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넷플릭스 외.

2016.01.16 00:45

잔인한오후 조회 수:1034

1_ 가끔, 말뚝을 박고 밧줄을 매듭지어 묶어야 할 때가 와요. 삶이 드넓은 평지처럼 펼쳐져 있을 때, 아무 생각없이 살면 아무런 기억도 남지 않거든요. 먼지 날리는 황야를 터벅터벅, 이유도 없이 꾸준히 걸어나가는건 때때로 자리에 멈춰 서서 시간을 들여 무언가를 남기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죠. 그래도 그렇게 살면, 문뜩 뒤돌아 보았을 때 바짝 메마른 대지에 펼쳐진 지평선만 보일 뿐이거든요. 그럴 때의 오싹함은 정말 참을 수가 없죠. 먼 시야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움직이지 않은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2_ 갑작스레 넷플렉스가 찾아왔어요. 드디어 합법적으로 무언가를 소비하고자하는 고집과 죄책감 사이에서 풀려났죠. 사실 IPTV라던가 유플러스라던가 다른 방법은 있었을꺼에요. 그러나 저 같은 사람에게 접근이 쉬웠던 것도 아니고, 그만큼 화질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죠. 네이버 영화에서 몇 개의 영화를 구매해서 보거나, 한 편당 700원에서 1500원 가량 하는 드라마를 몇 개 사서 보다가 그만두었죠. 차라리 DVD를 사는게 더 나을 지경이었죠. 이 세계에서는 양심을 가지고서는 문화적 소비를 쉽사리 할 수가 없어요. 마치 에벌레가 우화를 하듯 돈 없는 불법의 시절을 보내다가 돈이 풍족한 합법의 세계로 넘어가는 식이죠. 게임, 애니, 영화, 드라마 등등.


다들 나름대로의 자기합리화를 얻고 말이에요. 심지어는 분야가 다르면 양심의 진폭도 달라지구요. 할랄 기업까지 갈 일도 없이, 양심적 소비라는 것은 모두의 선택에 상당히 영향을 주고 있을 꺼에요. 시스템이 나쁜건지 뭔지 모르겠지만요. 저도 저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는데, 불법적으로 접근한 컨텐츠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거에요. 아, 이런. 몇 가지 예외가 곧장 떠오르긴 하네요. 그래도 꽤 무료와 합법 사이를 오가며 오래 버티긴 한 것 같아요.


제가 문화 콘텐츠를 처음으로 제 돈을 지불해서 얻어낸 것은... 라이트 노벨이라고 하려 했는데, 그 전에도 썰렁한 말장난 농담 제목의 잡다한 지식이 담긴 책을 꾸준히 샀었던게 기억이 났어요. '건축이 건들건들' 같은 것 말이죠.  대략 한 달에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돈이 4만원 정도였는데, 그 당시에 막 한국으로 들어오던 라이트노벨이 청소년 시장을 겨냥하여 "누구나 책을 싸게 살 수 있도록" 권당 4500원 정도에 내놨었죠. 저는 패키지 게임 시장의 끝물에 살았기 때문에 (애초에 최신 CD게임을 돌릴만한 PC도 없었지만) 패키지는 번들로 문구점에 쌓여있는거나 몇 개 사보고 제대로 된 [패키지]에 담긴 게임은 두 개 정도나 사본 것 같아요. 그래도 빈곤하진 않았죠. 도서관은 무료로 책을 빌려줬으니까요. (우습지만 라이트노벨과 만화책은 도서관에서 빌릴 수 없기 때문에 구매를 했었죠)


어쩌면, 더 많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덜 봐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3_ [브레이킹 배드] 시즌 5 2화, [안사리 아지즈: 생매장], [체이싱 아이스], [핫 걸 원티드], [리틀 위치 아카데미아], [THE 100] 8화, [와푸] 25화, [베스트 오브 에너미즈], [마스터 오브 논] 4화. 


얼마 안 됐는데도 이것저것 많이 봤군요. [조선미녀삼총사]처럼 뻔히 그 평을 아는데도 대충 찔러보다가 중간에 관둔 것도 포함하면 더 많아지긴 하겠지만요. (제가 영화를 30분 보다가 그만 볼 수 있을 줄이야) 다른 것보다 문화적 메인스트림(?)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기분을 가장 크게 느꼈어요. 지금까지 별로 그래본 적이 없거든요. (메인스트림이라고 하기에는 다수가 넷플릭스를 시도해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제가 볼 수 있는 것과 보는 것 사이에서 거의 같은 것들을 동시간대에 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다는건 제게 매우 특이한 일이에요. 오랜 시절동안 그런 순간은 별로 없었죠.


직장 동료들과 대화했던걸 떠올려 보면 주류문화와는 동떨어져 있다는걸 확연히 느끼긴 하죠. 스포츠를 안 보고, 공중파 드라마도 안 보고, 예능도 하나도 보는게 없고, 음악도 듣지를 않죠. 다들 사람 이름들이 쓰인 카드들을 80개에서 200개 가량 (아마 그 정도 숫자가 기본룰 매수가 아닐까 생각하죠) 가지고 서로 꺼내며 브릿지나 포커, 블랙잭을 하는데 제가 가진 카드는 열 장에서 스무 장 정도랄까요. 사람 개개인들에게 그렇게 특정한 설명을 부여하고 머리 속에 잘 정돈해 놓다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의식적이지 않을지라도.


음, 스탠딩 코미디가 꽤 재미있었으니 다른 스탠딩 코미디도 좀 봐봐야겠어요.


4_ [핫 걸 원티드]의 표지를 처음 본 것은 넷플릭스가 제 취향을 확인해보기 위해 3가지 영화를 선택해보라고 할 때 였죠. '하, 이 국제적인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도 저런 야시시(?)한 영상을 서비스 하는군?'이라고 생각했는데 좀 다르더군요. 참고로 저는 처음에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브레이킹 배드] 마지막으로는 상당히 고민하다가 [데어데블]. (드라마 데어데블은 아는 바가 없지만 영화는 상당히 재미있게 봤거든요, 나중에 졸작취급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지만.) 넷플릭스 다큐멘터리가 꽤 볼만하다는 걸 느끼고 [핫 걸 원티드]를 다 봤을 때 참 말하기 힘든 감정이 들더군요. '맥도날드보다 많지' 같은, 혹은 이런 순간을 영상으로 촬영해낼 수 있었다니 싶은 장면들.


그냥 좀... 돈이 어떻게 사람들을 후려치는지 직시할 수 있었다고 할까요. 거대한 성적 착취 말이죠. 세계가 원하니까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끌어다가 자료를 생산해내는 거에요. 감정 노동의 최극단에 그런게 있는거죠. 음, 별로 감상적이라던가 권선징악적으로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포르노에 대해 어느 정도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데 좀 싫어졌습니다. 개략적으로 어떻게 구조가 이뤄지고 굴러가고 있을 것인지는 예상 가능 했지만.. 그러니까 그런 거에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거대하고도 누구의 책임도 지지 않는 냉혹한 대리자가 유통을 하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후.


이와 관련한 다른 경험도 있었죠. 제 주변에서 불법 성매매가 있는 것처럼 보여서 찾아서 신고해볼까 했었어요. 그래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죠. 그러고는... 어휴... 사실 제가 직접 검색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 불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제 컴퓨터에서 검색을 하는게 물질적으로 컴퓨터를 더럽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만두었죠. 약 10분 정도도 안되는 검색을 통해서 넥플릭스보다 한 15배 정도는 쉽고 간단하게 접근할 수 있는 수많은 성매매 사이트를 발견할 수 있었거든요. 뭐 어려운 키워드를 찾아 넣은 것도 아니었어요. '오피'였던가 그런걸 넣어 검색을 했던 것 같은데. 그 규모보다는 디테일에 충격을 받았었죠. 제가 봤던 어떤 커뮤니티보다 쉽고 간편하게 접근하여 구매가 가능하도록 되어 보였으니까요. 웹 프로그래밍적으로 매우 최신처럼 보였다구요.


군대에서 별별 이야기를 다 들었으니 딱히 순진한 척 굴려는건 아니에요. 갑작스럽게 성매매와 성산업에 대해 통찰을 얻은 것도 아니구요. 그저... 기분이 좀 안 좋아졌다는 이야기죠. (제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이상해지지 않겠지만) 제가 적당량의 현금으로 성구매를 하려 시도한다면 불법 다운로드보다 더 쉬울 수도 있다는 것이요..


음. 이 부분은 상당히 섬세하게 다뤄져야 할 담론이기 때문에 이 정도로 접어 놓을께요. 잘라내고 이어 붙이고 해도 논란이 끊이지 않을 영역이란걸 잘 알아요.


5_ 제 정신이 요즘 경고를 보내고 있어요. 보통 이런 타이밍이거든요. 우울해지는 거요.


다들 알잖아요? 돈을 벌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말이에요. 단순 계산으로 자기가 죽을 때까지 얼마를 벌 수 있고, 얼마나 모을 수 있는지 답이 나오죠. 대략적으로. 중간에 조금 변화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액수 단위가 비례적으로 얼마만한 돈인지 알게 되죠. 1년 단위 척도를 세워서 1억이, 5억이, 10억이 어느 정도 되는 돈인지 잴 수 있게 되요. 그리고 시간도 마찬가지죠. 크게 변화가 없는 한, 1년 사이에 길게 쓸 수 있는 휴일과 짧게 쓸 수 있는 휴일들을 대략적으로 그려볼 수 있죠. 최대 일주일, 최소 퇴근 후부터 출근 전까지. 6개월이나 1년 단위로 크게 쉬는 경우는 별로 없겠죠.


이퀄라이져 조절에 문제가 생긴 것과 비슷한 느낌이에요. 고통은 길고 오래갈꺼고, 즐거움은 그리 흔치도 많지도 않다는 것이죠. 감정 볼륨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전체 소리를 키우거나 줄일 수 있는데, 고통의 저음부는 크고 시끄럽게 계속 울리지만, 즐거움은 너무 작고 사소해서 들리지도 않는 거에요. 무작정 키울 수도 줄일 수도 없어서 고통받는 거죠. 가장 끔찍한 부분은 예상 이상의 즐거움이 앞으로의 삶에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안 된다는 거에요.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자그마한 행복들. 그런걸 땅에 떨어진 사탕 조각을 주워먹듯 먹으면서 길고 긴 평야를 걸어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죠.


몇 가지 문제가 있어요. 시간이 빨리 가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쉬어도 일을 해도 즐겨도 시간이 순식간에 가서, 가성비를 높일 수 없게 되었어요. 한 달 정도는 금방 까먹어 버릴 수 있지 않을까요. 주말 이틀은 너무 짧고, 일주일을 준다고 해도 무언가 하기엔 짧죠. 전투적인 휴식이란건 사실상 말이 안 되구요.


6_ 답은 있을꺼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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