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며칠 앞두고.

2010.12.05 00:02

말린해삼 조회 수:2045

졸업논문도 끝마치고 두번의 수업만 들으면 학교를 떠나게 됩니다.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오랫만에 예전에 걷던 산책길-혹은 운동코스-을 걸어봤습니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땀은 많이 안 났지만 오랫만에 걷는 길은 기분을 따듯하게 해줬습니다. 걸으면서 생각을 해보니 수능시험을 치고 나서, 전 어느 곳에서도 1~2년 이상 있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걸 오늘 알게 되더군요. 대학교 입학 후, 서울과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일을 하다가 다시 고향에 왔다가 군대를 갔다가 또 서울. 그러다가 지금의 이곳에 와서 무려 4년이란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가장 피끓고 멍청하지만 웃을 수 있는 시간중의 긴 날들을 이 곳에서 보냈습니다. 좋은 기억만 있는 것도 아니고 안 좋은 기억이나 미안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느라, 사람들은 많이 만났으나 여러 사람과 연락하고 하는 걸 잘못해서 친구도 많지 않았고 외로운 날들도 많았습니다. 재밌고 웃고 후회도 많이도 했던 이곳을 떠난다는게 실감이 가질 않네요.

칼국수를 싫어하는 제가 처음으로 맛있게 먹어봤던 어느 골목의 칼국수집, 처음으로 가본 온천, 태어나서 처음 가본 동물원, 술 먹고 참 많이도 누워본 동네 길바닥, 처음으로 정장을 사고 입고 출근(?)을 했던 길등. 낯설었던 것들이 4년이란 시간동안 이젠 너무나도 익숙해져버려서 버리기엔 버겁고 아깝습니다.

 

자취방에 덕지덕지 붙어있지만 언젠간 사라질 제 자취들. 이사는 늘 짐 싸는것 때문에 짜증이 나지만, 어찌보면 그 동안 나의 흔적들을 스스로 지우고 청소하고 다 싸야 한다는 기분에 더 싫습니다. 떠날 땐 떠나야겠죠. 언젠가 이 곳을 찾는다해도, 지금 생각나는 수백가지의 추억이나 기억들 중 몇개나 생각이 날까 싶기도 합니다. 차라리 인간 관계는-잔인하고 무책임한 말이지만-소홀해지다 보면 지워지지만, 이건 나와 나의 추억인지라 지워진다는 게 씁쓸하게만 생각듭니다. 늘.

 

후배와의 대화중, `여기 떠나면 언제 또 올까` 하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답니다. 하지만 다시 오겠죠. 그런데 그날의 제가 혹시나 여기가... 거기였나. 아니, 저기였나. 하고 헤메거나 혹은, 잊어버려서 어떤 장소를 지나쳐 버리진 않을까 하고 걱정도 됩니다. 제 얘길 들은 후배는 쓸데없이 나이들어 센티해지는 거라고 웃지만 정말 그런걸까요. 참 많은 사람들한테 미안한 일들이 자꾸 생각납니다. 저한테 잘해주거나 몹시도 비뚤어진 성격인 저에게 잘 챙겨주던 사람들도. 잊기 싫은 것들이 너무 많아요. 하지만 다른 곳으로 떠나서 새롭게 또 살려면 가벼워야 겠죠. 머리도 마음도. 너무 많고, 너무 큰 추억도 있는 곳이라 버리거나 추스리기에 힘이 드네요.

 

나이와 밥만 신나게 먹어대고 정신상태는 아직도 애가 맞는 것 같습니다. 이러다가 이사 전날 혼자 울다 잠들지 않을까 걱정입니다.하하.

이승환 노래 가사가 생각납니다.

 

 

-추억이 많은 정겨운 그대 잡은 손을 놓아줘요 마냥 그렇게 아쉬워하다 모두 놓치고 말걸요

 딱히 갈 곳이 없다고 해도 계속 머무를 순 없어요 또 다른 세상에 나갈 채비를 서둘러야 해요

GoodBye My love.. GoodBye My Friends 벗어뒀던 옷을 다시 고쳐입고 빨리 나가줘요 문을 닫을 거죠 떠밀려 나가길 바라나요

모든 새로움의 시작은 다른 것의 끝에서 생기죠 그때를 놓쳐서는 안되요 지금 여기까지가 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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