요. 보다 못 한 선임하사께서 유적지에서 방금 발굴해 낸 듯한 낡은 자전거 하나를 구해다 주셨어요. 저는, "자전거 못 타는데요?" 라고 말했다가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등짝을 얻어 맞고 문서낭을 둘러맨 채 긴 여정에 올랐습니다. 게이트에서 헌병 아저씨가 제 자전거를 보더니 웃더군요. "아저씨, 어디 쌀 배달하러 가요?" 쓰고 있는 바가지를 돌멩이로 확 긁어 버릴까 하다 꾹 참았습니다. 도로변으로 나온 저는 처음에는 자전거를 질질 끌고 갔지만, 해가 점점 머리 위를 향해 떠오르는 꼴이 차라리 이 참에 자전거를 배워서 타고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늦으면 식당에 밥도 없는데.


결국 저는 그 날 점심을 못 먹었습니다. 도중에 길가 밭두렁 아래로 추락한 일, 경운기 몰고 가던 아저씨가 희롱한 일, 덤프트럭에 치어서 국립묘지에 묻힐 뻔한 일은 너무 구구절절해서 적지 않을게요. 다만, 중대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제가 경사로를 쉽게 오르려 엉덩이를 안장에서 떼고 있었다는 것만 말하겠습니다. 전날 기타수련을 하기 위해 피스 100개를 싸들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는 동방의 기타리스트 김도균 선생처럼, 저는 불과 4시간만에 홀로 자전거 레이서가 되어서 나타난 겁니다. 얼마나 스스로 뿌듯했겠습니까? 아니나, 주차장에는 고참 둘이 서서 쌍수를 들고 제 "의지의 승리" 를 반겨주었습니다. "이 OO야, 어디에 짱박혔다가 이제 나타나?"


천리길을 달려 온 애마의 등을 쓸어 줄 틈도 없이, 제가 중대 뒤로 끌려가 좌우로 구르고 있는 사이, 대대본부 앞에서는 일군의 간부들이 흐믓한 미소를 지은 채 사진병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이 동호회 활동을 열심히 한다며 모범사례로 선정, 위에서 취재가 나온 것이죠. 며칠 후, 중대 행정병 동기가 커피 훔쳐 마시러 들른 저에게 종이 하나를 쑥 내밀지 않겠어요? 사정은 이랬습니다. 아랫것들이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저희들끼리 뚱땅 거린다고 못마땅하게 여기기만 하던 전대장, 덕분에 부대 이름이 신문에도 실리자 요걸 무슨 기회로 삼기로 작정한 겁니다. 전 병사들의 자기계발을 위한 동호회 활성화. 병사들은 "강요는 아니지만" "가급적" 동호회 활동을 할 것. 


그런데 동호회라는 게 뻔하지 않습니까? 공 하나로 축구도 하고, 피구도 하고, 농구도 하는 형편이 대한민국 선진 병영의 실태인 것을. 하여간 지름 30센티미터가 약간 모자란 그 공으로 할 수 있는 동호회란 동호회는 몽땅 만들고 가입들을 했습니다. 그 와중에 토익/토플 모임, 기타 연주 모임, 장기, 바둑 등등 온갖 그럴싸한 동호회들도 속속 생겨났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어요. 제가 친구가 없었다는 겁니다. 여러 사정으로 깍두기 신세를 면치 못 하고 있는 저를 쌍수 벌려 환영하는 사람이 하나 없었고, 저는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미워서 제가 당주가 되어 동호회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그리하여 생긴 것이 "WBR 연구회."


WBR은 (Walk Beside Rain-drops) 즉, "비사이로막가" 의 영문 이니셜이었어요. 지금은 단연코 아니지만, 제가 그 무렵 그로테스크와 신비주의에 푹 빠져 있어서 그레이엄 핸콕의 "신의 지문" 을 책장이 떨어질 때까지 탐독하고 그랬거든요. 지금은 소소한 취미로 장풍이나 수련하고 있지만, 그때는 정말로 외계인의 존재를 굳게 믿고, 밤에 영체를 찾는다고 점오 끝나고 사이드 난간에 서 있고 그랬어요. 영적 존재에 탐닉하게 된 사연도 참 구구절절한데, 그건 다음에 풀도록 하고, 아무튼. 동호회라는 게 혼자서는 절대 성립이 되질 않죠. 하다 못 해, 대장급 월급 도둑 폭스 멀더도 짝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친한 사람도 없고, WBR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애들 반응이 영 밀교의 사술을 보듯해서 회원 유치가 녹록치 않았죠. 이랬다간 탁구 동호회라도 끼어달라고 해야 할 처지였는데 또 괜한 자존심이...


결국 가까스로 명단에 이름을 올린 두 회원을 모시고 전투체육 시간에 갖은 첫 모임의 풍경은 이랬습니다. 동호회장이자 입대이래 쭉 외로운 애 하나, 빽 있다고 소문나서 외로워진 애 하나, 일본의 사이비 종교를 포교하고 다녀서 본인은 외롭지 않으나 나머지 모두를 외롭게 한 애 하나. 지렁이 재채기 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한 분위기에서 "신의 지문" 을 강독을 하는 것으로 첫 모임을 진행했지만, 외로운 애들끼리 햇살 좋은 오후에 페루 나스카 지방의 거미그림이나 탐구하고 있으려니 도무지 흥이 나질 않는 겁니다. 결국 모임은 BX에서 판매하는 주전부리 품평회로 변질이 되었다가 저의 전역과 함께 역사의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져 버렸... 겠지요? 아마? 지들이 제정신이라면?


모든 위대한 업적에는 반드시 의문과 갈등의 순간이 있는 법. 동호회 명단을 받아 든 중대장이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저를 호출했습니다. "야, WBR이 뭐냐?"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네, 비사이로막가 입니다." 라고 말 했다간 특박 잘리는 걸로는 끝나지 않는다. 저는 머리를 마구 굴렸습니다. 나와라 초능력, 나와라 초능력. 살면서 딱 한 번, 비슷한 위기를 경험한 일이 있었어요. 고3때, 변태 국어교사가 청산별곡 암기를 전 시간에 숙제로 내주었다고 주장하며 1분단부터 매타작을 시작하는데, 그 전날 가내에 무슨 우환이라도 있었는지 절연테이프로 칭칭 감은 몽둥이 소리가 여간 찰진게 아닌겁니다. 저걸 맞으면 안 된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급우들은 눈으로 활자를 빨아들일 기세로 암기를 했지만, 결국 전멸했죠. 퍽퍽퍽 으악으악으악 조금씩 다가오는 타격음과 비명의 공포. 그때 기억에 몸서리치며 급조한 WBR의 새 Full name 은 이랬습니다. (War Brotherhood in R.O.K) 


중대장은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제발 애들이랑 어울려서 공이나 차" 라고 말 했고, 오늘도 자전거 얘기를 하며 비슷한 말을 들었어요. "이렇게 사람들이랑 두루두루 어울려야지." 생각해 보면 저는 언제나 사람들과 어울려 왔어요. 이렇게 게시판에 가입해서 글도 쓰고,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도 잘 하지요. 얼마 전에 엄니를 모시고 하늘공원에 다녀왔는데, 엄니가 제 새로 산 카메라를 보고 그러더라고요. "동호회 같은데 가입해서 여기저기 찍고 다니려고?" 적지 않은 사람들의 관념 속에 삼십대는 동호회에 가입해서 소셜 커넥션을 만들어 가는 시기인가봐요. 사실 요즘 좀 흔들리기는 해요. 한 발, 또 한 발 독거노인의 길을 착실하게 걷고 있는 사촌누이의 눈빛을 보고 있으면 교과서에 실린 "인간은 사회적 동물" 이 맞는 말인가 싶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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